고려 문종이야기(4) 신하의 은퇴따위는 윤허치 않겠노라

 태평성대 고려 문종 이야기를 틈틈히 하려고 하는데요,

 

어느곳에서 조선 세종이 노신들의 은퇴를 허락치 않아, 신하들이 참으로 힘들었다는 좋은 글을 읽은적이 있었는데

문종 또한 노신들의 은퇴를 허락하지 않기로 유명하더군요.

고려는 70세가 되면 무조권 치사(은퇴)해야 합니다. 다만 임금이 궤장을 내려주면 예외로 계속 관직에 있을수 있었지요.

 

 

일단 시작은 문종원년부터 시작됩니다.

1047년 12월에 이부에서 70세가 된 의원 태의 김징악(金徵渥)을 은퇴시켜야 한다고 말했으나

문종께서는 "의술이 뛰어나니 몇년더 일해도 돼~"라고 말해주십니다.

즉 20대이신 문종께서는 70대 노인의 진료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

 

 

노인공경을 잘했던 문종은 이미 은퇴한 신하들에 대한 배려도 잊질 않았는데요,

문종3년에는 "치사한 노신들에겐 여름철에 날 더우니 3일에 한번씩 얼음을 매년 주도록!"라는 명을 내려주십니다.

 

 

물론 치사했다고 집에서 편히 쉬라는 것은 절대 아니고,

문종6년에는 "치사한 대신들은 짐이 뭘 잘못하고 있는지 주기적으로 보고해~"라고 압박도 내려줍십니다.

 

 

문종7년에는 최충(崔冲)이 늙어서 치사하겠다고 하자, 궤장을 내려주며

"차마 윤허 못하니까, 궤장 줄테니 좀더 일해~" 라고 하십니다.

 

 

문종11년에는 지맹(智猛)이 늙어서 치사하겠다고 하자, "제발 떠나지마~"라는 조서를 내리며 윤허를 거부합니다.

보다못한 중서성(현 총리실?)에서 "지맹의 치사를 윤허하소서" 하니 문종께서는

"짐이 윤허를 거부하노라~ 라고 이미 얘기했는데, 또 치사해라~ 그러면 지맹이 "저를 놀리십니까~" 그럴꺼 아닌가?"

이에 중서성은 "그러면 궤장은 안되고 딱 1년만 어떻습니까?" 하니

문종께서는 "1년이면 콜~"

 

 

하지만 이런 문종의 은퇴거부에도 은퇴를 실행한 노신들은 있었는데요.

문종17년에 박성걸(朴成傑)은 문하시중, 임종일(任從一)은 평장사로 승진시켰는데도 불구하고 치사를 단행합니다.

 

 

이에 문종께서는 뿔이 나셨는지 본격적인 은퇴거부를 시행하십니다.

 

문종22년 

-상서좌복야 왕현(王顯)이 세 차례나 글을 올려서 노퇴(老退)를 청하니, 윤허하였다.

 

세번정도는 은퇴를 청해야 들어주십니다만, 문종께서 나이를 드심에 따라 은퇴따위는 살포시 무시해 버리시지요.

 


문종35년

-병부상서 염한이 글을 올려서 노퇴를 청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공부상서 홍덕성(洪德成)이 두 번째 글을 올려서 노퇴를 청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 약간 유머스럽게 글을 꾸몄는데요, 그만큼 문종은 노신들을 대우하였고,

그들을 국정의 중심으로 삼았다는 점은 그만큼 나라가 안정되었다는 이야기도 되겠지요.

 

끝으로 사관 이제현이 문종을 평한 부분입니다.

 

고려사中

이제현이 말하기를, “현ㆍ덕ㆍ정ㆍ문 네 임금은 아버지의 일을 아들이 잇고, 형이 죽으면 아우가 받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80년 동안이나 성대하였다 할 수 있다. 문종은 절약과 검소를 몸소 행하였고, 어진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백성을 사랑하여 형벌을 신중히 하였고, 학문을 숭상하고 노인을 공경하였으며, 벼슬은 적임자가 아닌 사람에게는 주지 않았고, 권력은 근시에게 옮겨지지 않아서 비록 가까운 척리(戚里)라도 공이 없으면 상주지 않았고, 총애하는 근신이라도 죄가 있으면 반드시 벌하였다. 심부름하는 환관과 급사(給使)가 십수 명에 불과하였고 내시는 반드시 공과 재능이 있는 자를 뽑아 충당하였으니, 역시 20여 명을 넘지 않았다. 긴요하지 않은 관직을 생략하여 일이 간편하였고 비용이 절약되어 나라가 부유해지니 국창(國倉)의 곡식이 해마다 쌓여가고 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니 당시에 태평이라 일컬었다. 송 나라 조정이 매양 포상하는 명을 내렸고, 요는 해마다 왕의 생신을 경축하는 예를 표시하였다. 동으로는 왜가 바다를 건너 보배를 바쳤고, 북으로는 맥(貊)이 관문을 두드리고 살아갈 터전을 받았다. 그러므로 임완(林完)이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어질고 성스러운 임금이시다.' 하였다. 다만 경기의 한 고을을 옮기고 절을 지었는데 높은 집은 궁궐보다 사치스럽고 높다란 담은 도성과 짝할 만하며, 황금탑을 만들고 온갖 시설을 이에 맞추어서 거의 소량(蕭梁)에 견줄 만하였으니, 남의 아름다움을 도와서 이루어 주고자 하는 이들(군자)이 이 점에 탄식하는 줄을 몰랐도다." 하였다.

 

-이제현이 마지막에 살짝 아쉬움을 토로한 것은 바로 흥왕사(興王寺)의 건립문제입니다.

 흥왕사는 문종이 12년에 걸쳐 지은 대사찰로 2천 8백 칸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절이였지요. 초대 주지는 의천대사였습니다.

 조선초에 폐허가 되었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