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진 거란을 멸하다 4부 - #2 영강주성(寧江州城) 전투

 1114년 9월 대요 최초의 전투였던 찰지수 전투를 승리한 여진군 2500은 

곧바로 영강주성(寧江州城)을 공략합니다.
이미 영강주를 비롯한 주변 4개 지역의 병력이 대부분 찰지수에서 궤멸한 상태라, 
영강주의 병력은 미미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금사에 보면, 찰지수 전투가 끝난 후 다른 곳에 주둔하고 있었던 아골타의 사촌 살개(撒改)는 
두 아들 종한(宗翰)과 완안희윤(完顏希尹)을 아골타에게 보내 칭제(稱帝)할 것을 권유합니다.
이에 아골타는 다음과 같이 말하지요.

금사 1114년 9월 기사 中
「一戰而勝,遂稱大號,何示人淺也。」
「한번 싸움에 이겼다 하여, 드디어 대호(大號/큰 이름, 황제)를 칭한다면, 어찌 사람들이 천(淺)하다 보지 않겠는가.

그리고는 곧장 군을 이끌고 영강주성으로 향합니다.

그럼 영강주성이 여진군의 첫 타겟이 된 이유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얼마 전에도 언급한 [타여진(打女真)], 즉 [여진놈은 때려야 한다]가 언급되어 있는 곳이 
바로 영강주입니다.
영강주는 요와 여진의 최동북방 경계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요에서는 영강주에 각장을 설치하였지요.
각장에서 여진인은 진주, 인삼, 금, 소나무 열매, 노랑돌쩌귀, 꿀에서 짜낸 기름, 삼베 등을 팔았는데
영강주의 거란 상인들이 여진인을 우습게 보고, 제대로 가격을 쳐주지 않았지요.
이에 여진인들이 항의하면, 멱살을 잡고 욕을 하는 게 다반사였나 봅니다.
해서 생긴 말이 [여진놈은 때려야 말을 잘 듣지]라는 뜻의 [타여진]이지요.

이렇듯 영강주는 여진인의 원한이 서린 복수의 대상이 되고 만 것입니다.


거란국지 천조황제 1114년 기사中
先是,州有榷場,女真以北珠、人參、生金、松實、白附子、蜜蠟、麻布之類為市,州人低其直,且拘辱之,謂之「打女真」
이에 앞서, (요의 영강) 주(州)에 각장(榷場/송, 고려, 거란, 여진 등이 무역하는 장)이 있었는데, 
여진(女真)은 북주(北珠/혼동강, 송화강 등에서 나오는 진주), 인삼(人參), 생금(生金/정련되지 않은 금), 송실(松實/소나무 열매), 백부자(白附子/노랑돌쩌귀로 진통제 등의 약재로 쓰임), 밀랍(蜜蠟/꿀에서 짜내는 기름), 마포(麻布/삼베) 종류(種類)를 장사하였는데, (요의 영강) 주(州) 사람이 그 값을 낮게 쳐주며, 또한 (멱살을) 잡고 욕하니, 
이를 일컫어「타여진(打女真/여진인은 때려야 한다) 」이라 하였다.


※ 영강주성 점령 과정
1. 영강주성을 완전 포위
2. 해자 메움
3. 영강주에서 거란인이 동문으로 출격하여 뚫고 도주하려 함
4. 아골타 온체흔(溫蒂痕)과 아도한(阿徒罕)으로 요격하여 모조리 전멸시킴

금사 1114년 9월 기사中
進軍甯江州,諸軍填塹攻城。甯江人自東門出,溫蒂痕、阿徒罕邀擊,盡殪之。
영강주로 진군하여, 각 군에 해자를 메우게 하고 성을 공격하였다.
영강인이 동문으로부터 나오자, 온체흔(溫蒂痕)과 아도한(阿徒罕)이 요격(邀擊)하여, 진에(盡殪/전멸) 시켰다.

여진군 이동로 : 완안부 → 요회성 → 찰지수 → 영강주



※ 영강주성은 현재 길림성(吉林省) 부여시(扶余市) 석두성자(石頭城子) 고성(古城) 유적지이며 평지성으로
    요사 지리지는 동경도(東京道) 예하의 영강주혼동군(寧江州混同軍)으로 편성됨
    1114년 10월 1일 여진군이 함락한 후, 바이두 백과사전에 따르면 곧장 폐성하였다고 함.
    기존 요의 영주성을 폐성하고, 현재 부여시 인근으로 관아를 옮긴 것으로 추정됨







5. 10월 1일 영강주성 함락

※ 영강주성 함락 후 처리
1. 거란인이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죽임
2. 갑주와 말 3천을 확보
3. 영강주 방어사(防禦使) 대약사노(大藥師奴)만 풀어줌 → 다른 곳의 거란인을 회유하라 명함

거란국지 1114년 9월 기사中
復攻破寧江州,無少長,悉殺之。
(여진족이) 다시 영강주(寧江州)를 공파(攻破/공격하여 깨트림)하여, 소장(少長/어리고 늙음)에 관계없이, 모두 죽였다.

거란국지 1114년 9월 기사中
州既陷,殺之無遺類,獲遼兵甲馬三千,
주(州)가 이윽고 함락당하자, 무리를 남김없이 죽였으며, 
요(遼)의 병갑마(兵甲/병기와 갑주을 갖춘 말) 3천을 획득하고, 


6. 내유성(來流城)으로 퇴각
- 전리품을 부하들에게 골고루 나눠 줌
발해인 양복(梁福)과 알달랄(斡答剌)을 풀어줌 → 다른 곳의 발해인을 회유하라 명함
  → 유명한 [여진과 발해는 본시 한 집안이다] 발언
      女直、渤海本同一家
- 계요적여진(系遼籍女直/거란 국적에 얶매여 있는 여진), 
  즉 숙여진에 완안누실(完顏婁室)을 보내 회유함


7. 완안부로 완전 퇴각
- 맹안모극제 체제 확립을 각 부족에 명함
- 별고부(鱉古部) 추장 호소로(胡蘇魯) 항복함
- 참모수(讒謀水) 여진 부락 항복함


8. 요의 움직임
영강주성이 함락된 10월 1일 요에서도 2차 토벌군 7천명이 편성됩니다.
지난 9월 여진군이 움직였다는 급보를 받은 천조제는 경주에서 사냥을 하다가,
별로 개의치 않고 발해인 고선수에게 3천 발해군을 이끌고 영강주로 가라고 명한 후
다시 추산에서부터 현주까지 이동하면서 겨울 사냥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이러던 중 영강주성이 함락되었다는 것을 보고를 받았음에도,
사냥을 멈추지 않고 소사선에게 2차 토벌군 7천을 편성해 토벌을 명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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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부 혼돈강 출하점 전투에서 계속됩니다.-

P.S) 본 글은 동의 없이 어느 곳에나 담아 가셔도 됩니다. 출처는 남겨주시면 고맙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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