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무 21년 3월 남옥에게 명하여 군대 15만을 거느리고 이를 정벌하게 하였다.
대녕(大寧)을 나와 경주(慶州)에 이르러서는, 원주(元主)가 포어아해(捕魚兒海)에 있다는 것을 염탐해 알고, 샛길로 아울러 진군하여 백안정(百眼井)까지 이르렀다. 포어아해와 4리 떨어져 있었는데, 적을 보지 못하니, 귀환하고자 하였다.
정원후(定遠侯) 왕필(王弼)이
"우리가 10여만 군사를 이끌고, 막북(漠北) 깊숙히 들어왔는데, 아무런 소득이 었이, 갑자기 군대를 되돌린다면, (황제에게) 뭐라고 복명(復命)하시겠습니까?"
라 했다. 남옥이
"그렇소"
라 했다.
군사들에게 영을 내려 땅을 파서 아궁이를 때워 연기와 불을 보이지 않게 하고, 야음을 틈타 포어아해 남쪽에까지 이르렀다. 적의 영은 아직 포어아해 동북쪽 80여리에 있었는데, 남옥은 왕필을 선봉으로 삼으니, 질풍같이 내달려 그 영에 육박했다. 적들은 아군에 물과 풀이 모잘라 깊이 들어올 수 없을 거라 생각해, 방비를 하지 않았었다. 또 큰 바람이 불어 모래를 날려 낮이 밤같이 어두웠다. 군이 행군하였지만, 적은 알아채지 못하였다.
창졸간에 그 앞에 이르자, 크게 놀라, 맞아 싸웠으나, 적을 패배시켰다.
태위(太尉) 만자(蠻子) 등을 죽이고, 그 무리를 항복시켰다. 원주(元主)가 태자 천보노(天保奴) 수십기와 함께 달아났다. 남옥이 정예기병을 거느리고 이를 추격하였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원주의) 차자(次子)인 지보노(地保奴)와 비, 공주 이하 1백여인을 붙잡았다. 또한 추격하여 오왕(吳王) 타아지(朵兒只), 대왕(代王) 달리마(達里麻) 및 평장 이후 관속 3천명과 남녀 7만 7천여인, 아울러 보새(寶璽), 부칙(符敕), 금패(金牌), 금은인(金銀印)의 여려 보물, 말과 낙타, 소, 양 15만여 마리를 얻었고, 불태운 그들의 갑주나 의장은 쌓아 놓은 것을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승첩을 경사로 보고하자, 황제가 크게 기뻐하며 칙서를 내려 그 공을 기리고 위로하면서 그를 위청(衞青), 이정(李靖)에 비견하였다. 또 합라장(哈剌章)의 영을 격파하고, 사람과 가축 6만을 노획했다. 군대가 귀환하니, 양국공(涼國公)으로 봉작을 올렸다.
─ 명사 남옥전
그냥 시망..
토구스 테무르가 달아날때,
아리크부카 계통의 왕족 이수데르(Yesuder)가 오이라트의 지원을 받아 그야말로 팀킬을 하면서
완전히 숨통을 끊어놓아 전멸시켰고 결국 최후까지 추격해서 나중에 토구스 테무르를 죽이게 됩니다.
아리크 부카가 쿠빌라이 칸과 과거에 대결을 벌인건 유명한데, 이렇게 보면 복수를 한 셈이고.
또 나하추가 항복하고 토구스 테무르가 격파당했을 시점부터 몽골의 왕공들이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줄을 서서 명나라에 항복을 하고 대규모 투항을 하게 되구요.
위화도 회군은 1388년 음력 5월이고 양력으로 치면 6월 말에서 7월경에 이릅니다.
앞서 명사 남옥전에서는 토구스 테무르를 격파한게 1388년 3월에 출발했다고 나와있다고, 4월경 쯤에 싸워서 결판을 내었을것을 보면....
개인적으로는 이성계가 자기 연락통으로 어떻게든 이 이야기를 단편적으로 나마 듣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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