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8년 1월 8일, 장제스는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 취임했고, 1월 20일에 남경 국민정부는 '북벌 전군 전투 서열령'을 반포하고, 전체 북벌군은 장제스의 총지휘를 받도록 결정했습니다. 염석산, 풍옥상, 양수장(楊樹莊) 등은 각각 장제스에게 전문을 보내, 장제스의 지휘에 따르겠다는 표시를 했습니다. 2월 22일 장제스는 다시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주석이 되었고, 전문을 발표하면서 단사간 내에 북벌은 완수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습니다. 국민정부의 군사실권을 완전히 장악한 장제스는 2월 28일 북벌군은 정식 편성합니다.
북벌 총사령관 장제스
제1 집단군 총사령관 겸임
18개군 29만 병력
제2 집단군 총사령관 풍옥상
25개군 31만 병력
제3집단군 총사령관 염석산
11개 군 15만 병력
제4집단군 총사령관 이종인
해군 총사령관 양수장
4개 함대 보유
병력에 더해 무장의 질이나 군대의 수준을 보면 장제스의 실력이 가장 강력했고, 풍옥상과 염석산의 순이었습니다. 이종인의 경우에는 실력을 보존하려는 뜻이 있어 전부를 투입하진 않았습니다.
3월 16일 장제스는 국민혁명군 북벌 총방략을 발표했고, 봉천 군벌을 완전 소멸시킬것을 결의했습니다. 당일 북경과 상해의 신문기자들을 초청한 장제스는 이 자리에서 봉천, 산동군의 숫자가 50만 명 가량이며(실제로는 80만), 혁명군은 그보다 숫자가 많고 무기가 더 강하니 쉽게 이길 수 있을것이라고 공언했습니다.
3월 31일 장제스는 서주로 북벌군을 진격시켰습니다. 같은 날에 '후방 동지들에게 보는 북벌 출발 보고서' 라는 것을 발표하여 장병들을 격려하였고, 4월 7일 마침내 총 공격령을 내렸습니다. 장제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과 국가의 존망, 이념의 성패, 인민의 화복, 동지들의 영욕은 모두 이번 전쟁에 달려있다."
이전 군벌들의 전투는 움직이는 규모에 비해서 실제 전투 자체는 그리 대단한 면이 못되는 면이 많았습니다. 그에 비해서 이번 전쟁인 이상할 정도로 치열한 전투가 왕왕 벌어졌는데, 특히 염석산이 국민혁명군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또 지지 기반을 넒히기 위해 격렬하게 나섰습니다.
왼쪽의 젊은이는 장학량이고 오른쪽은 부작의(傅作义)라는 사람입니다. 부작의는 혁명군인데 사진은 전투 후에 봉군에게 포위되어 3개월간 버티다가, 장학량에게 항복하고 찍은 사진입니다. 장학량은 부작의를 적으로 보지 않고 군단 참모장 가족의 숙소에 머굴고 해주고, 매월 생활비를 주었고 출입 제한도 두지 않았습니다. 부작의는 나중에 기회를 틈타 달아났습니다.
장작림은 장제스를 막아내기 위해 군사 회의를 열었습니다. 이 회의에서 봉군에서 가장 강력한 장학량과 양우정의 제3,4방면군의 움직임에 대한 논의가 있었는데, 이 부대는 병력이 충분했고 군수 물자와 무기 공급도 좋았으며 싸움도 잘했습니다. 그런데 이 부대로 장제스를 막아내는것이 아니라 풍옥상과 염석산을 공격하기로 협의가 되어버렸습니다.
장제스가 이끄는 제1집단군은 북벌군 최고의 정예 부대입니다. 이 부대는 봉군 최고의 병력 대신, 장종창과 손전방의 무능하고 군기가 헤이해진 병력과 싸우게 되었습니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이 회의에서 어떤 사람이 그런 문제를 지적했지만, 장종창이 자신의 지지 기반인 산동에 다른 사람이 끼어드는것을 불쾌하게 여겨, 스스로의 군대로도 산동을 지킬 수 있어서 그렇게 결정이 되었다고 합니다.
우려 대로 장제스의 북벌군은 손전방과 장종창의 군대를 여지없이 깨부셨고, 봉군 3,4방면군은 풍옥상과 염석산 등은 순조럽게 물리쳤지만 저쪽의 패배로 이쪽의 후로가 차단될까 두려워 후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장제스는 개봉에서 풍옥상과 작전회의를 했고, 장제스가 계속 산동쪽으로 밀고 들어가고 풍옥상이 장학량, 양우정을 상대 하기로 했습니다. 봉군은 이 회담을 눈치챘으나 그 후에도 대전략은 바뀐것이 없었습니다. 장학량과 양우정은 이 정예군을 이끌고 풍옥상을 공격, 풍군의 부대들을 괴멸시켰고 곧이어 염석산까지 공격해서 후퇴시켰습니다. 이쪽 방면의 전투는 확실히 봉군에게 유리하게 전개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이, 산동에서는 장제스의 군대가 손전방과 장종창을 쉴새없이 두들겨대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는 대로 족족 함락되었고 산이 무너지듯 계속해서 패배하기만 했습니다. 장제스는 5월 1일 제남에 이르렀고, 장종창과 손전방은 서둘로 도망쳤습니다. 계속 북진하던 장제스는 5월 3일 일본군이 제남 근처에 북벌군이 오는것과, 철로를 이용하는것을 막자 굳이 상대하지 않으려 제남에서 물러나 5개 길로 나뉘어 황하를 건넜습니다. 덕분에 북벌의 속도는 조금 지체되었습니다.
이 시간벌이 동안 장작림은 단호한 조치를 취해야 했습니다. 장작림은 란현, 락정, 창려, 노령, 무녕 등에 제2방어선츨 구축하도록 하는 동시에, 제3,4,5,7 방면군을 모두 신속히 산해관 밖 관외로 후퇴하도록 했습니다. 장학량과 양우정은 이 소식을 듣고 부대를 이끌고 돌아왔고, 5월 9일 장작림과 정전에 관한 일을 논의했습니다. 장학량이나 양우정이나 똑같은 의견으로 대답했습니다.
"휴전을 함이 좋겠습니다."
이쯤되자 장작림도 대세는 인정 할 수 밖에 없어, 휴전 전보를 보냈습니다.
"국내의 정치는 사리에 옳고 그름에 따라 국민의 공정한 판단을 듣도록 하겠다."
북경을 떠나는 장작림. 표정이 매우 좋지 않습니다.
5월 12일, 장제스는 장작림의 이 휴전 선언이 '성의가 없다' 는 이유로 거들떠 보지도 않고 북벌을 계속해서 감행하기로 했습니다. 장작림은 봉군을 후퇴시켰고, 6월 1일 북경을 떠난다고 발표했습니다.
장제스와 장작림의 대결에서, 장제스가 승리했습니다. 장작림은 산해관 밖에 있는 모든 기반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아직은 그에게 동북3성이 있었고, 이 지역은 그가 일어설 수 있게 해준 기반이었습니다. 장작림은 이를 기반으로 권토중래를 꿈꾸었을테지만, 상황은 그의 편이 아니었습니다.
일본 관동군은, 다시 한번 움직임을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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