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황혼, 강건성세의 여명(46) ─ 연갱요

 의심의 여지 없이, 강희 말에서 옹정 초기에 이르는 시기에, 연갱요는 청나라의 가장 뛰어난 군사 지휘관이었습니다. 옹정제의 제위 시기에 청나라의 서북 전선은 투르기스탄까지 포함하는 범위였는데, 옹정은 군사적 모험을 줄이는 쪽에 훨씬 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강희 시절부터 이어진, 청나라의 '중국의 서진' 작업은 전환점을 맞았는데, 이제 청나라 서북 전선의 변경에서 상당한 숫자의 군사력이 철수하기 시작했습니다. 극단적으로, 옹정은 코코노르에 청나라 군대에 주둔할 필요성은 전무하다고 여겼습니다.



 옹정은 바르콜에 군대를 집중하려고 생각했습니다. 먼 소수의 기지에서 군대를 오랫동안 주둔하게 하는 것은 병사들을 지치게 하는 일이고, 지속적으로 내지의 군대와 교대를 해주어야 했으며, 지방의 병사들은 주둔지에 보급품을 대는데 주력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벌어지는 부담과 비용은 대단한 것입니다. 옹정은 군비를 감축해 경비 절감에 신경을 쓰고 있었고, 1723년 4월 무렵에서는 티베트 부근에서도 군사력을 철수시켜 시닝과 사천 남부에 집중시켰습니다. 연갱요가 이 문제에 대해 충고를 하자, 옹정은 변방에 작은 경비 요새를 세우는데 그쳤습니다.


 강희 제위 시절, 말기의 준가르 문제에서 활약하던 인물 중에 푸닝가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1728년 명확하지 않은 이유로 강등되어 귀족 지위를 박탈되는 수모를 당했습니다. 아마도, 그는 옹정의 군비 절감 계획에 반대하다 그런 변을 당했을 것입니다.


 연갱요의 능력이 제대로 발휘되었던 것은 바로 이 시기 부터입니다. 정적인 방어에 집중해야 하고, 동원할 수 있는 군사력은 줄어들었고, 내지의 보급도 원할하지 않아 현지 둔전에 크게 기대어야 하는 상황. 청나라 병력은 바르콜에 2천, 투르판에 1천 백, 하미에 2천이 남았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5백여리 정도 떨어진 곳에 5천 정도의 병력이 주둔하는 요새가 설치되었습니다. 연갱요는 옹정에게 6천 이상의 병력을 서쪽으로 지원하자고 건의했지만 기가당했고, 청나리의 티베트 통제는 라싸에 주둔하는 매우 극소수의 주둔군과, 티베트 유력 귀족 몇명의 지원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송나라의 위대한 지휘관 악비의 후손이라는 이야기가 있던 악종기(岳鍾琪)가 병력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지만, 이 경우에도 옹정은 되려 악종기가 자원을 제대로 이용할 줄 모른다고 비난했습니다. 대다수 경우에, 옹정은 군대를 변방으로 파견하는것보다, 변방의 백성들을 내지로 이주시키는 편을 선호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코코노르의 왕공 롭짱 단진(티베트어 Blo-bzan-bstan-dsin)이 주변의 호쇼트 몽골을 비롯한 여러 몽골족을 공격하기 시작하는 일이 있었고, 이 문제에 대해서 연갱요는 개입하지 말자는 의견을 내었습니다. 유목민과의 전쟁에서 청군이 진격하면 "몽골군은 잘 먹인 말을 타고 멀리 달아나 우리 군대의 힘만 소모되는" 일이 너무 빈번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문제에서만큼은 연갱요가 신중파였고, 옹정은 강경하게 대처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들을 용서 할 수 없었습니다.


 연갱요는 옹정의 강경책에 대해 신중한 의견을 보였지만, 막상 명령에 따르게 되자 매우 효과적으로 적을 격퇴했습니다. 1724년 11월 24일, 시닝에서 20km떨어진 타얼사(塔尔寺) 부근에서, 그는 롭짱의 군대를 완벽하게 격파해내었습니다.



 
 타얼사


 옹정 제위 2년에 벌어진 이 승리는 옹정에게 대단한 권위와 안정을 주었고, 그가 '아키나'와 '사스헤' 등을 처리해버리던 무렵도 대략 이 무렵에 겹쳐 있습니다. 그만큼 제위 초기에 이런 대승은 그에게 큰 도움이 되었던 것입니다. 한달도 되지 않아 롭짱 단진은 완전히 패배하여 준가르로 달아났습니다. 이때, 준가르의 체왕 랍탄은 러시아와 카자흐 문제로 골머리를 썩고 있던 터라, 롭짱을 돕진 못했지만 은신처는 제공했습니다.


 청나라 군은 롭짱 단진을 도왔던 것으로 알려진 궈룽사(郭隆寺)를 공격하여 6천여 명의 승려를 끔찍하게 살해하고 사원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려 본보기로 삼았습니다. (이 사원은 훗날 문화대혁명 때 또 파괴되기도 합니다.) 조정에서는 이 승리를 오삼계의 삼번의 난을 진압했던 일이나, 가르단을 부셔버렸던 일에 버금가는 것으로 찬양했습니다. 물론 연갱요의 이 승리는 그 두개의 전투에 비해 기간이나 난이도 면에서 훨씬 짦고 수월했지만 즉위 무렵의 옹정에게는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엔 아주 적절했습니다. 이 전투의 결과로, 코코노르의 몽골 왕공들은 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형태의 자치권을 '사실상' 박탈당했습니다.


 '(청나라의 묘사대로라면)반란' 이 진압된 뒤, 코코노르는 몽골 땅처럼 기 체제로 점령되며 엄격하게 관리되었습니다. 이 문제는 연갱요가 책임을 지고 관리했습니다. 몽골 왕공들은 이제 기 체제에 편입되어 청나라 인사권자들의 감독 아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코코노르는 이제 더 이상 청나라의 변방이 아니었습니다. '내지' 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 경우에, 옹정은 신중파 지휘관인 연갱요와 악종기의 반대를 물리치고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 성공을 만들어낸 사람도 결국 연갱요와 악종기였습니다. 그들은 일단 원정을 위임받자 완벽하게 일을 해내었습니다. 옹정은 그를 매우 칭찬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게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연갱요가 전투에 나섰을 당시, 제위 과정에서 벌어진 여러 문제와, 또 막 즉위한 자신의 권위를 강화시키기 위해 옹정은 조속한 승리를 갈망했습니다. 하지만 신중한 연갱요는 반년이 지나도록 군사문제를 요구하는 상소만 올렸고, 옹정은 불안하여 이 문제에 대해 대학사 장정옥(张廷玉)과 의논했습니다. 장정옥은 잠시 생각하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장정옥

 "황상의 심정은 저도 잘 알겠습니다. 이번 싸움은 속히 시작해야 합니다. 하지만 용병은 정무와 달라서 약간이라도 조급하게 움직이면 만회할 수 없는 손실을 입을 수도 있습니다. 연갱요는 진중하고 온건한 것이 장점이빈다. 역대 명장들은 제각기 다른 특색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파해(巴海)는 지구전에 강했고, 조양동(趙良棟)은 기습전, 도해는 대치와 공격에, 피양구는 불리한 싸움을 역전시키는데 능했습니다. 또 주배공(周培功)은 임기응변에 강하면서도 멀리 내다 볼 수 있는 능력을 두루 갖춘 장군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께도 이들 명장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습니다. 신이 보기에, 연갱요는 군사 배치와 진퇴를 신중하게 하는 특성이 도해 장군과 같았습니다. 그가 어찌 반드시 이겨 공을 세우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보기에 3월에 평량에 입성하고, 4월에 서녕으로 이동한 것은 그리 늦은 속도가 아닙니다. 군기처에서 긴급히 사람을 보내 공격 시기를 물음으로서 재촉하는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장정옥이 연갱요가 닮았다고 말한 지휘관 도해는 이전에 언급한 바와 같이, 삼번의 난 진압에서 큰 공을 세운 인물입니다. 옹정은 장정옥의 말에 약간이나마 설득이 된 듯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을 쓸 땐 의심하지 말고, 의심스런 사람은 쓰지 않는 법이니 짐이 사신을 보내 감시하려 했던 마음을 접겠다. 그대는 2등 시위들 가운데 젊고 능력 있는 자 열 명을 선발하여 그 명단을 올리도록 하라. 그러면 짐이 그들을 연갱요의 군대에 보내 돕도록 하겠다."


 아리송한 말이었습니다. 말로는 감시를 안하겠다고 하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2등 시위들을 보내려고 하는가? 그들이 연갱요에게 합류한다고 해서 전력에 특별히 보탬이 될 것이 아닙니다. 이는 옹정이 연갱요를 믿지 못해 감시하겠다는 말로, 장정옥도 낌새를 눈치채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악종기의 자질 또한 연갱요 못지 않습니다. 그가 연갱요 주변에 있으면 조정에서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무슨 상상을 하는것인가? 짐이 어찌 연갱요를 의심하겠는가? 그를 믿지 못했다면 짐이 어찌 20만 대군을 그의 손에 넘겨주었겠는가? 잘 생각해 보거라. 성조 황제(강희제)께서 일찍이 귀족 청년들을 피양구 장군의 군진에 보내 군사를 배우게 했다면 오늘날 어찌 믿을만한 장수를 도통 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장정옥은 아무 말도 더 하지 않았습니다. 옹정은 학자 방포(方苞)에게 융과다와 윤사등을 욕하고, 이제 윤사를 쫒아내면 누가 자신에게 도전할 것이냐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방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연갱요가 그럴 것입니다."


 옹정은 잠시 아무말도 못하다가, 그래도 연갱요가 자신의 사람인데 그렇게까지는 못하지 않겠는가, 하고 말하고는, 다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정말 자기 뜻대로 일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겠는가? 악종기가 청해에 있는데 그의 말을 따르겠나? 군량은 어떻게 조달하고? 반란을 일으키려면 군사를 출동시키는데, 명분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에 방포는 만일 연갱요가 진심으로 마음을 먹는다면 군량이나 군비는 문제도 되지 않고, 그를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은 악종기라고 말했습니다. 훗날의 결과로 보자면, 옹정이 이 말을 귀담아 들었음이 분명합니다. 악종기는 연갱요 몰락에 있어서 상당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연갱요가 서북에서 대승을 연이어 거둠에 따라 그의 포상은 최고 단계까지 올랐습니다. 처음에 연갱요는 감격해하며 감히 받을 수 없다고 했고, 옹정은 옹정대로 연갱요 같은 인물 열명만 있다면 나라를 다스리는데 아무 문제도 없을 것이라 칭찬했습니다. 사실, 연갱요를 기고만장하게 하고 그의 권위를 지나치게 강력하게 한 책임은 옹정에게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옹정은 아직 조정 내에 버티고 있는 자신의 반대파들을 제압하기 위해서라도, 연갱요를 지나칠 정도로 뛰어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연갱요가 귀환할때, 옹정의 환영 의식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습니다. 연갱요와 3천여 병사가 북경으로 귀환하는 길은 온통 촛불과 꽃으로 장식되었고, 백성들은 나서서 개선 장군에게 환호했습니다. 감숙, 섬서, 하남, 직예를 지나는 동안 총독과 순무들은 모두 부리나케 달려와 영접과 환송을 하고 무릎을 꿇고 큰 절을 했고, 황제에게 올리던 음식과 술을 주면서 지극하게 예우했습니다. 이런 환영의 절정은 베이징의 서직문(西直門)에 이르러, 황제의 명을 받는 삼백여 명의 예부 관원, 상서 등이 모두 무릎을 꿇고 일제히 만세를 올리며 함성을 내질렀습니다. 


 그런데 연갱요는 웃음조차 지치 않고 고개만 약간 끄덕인채 입성했습니다. 북경 안에서는 천명이나 되는 관원이 모여 연갱요를 환영했고, 황제의 숙부들도 나왔습니다. 하지만 연갱요는 여전히 말에서 내리지 않고 있다가, 옹정이 웃으면서 다가오자 비로소 땅으로 내려왔습니다. 그 후 오직 연갱요만을 위한 연회가 벌어졌는데, 본래 예절대로라면 적당한 수준에서 연갱요는 정중하게 술을 거절하여 추태를 보이지 않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연갱요는 주는대로 술을 마셔버렸고, 이윽고 술에 취해 할말 못할말을 다 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만권의 책을 읽었으며, 실력이 뛰어나 진사가 되어보니 고작 스무살이었고, 이제 사람을 죽이고 눈 깜빡 조차 하지 않은 무관이 되었는데 황상은 자신의 말이라면 듣지 않는것이 없다, 이런 식의 이야기였습니다. 

 



 다음 날, 연갱요가 엄선한 3천여 명의 병사가 사열한채 일찌감치 대기했습니다. 이 병사들은 불길이 내리쬐는 태양 아래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습니다. 워낙 더운 날이었기에, 옹정은 만면에 웃음을 지은채 장수들을 위로하며 말했습니다.


 "올해는 더위가 무척 일찍 시작되었다. 그런데도 너희들은 중무장을 했으니 정말 고생이 많다. 모두 갑옷을 벗도록 해라."


 "감사합니다. 황상!"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옹정은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수하에게 말했습니다.

 
"아직 얼음이 남았는가? 얼음을 가져다 저들에게 가져다 주어라. 짐이 이미 저들에게 갑옷을 벗고 휴식을 취하라고 명했는데 듣지 못한 것인가? 시원하게 옷을 벗어도 될 것이다."


 하지만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는 장수들을 보자 옹정도 순간 얼어붙었습니다. 황제가 말을 두 번이나 했는데도, 전혀 따르지 않는다는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일입니다. 그때, 연갱요가 나섰습니다. 


 "황상의 뜻이 그러하니 너희들은 갑옷을 벗고 쉬도록 하라."


 그때가 되서야 병사들이 우레와 같이 대답하며 갑옷을 벗었던 것입니다. 옹정이 이 일로 대단히 놀라고, 또 연갱요를 두려워하게 되었음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때가 되자 옹정은 교활한 연기를 하기 시작하는데, 떠날 시기가 된 연갱요를 붙잡고 장황할 정도로 칭찬을 늘어놓는가 하면, 장래 그를 위해 당태종이 공신들을 기린것처럼 능연각을 준비해주겠다는 말도 하고, 심지어 눈물까리 흘리면서 선물을 주고 많은 상을 하사했고, 오직 연갱요를 위해 역참을 이용해 과일을 최대한 빠른 속도로 신선하게 배달해 주기까지 했습니다. 연갱요는 그런 대우에 거의 넋이 나갈 정도였지만, 이미 늑대와 같은 옹정은 비밀리에 악종기의 위상을 높여주기 시작했습니다.


 연갱요를 어찌 처리해야 할지, 이미 옹정은 마음을 굳힌 상황입니다. 하지만 연갱요가 워낙 공이 크고, 또 융과다와 달리 친위 세력도 버티고 있습니다. 그래서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야 했습니다. 옹정은 연갱요의 약점과 실수를 찾아내기 위해 분주하면서, 작은 일을 일부러 크게 만들어 그를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1725년 2월, 하늘에 해와 달이 동시에 뜨는 이상 현상이 발생했고, 이것이 길조로 해석되어 많은 대신들이 옹정에게 축하를 보냈습니다. 이는 연갱요도 마찬가지였는데, 문제는 그가 이 상소를 대충 써버렸다는 것입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라는 뜻의 ‘조건 석척(朝 乾夕洙)을, 연갱요는 실수로 '저녁부터 아침까지' 인 석척조건(夕洙朝乾)으로 작성해버렸습니다. 이는 실수임이 분명하지만, 황제의 이름이나 존엄한 대상을 실수로 적은것도 아닌만큼, 이 정도를 가지고 벌을 주기는 무리였습니다.


 그런데 옹정은 이를 기회로 삼아 말도 안되는 해석을 하며 연갱요를 비난했습니다. 조건석척은 주역에도 나오는 말인데, 연갱요가 책을 많이 읽은 만큼 이를 실수로 썻을리가 만무하며, 이는 옹정이 아침에도 근면, 저녁에도 근면하는 조건석척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비난하는 소리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옹정은 자신에게 비난을 퍼붓고 싶으면 확실하게 하라고 역정을 냈습니다. 


 연갱요가 추천한 인물 중에 감숙성 순무 호기항(胡期恒)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옹정은 자신이 직접 호기항을 만나보니 이렇게 형편없는 인물이 없다면서 그를 탄핵했고, 사천 순무 채정(蔡廷)이 연갱요에게 탄핵받자 오히려 그를 베이징으로 불러 위로해 주는 전혀 상반된 태도를 취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채정이 대놓고 연갱요를 욕하자 옹정은 신이 나서 그를 좌도 어사에 임명했습니다.


 연갱요를 최대한 고립시키기 위해 옹정은 그와 관련있는 관리들을 모두 공격하는 한편, 다른 신하들에게는 의도적으로 눈치를 주었습니다. 이를테면 직예 총독 이유균에게는 대놓고 연갱요의 최근 상소들이 매우 수상하며, 좋지 못한 의도가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사천 순무 왕경호의 상소문에는 이렇게 답을 달아주었습니다.


 "짐이 보기에 요즘 연갱요의 이상한 행동들이 정신적인 문제인지, 아니면 교만하여 그런 것인지 모르겠다. 그대가 비록 연갱요의 천거를 받았지만 그에게 의탁할 필요는 없다."


 옹정이 신하들에게 보낸 신호는 대략 세가지 방식이 있었는데, 연갱요와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연갱요가 최근에 이상하니 적당히 거리를 두라는 내용, 본래부터 연갱요와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노골적으로 근래에 연갱요를 손보겠다는 내용, 그리고 이도저도 아닌 사람에게는 연갱요가 그대를 몹시 싫어하니, 알아서 조심하라는 식의 중상모략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신하들이 알아서 연갱요에게서 거리를 두기 시작할 것은 자명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옹정은 연갱요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연갱요는 자신의 부하가 티베트의 백성들에게, 힘든 노역을 시키다가 이들의 배반을 불러왔던 경위에 대해서 짐이 추궁하자 그 전에 이미 보고를 마쳤다고 발뺌하였는데 실은 한번도 보고한 적이 없다. 왜 이런 거짓말을 했는가. 분명히 대답하라."


 하지만 실제로는 대답할 시간도 없이 연갱요는 뭘 손을 쓰고 변명할 틈도 주어지지 않은채 눈깜짝할 사이에 면직당했습니다. 그리고 항저우 장군으로 좌천되어 임지로 향하고 있는데, 아직 도착하여 뭘 하기도 전에 옹정은 연갱요를 힐문하는 조항들을 비오듯이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소금 전매권에 관련된 추문, 관리 모욕사건, 군사비 횡령죄, 죄없는 백성을 살육한 사건, 인사이동의 불공평성등 10여개 항에 달했습니다.


 연갱요는 몹시 두려워하면서도, 자신이 워낙 공을 많이 세우기도 했고, 또 누이가 옹정제가 총애하는 귀비였던 지라 설마 최악의 경우는 당하지 않을것이라 생각하며, 자신의 재산을 수레에 쌓아서 항저우로 항하는 길에 지인들에게 맡겨 보관을 부탁했는데, 벼슬을 모두 잃어도 이 재산으로 여생을 보낼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옹정의 비난이 워낙 심하자 다른 신하들도 기회를 놓칠새라 연갱요를 욕하는 상소를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한건마다 연갱요의 작위과 관직이 강등되었고, 위풍당당한 대장군이이었던 연갱요는 순식간에 일개 평민으로 격하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비난의 폭탄들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대역죄 5건, 기망죄 9건, 참월죄 16건, 광패죄 13권, 전권(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름)죄 6건, 탐욕죄 18건, 횡령죄 15건, 가혹 행위죄 6건, 잔학죄 4건 등등,  무려 모두 92개나 되는, 마음 먹고 죄만 저지르려고 해도 그렇게 하기도 힘든 엄청난 숫자의 조항이었습니다. 


 연갱요에게 주어진 최소한의 관용은, 참수가 아니라 자살하도록 한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자결하였고, 연갱요의 장남은 사형되었습니다. 그리고 연씨 집안의 열다섯 이상의 남자는 모두 유배에 처해졌고, 재산은 모두 몰수되었습니다. 


 가장 무서운것은, 옹정의 귀비였던 연갱요의 누이, 연귀비에 관한 일입니다. 연갱요의 재판에 앞서, 연귀비의 병환이 발표되었습니다. 그리고, 귀비가 병으로 죽으면 한단계 위인 황귀비의 예로 장례를 치루라는 명령까지 내려왔습니다. 예고된 병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뻔한 일이었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