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한 역사가, 라시드 앗 딘(Rashīd al-Dīn)은 오이라트는 초원의 부족을 처음 묘사한 인물 중에 한명입니다. 1201년, 몽골 계통의 부족 오이라트의 족장 쿠두카 베키는 칭기스칸과 전투를 벌였지만, 패하였습니다. 이들은 '삼림 민족'으로 불렸는데, 실제로도 유목보다 사냥과 물고기를 잡아서 생활했습니다. 눈치챘겠지만, 이 부분은 만주족과 비슷합니다.
다른 부족들처럼 그들은 주술사가 큰 위치를 차지했고, 북쪽으로는 키르기스와 나이만, 동쪽에는 메르키트, 서쪽으로는 투마트 등을 이웃으로 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한 1201년의 전투는 신화적인 색채로 윤색되어있는데, 전투의 묘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오이라트 쿠두카 베키(그리고 다른 세 사람), 이 네 사람은 자무카(Jamuqa)의 군대를 싸움으로 이끌었다. 두 군대가 서로 돌격하는 순간, 위대한 주술사들인 부이룩 칸과 쿠두카는 주술로 폭풍과 어둠을 불러왔다. 그들은 우리를 눈멀게 하려고 폭풍과 어둠을 불렀지만, 순간 폭풍이 방향을 바꿔 적군 자신들의 눈을 가렸다. 그들의 병사들은 산비탈 계곡으로 뛰어내리면서 앞을 보지 못한 채 절규했다.
"하늘이 우릴 배신했도다!"
그리고 그들의 군대는 흩어졌다. 쿠두카 베키는 숲으로 도망가서 시스기스까지 물러났다.
싸움이 끝난 후 달아났던 쿠두카 베키는 현명한 결정을 내렸는데, 수하의 4천을 이끌고 테무진에게 귀순한 것입니다. 쿠두카는 이후 1217년에 주치의 원정을 도왔고, 그 영향으로 칭기스칸의 후손들과 결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칭기즈칸이 죽고 나자, 오이라트는 나누어진 네 형제 ─ 곧 톨로이, 우구데이,차가타이, 주치의 영지와 모두 마주하는 절묘한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다시 쿠빌라이와 아리크 부카가 벌인, 몽골 제국 중 가장 거대하고 역사가 깊은 영지를 두고 벌인 대전에 참여하여, 쿠빌라이에 대항했습니다. 승리자는 쿠빌라이였고, 오이라트는 그 대가로 한 세기가 지날때까지 역사 속에서 전혀 이름을 보이지 못하였습니다.
쿠빌라이 칸의 권세는 하늘도 가를 지경이라, 바야흐로 세계의 지배자라고 할 만 했습니다. 그러나 원나라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후진적인 ─ 그러나 또 어쩔수 없는 ─ 행정 체계를 이루어내었고, 색목인들의 조세 정책은 조세를 걷는다기보다는 약탈에 가까운 수준으로, 필연적으로 멸망의 길로 가게 되어, 홍무제 주원장은 문자 그대로 그들을 중국 내에서 '밀어내었습니다.' 원의 마지막 황제인 순제, 즉 토곤 테무르는 싸움 한번 못해보고 수도를 버리고 북으로 향하였는데, 이제 역사 속에서 사라졌던 오이라트는, 다시 한번 등장하게 됩니다. 이번엔 쿠빌라이의 후손들에 대한, 반대 세력으로서 말입니다.
명나라가 즉위 초부터 말기까지 에센 타이시, 알탄 칸 등에게 시달린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할 수 있을법한 오해가, 에센 타이시나 알탄 칸등을 동일한 소속으로 착각하는 경우입니다. 오이라튼 기존의 몽골 세력이 비하면 서쪽에 위치하고 있고,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몽골 초원의 ─ 보통 타타르라고도 이야기를 많이 하는 ─ 몽골 세력과는 계속해서 싸우던 존재입니다. 게중에 오이라트가 몽골 세력을 모조리 눌러버리고 자신들이 우위에 있던 시절이 있는 반면, 몽골 세력 ─ 편의상 타타르 ─ 이 오이라트를 눌러버리고 패권을 차지하던 시기도 있습니다.
분명하게 말하지만, 명나라 시기에 오이라트와 타타르는 서로에게 있어 최대의 적입니다. 되려 명나라는 서로간의 대립에 비하면 두 몽골 계통 세력에게 있어 최대의 적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이 다툼은, 1399년 타타르의 엘베크 칸이 오이라트에 살해당하여 절정에 치달았습니다. 그리고 두 세력의 분쟁을 지켜보는건, 막 개국하여 국력이 넘치던 거대한 제국, 명나라였습니다.
홍무제 주원장이 개인적으로 뛰어난 군사 지휘관이고, 식견도 부족하지 않다는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습니다. 장사성, 진우량 등을 물리치는데 있어 홍무제가 내린 판단들은 과연 적절하였는데, 그러나 홍무제는 황제의 자리에 오른 후, 외국과의 전쟁은 명나라의 위대한 대장군 서달(徐達)이나, 남옥(藍玉)같은 명장들에게 일임하였습니다. 그러나, 영락제는 달랐습니다. 스스로가 노련한 군사지휘관인데다, 몽골 세력의 상황을 잘 알고 있는 그는, 이제 자신이 나설 시기를 보며 그들의 다툼을 지켜보았습니다.
1408년, 타타르의 새로운 칸이 즉위하였고, 실질적인 배후 실력자라고 할 수 있는 아룩타이(Aruqtai)에게 영락제는 사절을 파견했지만, 영락제의 사절은 피살당했습니다. 그러자 영락제는 오이라트의 편을 들며 이 초원의 분쟁에 개입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영락제에게 작위를 받은 인물 중에 한명이 바로 오이라트의 마흐무드(Mahmud) 였습니다.
1409년, 영락제는 정로대장군(征虜大將軍) 구복(丘福)에게 10만의 군대를 맡겨 파견하였고, 마흐무드도 이를 도왔습니다. 구복은 병졸로 시작해 대장군까지 된, 그야말로 입지전적 인물이었으나, 이 당시 나이가 무려 66세(1343년생) 이었던 것이 문제가 되었는지, 판단을 그르쳐 너무 깊숙히 적을 추격하는, 유목민족을 상대로 하여 가장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결국 보급로도 찾을 수 없는 먼 초원의 한복판에서 대군은 타타르 군대에 포위당하였고, 군대는 전멸하고 대장군 구복도 이름도 모를 초원 한복판에서 사망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무렵 영락제는 제국의 수도를 북경으로 옮겨, 무게의 중심을 다시 북쪽으로 돌려놓았습니다. 북경에서 저 타타르와의 거리는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았으니, 이것은 위험할수도 있고, 어찌보면 그들을 견제하는 배수의 진일수도 있습니다. 1410년, 영락제는 무려 50여만의 엄청난 대군(현실적으로는 10만~20만), 3만대의 수레를 이끌고 북경을 출발하였습니다. 총사령관은, 다름 아닌 영락제 본인이었던 것입니다.
영락제는 우선 오이라트의 세력 앞에서 군대의 위엄을 보이고, 자신을 거스른 타타르에 대한 공격에 나섰습니다. 타타르의 칸은 오이라트의 마흐무드가 추격하여 살해했고, 그 부대는 영락제에게 철저하게 격파되었습니다. 따로 남은 타타르의 실권자 아룩타이는 영리하게도 자신은 이제 조공을 바칠것이고, 자신을 동맹으로 받아준다면 항복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영락제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문제는 오이라트의 마흐무드였습니다.
마흐무드가 보기에, 저렇게 타타르와 명이 손을 잡는다면, 오이라트가 몹시 위기에 처할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그래서 그는 3만의 병력을 케롤렌 강 쪽으로 보내, 중국에 대한 군사적인 움직임에 나섰습니다.
북경의 영락제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다시 한번 대군을 일으켰습니다. 1414년, 툴라강에서 명나라 대군과 오이라트 군대가 교전했고, 명군의 대포는 이들을 격파했습니다. 그러자 오이라트 군대는 도주했는데, 영락제는 이들을 따라잡을 수 없었습니다. 도주한 마흐무드가 화친을 요청하자, 영락제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별 수 없어서일 뿐 완전히 신뢰하였던것은 아닙니다.
그때, 타타르의 아룩타이가 마흐무드를 죽이는데 성공, 일시적으로 세력을 잡고 오이라트를 눌러, 명은 오이라트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자 이번에는 타타르가 문제가 되어, 북경으로 가는 대상들을 약탈하는 등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자 영락제는 또다시 진군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제국의 내부에서는 이런 끊없는 원정에 대한 반발이 나서고 있었습니다. 3차 워정에서는 수레 117,573대, 병력은 235,146명, 곡식은 37만석, 당나귀는 34만 마리에 또다시 20만 마리를 사용하도록 했는데, 이는 엄청난 부담이 되었습니다. 제국의 관료들은 이 서북원정과 더불어, 저 위대한 항해가 정화(鄭和)가 벌이는 원정에 들어가는 엄청난 비용에 대해 크나큰 우려를 표시했는데, 이는 경청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소비를 해도, 실제적인 목표를 이룰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아룩타이가 영락제의 공세에 대응한 방법은 간단했습니다. 달아나버리는 것입니다.
한차례 교전을 벌이면, 명군은 틀림없이 아룩타이를 지옥 구덩이로 빠뜨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한번이 불가능했습니다. 춥고 메마른 사막의 한 가운데서, 대군은 움직이기는 커녕 자리를 유지하는것도 어러웠고, 울란바타르에 도착했지만 적군을 구경조차 할 수 없었던 영락제는 화가 나서 아룩타이와 전혀 관련이 없는 부족 셋을 박살내었습니다.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한 영락제는 쓸쓸하게 귀환했고, 이는 4번째, 5번째 원정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룩타이를 추격하고, 보급이 부족해져서 아무 성과도 내지 못하고 돌아오고.
영락제는 좌절감과 무력감을 느끼면서, 마지막 원정의 귀환길 전에 사망했습니다. 영락제는 분명 홍무제 이후 명조의 황제들 중에 가장 용맹무쌍했고, 명암이 있는 군주지만 군사적인 식견, 무엇보다 초원세력에 맞서, 스스로 기지개를 켜고 나와, 지도에서 보이는 세계의 끝으로 용감히 행군할 준비를 언제든치 마친 인물이었습니다. 북정록(北征錄)에서, 중화인들의 세계관에서, 바야흐로 세계의 끝으로 이동한 영락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학자들은 종이에 있는 것만 볼 줄 안다. 이것은 자신의 눈으로 본 것과 비교할 게 못 된다."
북으로 진군하여 저 몽골 제국의 잔당, 오랑캐들을 물리치는데 있어 연왕 주체, 성조 영락제 보다 적합한 인물이 누가 있을 것인가? 그러나 그 영락제 조차도 원정의 가장 큰 목적을 이루진 못했습니다. 제국을 구성하는것은 수많은 숫자들의 합이고, 이는 원정의 필요성에 대해 역설하게 됩니다. 간단하게 말해, 원정을 성공시켰을 경우 예상되는 기대 비용보다, 원정을 시행함으로서 사라지는 원정 비용이 더 거대했던 것입니다.
영락제 이후 명은 다시는 공세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칭기스칸, 티무르. 이러한 이름들에 견줄만한 위대한 지도자는 아무도 없었고, 명나라의 번영은 끝도 없을 정도로 가공하였으나, 명은 그들 유목 세계에 대해 결정적인 피해를 줄 아무런 방법도 없었고, 실제로 말하자면 의지도 없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아룩타이의 타타르에게 밀렸던 오이라트는 다시 한번 반격에 나섰습니다.
아룩타이는 오이라트에게 패했고, 결국 1434년 사망했습니다. 죽은 마흐무드의 후계자 토곤과, 다시 그를 이어받은 아들 에센 타이시가 위업을 이어나갈 인물이었습니다.
선덕제
명나라의 전성기를 말할때, 선덕제의 이름이 거론됩니다. 영락제가 이전, 그리고 이후의 명나라 황제들과 비교해서 대단히 공세적이었던것에 비하여, 영락제의 아들 홍희제(洪熙帝)는 성향이 그와는 완전히 반대였고, 남경으로 다시 돌아가는 일도 고려하였으나 워낙 일찍 사망하여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진순신은 농담 삼아 홍희제가 운동을 열심히 해서 체중 감소에 성공했다면(홍희제는 대단히 비만이었다고 합니다), 제국의 역사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홍희제의 뒤를 이은 선덕제는 영락제와 홍희제의 극단에서 중간자적인 입장을 취했습니다. 일단 이런 이야기는 넘어가겠습니다. 중요한건 오이라트의 일인데, 선덕제의 기간동안 실제로 오이라트는 중국 내부에 위협을 줄 움직임을 취하지 않았고, 선덕제는 무탈하게 치세를 이어나갔습니다. 문제는 정통제(正統帝)의 시대 입니다.
정통제는 1436년에 즉위하였습니다. 그리고 오이라트의 에센은 1443년, "타이시"의 칭호를 물려받음으로서 곧바로 움직임에 들어섰습니다. 그는 중국에 우호적이던 몽골인들을 공격했고, 이후 명나라에 수천명의 어마어마한 조공사절을 보냈습니다. 명나라는 이에 경악했고, 적당히 본래가 불평하였으나, 되려 오이라트는 실제보다 조공 사절의 숫자를 부풀리는등의 면모를 보이자, 참지 못한 명은 이를 막아버렸고 결국 이에 불만을 가진(혹은 핑계를 만든) 에센은 군사를 이끌고 공격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문제는 정통제의 대응입니다. 명나라와 오이라트의 전력 자체는 하늘과 땅이였으며, 하물며 그들을 추격하려 막북까지 진격하는것도 아닌, 제국의 내부에서 물리치는 일입니다. 그런데 정통제는 군사적인 일에 무능한 자신이 직접 출전하면서, 최고 보좌역으로 환관 왕진(王振)을 데리고 나섰습니다. 왕진은 문제가 많은 인물이지만 그 내부적인 이야기는 지금 은 생략하겠습니다.
다만 왕진이 군사 경험이 전무했다는것만 말하고자 합니다. 한명의 유능한 장수에게 일군을 보내면 족할 싸움을, 굳이 친정을 권한 사람도 왕진이었습니다. 결국 오합지졸로 모인 50만 대군은 에센에게 격파당했고, 그들은 토목보라는 요새에서 갇히다가, 결국 명제국의 황제가 에센의 포로가 되는, 사상초유의 사태까지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이 싸움이 명과 오이라트의 군사적인 힘의 차이를 말한다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중간 과정이 엉터리같은 일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이 사건은 "사고"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그렇게 "쓸데없이" 많은 군대를 파견하여 보급의 어려움을 초래하지도 않을 테고, 너무 진격하다가 갑자기 후퇴하여 후위를 마구 공격하지도 않았을테고, 가장 가까운 도시를 "왕진의 재산을 담은 수레들을 잊어버릴까봐" 들어서지 않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이 전투가 "사고"에 가깝다는 가장 큰 증거로, 심지어 승리한 에센조차 무엇을 해야할지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놀라운 전투는 8월에 일어났지만, 그들이 북경까지 이른것은 10월이 되어서였습니다. 그동안 북경에서는 수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고대의 국가라는것은 곧 왕조, 왕을 포함한 지도부가 잡혔다는것은 나라의 멸망을 뜻하는 수준이었기에 명나라에서는 대혼란이 벌어졌습니다. 심지어 남경으로 도망가자는 소식까지 나왔는데, 이것을 막은것이 병부시랑 우겸이었습니다.
"남쪽으로 도망하여 멸망한 송의 예를 못보았느냐"
"북경은 천리이므로 사수하여야 한다!"
만약 저때 명나라가 진짜 남경으로 이동하고, 에센이 북경을 장악하면 이것은 남송을 재현하는 일이 다름 아닙니다. 우겸의 이런 대처 속에 명나라는 우선 황제를 비워두면 안되기에 정통제의 동생 경태제를 황제로 삼았습니다.
명나라로서는 다행인 일은 저 남쪽에 남경이라는 대도시가 있고, 그곳에 물자등이 풍부하다는것이었는데 우겸은 이 물자들을 북경으로 끌어모으고 우주방어요새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남쪽으로 도망하여 멸망한 송의 예를 못보았느냐"
"북경은 천리이므로 사수하여야 한다!"
만약 저때 명나라가 진짜 남경으로 이동하고, 에센이 북경을 장악하면 이것은 남송을 재현하는 일이 다름 아닙니다. 우겸의 이런 대처 속에 명나라는 우선 황제를 비워두면 안되기에 정통제의 동생 경태제를 황제로 삼았습니다.
명나라로서는 다행인 일은 저 남쪽에 남경이라는 대도시가 있고, 그곳에 물자등이 풍부하다는것이었는데 우겸은 이 물자들을 북경으로 끌어모으고 우주방어요새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우겸의 준비는 역시 엄청난 수준이었습니다. 우겸은 22만의 병력을 북경의 아홉개 성문에 배치했습니다.
덕승문(德勝門) : 병부상서 우겸, 무청백 석향(石享), 부총병 범광(范廣), 무흥(武興) 등
안정문(安定門) : 도독 도근(陶瑾)
동직문(同直門) : 광녕백 유안(劉安)
조양문(朝陽門) : 무진백 주영(朱瑛)
서직문(西直門) : 도독 유취(劉聚)
부성문(阜成門) : 진원후 고흥조(顧興祖)
정양문(正陽門) : 도지휘 이단(李端)
숭문문(崇文門) : 도독 유득신(劉得新)
선무문(宣武門) : 도지휘 양절(楊節)
이외에도 남쪽 외성의 역할을 하고 있던 옛 금의 중도성(中都城)의 창의문(彰義門)에는 우첨도어사 왕횡(王竑)이 이끄는 도독 모복수(毛福壽), 고례(高禮)의 군대가 포진하였고, 북경성 안은 도독첨사 왕통(王通), 좌부도어사 양선(楊善), 병료급사중 정신(程信) 등이 배치되었습니다.
이렇게 22만의 대군이 성문 밖으로 나오고, 우겸은 단호하게 성문을 닫아버리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장교가 군대를 버리고 먼저 도망가면 군대가 그 목을 베고 군대가 장교를 버리고 도망가면 뒤따르던 부대가 그 목을 베라!"
그리고 창평백 양홍(楊洪)을 필두로 하여 요동의 총병관, 산동, 산서, 하남, 섬서의 각 순무들에게 원군을 보내 줄 것을 요청하며 만반의 준비를 모두 마쳤습니다.
덕승문(德勝門) : 병부상서 우겸, 무청백 석향(石享), 부총병 범광(范廣), 무흥(武興) 등
안정문(安定門) : 도독 도근(陶瑾)
동직문(同直門) : 광녕백 유안(劉安)
조양문(朝陽門) : 무진백 주영(朱瑛)
서직문(西直門) : 도독 유취(劉聚)
부성문(阜成門) : 진원후 고흥조(顧興祖)
정양문(正陽門) : 도지휘 이단(李端)
숭문문(崇文門) : 도독 유득신(劉得新)
선무문(宣武門) : 도지휘 양절(楊節)
이외에도 남쪽 외성의 역할을 하고 있던 옛 금의 중도성(中都城)의 창의문(彰義門)에는 우첨도어사 왕횡(王竑)이 이끄는 도독 모복수(毛福壽), 고례(高禮)의 군대가 포진하였고, 북경성 안은 도독첨사 왕통(王通), 좌부도어사 양선(楊善), 병료급사중 정신(程信) 등이 배치되었습니다.
이렇게 22만의 대군이 성문 밖으로 나오고, 우겸은 단호하게 성문을 닫아버리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장교가 군대를 버리고 먼저 도망가면 군대가 그 목을 베고 군대가 장교를 버리고 도망가면 뒤따르던 부대가 그 목을 베라!"
그리고 창평백 양홍(楊洪)을 필두로 하여 요동의 총병관, 산동, 산서, 하남, 섬서의 각 순무들에게 원군을 보내 줄 것을 요청하며 만반의 준비를 모두 마쳤습니다.
1449년 10월 11일. 마침내 에센 타이시의 군대가 북경 근처에 도달했습니다. 이 전투 결과로, 몽골을 물리치고 한족의 제국을 건설한 명나라가 다시 몽골에 눌려버리느냐, 아니면 제국으로서 위엄을 유지하느냐가 달려있었습니다.
에센은 우선 창의문을 공격했으나, 왕횡에게 패배해서 오이라트의 선봉대만 수백명이 죽어버리고 맙니다.
여기서 명나라의 화기맛을 본 에센은 12일은 우선 머뭇거리다가, 13일에 화기 사용이 불가능해질 정도로 비바람이 몰아치자 정찰대를 보내었습니다. 그런데 우겸은 한술 더떠 덕승문 쪽으로 포병대를 보내, 빈 집에 배치했습니다. 집 안에 있으니 비바람이 몰아쳐도 화기 사용엔 아무 문제가 없죠. 그리고 에센은 유인합니다.
여기서 명나라의 화기맛을 본 에센은 12일은 우선 머뭇거리다가, 13일에 화기 사용이 불가능해질 정도로 비바람이 몰아치자 정찰대를 보내었습니다. 그런데 우겸은 한술 더떠 덕승문 쪽으로 포병대를 보내, 빈 집에 배치했습니다. 집 안에 있으니 비바람이 몰아쳐도 화기 사용엔 아무 문제가 없죠. 그리고 에센은 유인합니다.
여기에 걸려든 에센은 무려 1만명의 병력을 동원해 공격해오지만……
이 전투에서 오이라트 군의 막대한 피해는 물론, 에센의 동생을 비롯한 지휘관들까지 다수 전사하는 참혹한 피해만 입게 됩니다.
에센은 멘붕에 처하며 이 문 저문을 다 공격해보지만, 가는곳마다 나오는건 무지막지한 포격, 사방에 깔려있는 장애물들, 요소요소에서 스나이핑을 해대는 명나라 군대들. 환관들이 전공 좀 올리겠다고 설치다가 당해 한때 명군에 위기가 찾아오기도 했으나, 아무리 싸워도 이건 답이 없습니다.
북경뿐만 아니라 다른곳에 보냈던 오이라트 군대도 명군의 어마어마한 화기에 발려버렸고, 중국 전 지역에서 수십, 수백만의 지원군이 꾸역꾸역 북경으로 몰려드는 상황. 아 이거 좉되겠다 싶은 에센은 15일 결국 퇴각하였고, 이 기회를 노린 명나라는 마지막으로 화기를 사용하며 신나게 불놀이를 했습니다.
명나라의 저력이란 가공할만한 수준이었고, 에센의 상황은 밥만 먹으려던것이, 생각지도 못하게 고기가 잡히니까 구워먹으려다가 탈난 것 비슷했는데, 포로로 잡은 정통제를 어떻게든 협상의 패로 써보려고 했지만, 명나라의 반응은 단호했습니다.
에센은 멘붕에 처하며 이 문 저문을 다 공격해보지만, 가는곳마다 나오는건 무지막지한 포격, 사방에 깔려있는 장애물들, 요소요소에서 스나이핑을 해대는 명나라 군대들. 환관들이 전공 좀 올리겠다고 설치다가 당해 한때 명군에 위기가 찾아오기도 했으나, 아무리 싸워도 이건 답이 없습니다.
북경뿐만 아니라 다른곳에 보냈던 오이라트 군대도 명군의 어마어마한 화기에 발려버렸고, 중국 전 지역에서 수십, 수백만의 지원군이 꾸역꾸역 북경으로 몰려드는 상황. 아 이거 좉되겠다 싶은 에센은 15일 결국 퇴각하였고, 이 기회를 노린 명나라는 마지막으로 화기를 사용하며 신나게 불놀이를 했습니다.
명나라의 저력이란 가공할만한 수준이었고, 에센의 상황은 밥만 먹으려던것이, 생각지도 못하게 고기가 잡히니까 구워먹으려다가 탈난 것 비슷했는데, 포로로 잡은 정통제를 어떻게든 협상의 패로 써보려고 했지만, 명나라의 반응은 단호했습니다.
"필요 없다."
이미 새로 황제가 있는데, 정통제가 와 봐야 혼란만 가중될 뿐이었습니다. 전전긍긍한 에센은 결국 그냥 아무조건도 없이 정통제를 풀어주게 됩니다.
정통제의 뒤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은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에센의 이야기로 가보자면, 절대적인 영광을 얻은 그는 1453년, 그동안 칭기스칸 가문의 적통만이 주장하던, '칸'의 지위를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것이 재앙이 되어, 군 사령관들의 반란으로 1455년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오이라트의 위대한 '칸'이었던 에센의 죽음 이후, 오이라트는 잠시 오르콘 강으로 물러나, 서북 변방의 위협으로 남았습니다.
이후의 이야기는, 잠시 동안 이야기의 중심에서 벗어나있던 타타르가 기세를 떨치며, 알탄 칸의 시대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굳이 여기서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명나라가 무너지고, 청나라가 들어서고. 이제 다시 오이라트는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오이라트를 계속 언급하면서, 마치 오이라트를 '오이라트' 라는 단일 객체인것마냥 언급하였는데, 실질적으로는 이것도 여러 부족들로 분산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한동안 러시아와 접촉했고, 모스크바에 군사 지원들을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러시아는 차르에게 복속한다면 가능할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하였는데, 이는 이후에도 그들이 자주 되풀이 하는 이야기가 됩니다. 차르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지 않더라도, 다름아닌 그 유명한 부귀의 땅 중국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라도, 러시아인들은 오이라트와 접촉을 계속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분열되어 힘을 쓰지 못하고, 러시아인들과 접촉을 하던 16세기에서 17세기. 1616년 러시아 사절은 이들이 네 부족으로 갈라져 있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들은 각각 이러하였습니다.
달라이 타이지가 이끄는, 데르베트
카라 쿨라가 이끄는, 준가르
바이바가스의, 호쇼트
코 우를루크가 이끄는, 토구트
이 중 가장 강력한 인물은 달라이 타이지였습니다. 하지만 오이라트를 세운 계보의 후손인 호쇼트의 바이바가스가 칸으로 불리웠는데, 그 역시 실제로 독립적인 권한은 별로 없었고 각자는 서로의 부족을 자치적으로 다스렸습니다. 1616년~1617년 동안, 그들은 전체 회의에서 내부 평화에 합의하고, 동족을 공격하는 자들을 돕는 일은 하지 말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1625년이 되었을때, 그들은 대규모 내전에 시달렸습니다. 이는 달라이 타이지와 카라 쿨라가 간신히 막아내었지만, 적들이 쳐들어 올때도 그들은 서로 싸우는 약하디 약한 공동체였던 것입니다. 내부 불만이 지속되자, 토구트의 코 울를루크는 자신의 세력을 이끌고 볼가 강으로 이동해버렸습니다. 25만에 달하는 토구트인들이 사라짐으로서, 오이라트 공동체는 이제 달랑 세부족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러할때, 불교. 즉 티베트 불교가 이곳까지 흘러들어왔습니다. 알탄 칸 이래로 몽골에서 티베트 불교의 영향력은 지대하였지만, 이제 '서몽골' 이라고 불리던 이곳에도 그 영향력이 전해진 것입니다. 바이바가스는 티베트 불교에 귀의하려 하였으나, 주위에서 만류하자 양자인 자야 판디타를 1616년 티베트의 사원에 맡겨놓았습니다.
자야 판디타
그는 22년동안 불교의 심오한 진리를 배웠고, 1635년에 달라이 라마의 즉위식에 참석하였습니다. 판첸 라마는 이 자리에서 그에게 티베트의 불경을 번역하여, 몽골의 자기 민족에게 불교를 가르치라는 임무를 내렸습니다. 이후 그는 거의 일생을 매년, 오이라트와 '동몽골'을 가리지 않고 떠다니며 장례나 혼례를 집전하고, 사원을 세우고, 설교하고, 수행에 정진하고, 티베트 불경을 번역하는데 힘써 177권의 불경을 몽골어로 번역했습니다.
자야 판디타가 들려준 티베트 불교의 거대한 가르침에 감화된, 세상에서 가장 거친 사나이들인 이 몽골의 칸들은 모두 감동에 빠져 엄청난 문하생과 소, 말등을 자야 판디타에게 기꺼이 주었고, 이제 그는 몽골의 초원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지닌 방랑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오이라트의 싸움이 벌어지자 핵심 중재인으로 활약했고, 여러 분파들이 대립할때도 화해시키는데 큰 힘을 내었습니다. 그는 1662년에 사망했는데, 문하생들은 그의 유해를 라싸로 모셨고, 홍모파와 황모파 양측 승려 모두가 그를 축북했습니다.
그는 여행과 설법으로 긴 거리에 떨어져 있는 여러 몽골의 칸들을 서로 연결시켰고, 서몽골에서 티베트 불교의 위치를 매우 끌어올렸습니다. 그가 몽골족이 싸우는 것을 모두 막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 사이의 유대감을 만들고, 이를 강조하는데는 성공했습니다.
혹자는 몽골족이 티베트 불교로 인해, 그들의 강인함을 잊어버렸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야성을 말라가게 했고, 생명력을 고갈시키고, 목축에서 벗어나게 하여 사원에 있게 하여, 결과적으로 그들의 힘을 앗아갔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에게 믿음을 받는 가장 위대한 종교들이 ─ 죽은 사람을 살린다거나, 앉은뱅이를 일으킨다는 실제적인 기적을 과학적으로 보일 수 없다는데 대해서, 사이비 종교들과 다를 바가 없음에도 ─ 소위 말하는 사이비 종교와 구별화되는 요소라면, 바로 그들이 말하는 가르침의 요소 중에, 분명히 '인류 보편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소수의 믿음, '사이비' 로 출발한 그들은, 그 수많은 사람들 속에 들어맞는 가르침을 내림으로서, 결과적으로 지구상 전체 인구의 비율로 따져도 어마어마한 숫자의 신도를 유지할 수 있고, 그렇다면 이것은 그들 모두가 공감할법한 인류 보편적인 요소가 있다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소위 말하는, 사이비나 다른 종교나 다를게 뭐냐는 이야기에서, 만약 그 사이비 종교가 결과적으로 수천, 수억명의 믿음을 만들게 되면 결국 그 종교도 인류 보편적인 요소가 있을 테니, 사이비를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 다수의 사이비 종교는 그럴 수 있을만한 가르침을 가지지 못하기에, 사이비로 남을 것입니다.
종교에 대한 장황한 견해를 이렇게까지 길게 말한것은, 소위 말하는 그 '보편적인 요소' 가 몽골인들에게 끼친 긍정적인 부분 때문입니다. 자야 판디타는 초원의 칸들에게, 일시적인 군사적 우위, 그리고 케케묵은 칭기스칸의 후예라는 주장을 넘어선, 그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게 그들을 엮어주는 유대감의 대상이자, 무엇보다 자신들의 권위를 정당화 시킬 가장 강력한 요소를 선사했습니다. 거칠고 야만적인 초원의 힘, 그리고 함부로 손을 댄다면, 그 안으로 빨려들어갈 중화의 거대한 소용돌이. 그 무엇에도 섞이지 않은 보살의 말씀 하나가, 이제 이들에게 그 무엇과 다른, 독자적인 '무엇인가'를 안겨 주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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