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문종이야기(3) 3만명의 여진 정벌군

 [이제현(李齊賢)] 고려의 명신이자 국사(國史)를 집필해, 훗날 고려사가 집필될때 국사에 기록해둔 각종 임금에 대한 평이

강제로(?) 넣어지게 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는데요.

 

이제현이 가장 극찬한 임금중 두손가락 안에 드는 임금이 바로 문종입니다.

이제현은 문종의 시대를 한마디로 <태평성대>라고 규정하였습니다.

 

이런 태평성대의 문종조에도 대규모 원정군을 꾸린일이 있어서 소개해 드립니다.

 

 

 

[번적(蕃賊)] 흔히 말하는 여진족을 뜻하지요.

당시 여진족은 마을단위의 추장들이 각각 다스리고 있었는데

고려에서는 크게 동여진, 서여진으로 나누고 동북면/서북면 병마사로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고려에 대한 침입은 주로 동번이 많이 했으며, 해로를 통한 침입도 있었지요. 물론 서번도 틈틈히 쳐들어 왔구요.

 

여진족 마을의 규모에 대해서는 문종27년(1073년) 귀부한 동번의 3고을에서 가름해 볼수 있겠습니다.

1073년 6월에 삼산(三山), 대란(大蘭), 지즐(支櫛)의 3고을에서 귀부한 호수가 1천 2백 38호입니다.

(잘못된 내용이어서 수정합니다.

고려사절요는 정확하게 나와 있질 않았는데, 고려사세가에는 9촌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6월에 군현설치를 요청한 부락이 삼산촌등 9개 부락이 1238호, 대제촌등 12개 부락이 1970호이고

 합산하면 1부락당 평균 153호정도 됩니다.)


전달인 5월에는 고려의 평로진(平虜鎭) 근처의 서번마을이 귀부를 청해왔는데

이때 호수가 35호이고, 인구 2백 52명 이였습니다.

이로써 대략적으로 여진족 마을의 호수와 인구수를 유추할수 있는데 1호당 7.2명이 되겠습니다.

 

이를 동번 3고을에 적용해 보면 3고을의 호수가 1238호이니, 인구는 8900여명이 되네요.

즉 추장 1인이 다스리는 1마을의 호수는 약 400호쯤이고, 인구는 3천명 정도로 추산할수 있겠습니다.

이를 동원병력으로 짐작해 보자면 1호당 장정이 1~2인이 가능하다면, 한마을당 400~800여명이 되겠습니다.

 

실제로 문종조에 침입한 여진족의 병력규모는 적게는 40 여명에서 많게는 200 여명까지 입니다.

 

반면에 북방에 설치된 고려의 각종 진의 병력은... 고려사 병지를 참고하여 추후에 다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간략히 살펴본바로는 서북면에 11진, 동북면에7진하여 총18진이고 정규군으로 추정되는 행군은

서북면은 각진마다 800여명이고, 동북면은 행군은 없고 현지동원만으로 충당되는듯 싶습니다.

조만간 따로 글을 올리지요.

 

 

여하튼, 여진족의 1마을과 고려진의 규모를 대충 살펴보았는데요,

어찌하여 문종이 3만명의 여진정벌군을 편성했는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문종원년부터 계속된 여진의 잦은 침략은 거의 매년 되풀이 되었는데요, 주로 가을 7월~12월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여진은 침략만 한것이 아니라, 매년 20~60명 단위로 추장들이 고려에 들어와 토산물(주로 말)을 바치고

**장군이라는 직위를 하나씩 챙겨받았는데요,

고려 조정에서는 아예 이 일행들이 2주이상 개경에 머물지 못하도록 법제화까지 시킬정도로

여진 추장들의 방문(?)은 빈번하게 이어집니다.

 

고려에서는 군수물자를 북으로 계속 보충했는데, 군량은 1년에 6번 예성강에서 1백척의 배로 날랐으며

한번은 수노전(手弩箭)과 거노전(車弩箭) 즉 화살을 9만개나 서북면에 보내기도 하는등

북방에 대한 방비를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여진 각부족에 대한 회유와 견제가 적절히 통했는지 드디어 1073년 4월에는 문종이 친히 말씀하시길

 

동북 변방 15주(1마을당 1주로 정합니다)가 스스로 귀화하여 군현을 설치해주길 원하니 이것은 종묘사직의 덕분이다.

종묘사직에 사례하는 예식을 거행하겠다 고 기뻐하지요.

 

실제로 이달에 서북면 병마사는 장성밖에 밭 11494결을 새로히 개간하였다고 보고도 올리지요.

또 이해 9월에는 고려조정에서는 아예 귀순주(歸順州)라는 통합주를 만들어 복속된 11마을을 귀순주에 예속시키기도 합니다.

 

고려사절요 문종 27년(1073년) 9월 기사中

○ 9월에 한림원이 아뢰기를, “복속된 동여진의 대란(大蘭) 등 11촌을 빈(濱)ㆍ리(利)ㆍ복(福)ㆍ항(恒)ㆍ서(舒)ㆍ습(濕)ㆍ민(閩)ㆍ대(戴)ㆍ경(敬)ㆍ부(付)ㆍ완(宛) 11주로 만들어서 각각 주기를 내려주고, 이어 귀순주(歸順州)에 예속시키소서." 하니, 따랐다.

 

즉 여진땅의 고려화가 진행되기 시작한 것이지요.

이후 4년간은 정말 고려사에 여진족의 침입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1078년 가을부터 슬슬 여진족의 소규모의 침략이 진행되기 시작합니다.

결국 1080년 12월 동번이 대규모 난을 일으키게 됩니다.

사실 이해 9월에 이미 문종은 갑작스레 서경을 행차한것으로 미루워

이해 겨울에 여진족을 혼내주겠다고 결심한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서경의 병력은 문종원년(1047년) 기록을 보면 맹해군 10령, 총 1만명에 선봉군은 3천명입니다.

 

고려사절요 문종34년(1080년) 12월 기사中 

○ 동번이 난을 일으키자 중서시랑 평장사 문정을 판행영병마사로, 동지중추원사 최석(崔奭)과 병부상서 염한(廉漢)을 병마사로, 좌승선(左承宣) 이의(李顗)를 병마부사로 삼아서 보군과 기병 3만 명을 거느리고 나가서 정주(定州)에 주둔하게 하였다. 밤에 삼군이 각기 1만 명씩 거느리고 길을 갈라서 바로 적의 소굴로 향하였는데, 날이 샐 녘에 갑자기 당도하여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땅을 울리니 적이 크게 두려워하였다. 드디어 군사를 휘몰아 공격하여 3백 92급을 베고 그 우두머리 39명을 사로잡았으며, 소ㆍ말 백여 필을 노획하였고 적이 버린 군기(軍器)가 길을 메웠으며, 적의 막사와 부락을 파괴한 것이 십여 곳이었다. 해질 무렵에 개선하여 전승하였음을 아뢰니, 왕이 좌사원외랑(左司員外郞) 배위(裵偉)를 보내서 문정 등에게 내린 칙서에, “근래에 변방에 일이 그치지 않아 밤낮으로 걱정하였는데, 이제 아뢴 바를 살피건대 훌륭한 계책으로 오랑캐에게 항복을 받아 백성의 해를 소탕하여 짐에게 동쪽을 염려하는 근심이 없게 함은 오직 그대들의 공이다." 하고, 특히 문정에게는 무게가 백 냥 되는 은합 한 벌을, 최석ㆍ염한ㆍ이이에게는 무게 50냥 되는 은합 한 벌씩을 모두 정향(丁香)을 담아서 내려주었다.


 

3군편성에 병력은 3만, 쳐들어간곳은 동번 여진의 십여부락, 목을 벤수가 392급, 적추장급 생포수가 39명

 

동번이 난을 일으켰다면 즉 여러부족이 연합했다는 것인데, 연합이 거의 없이 단독행동을 하는 여진부족의 특성상

1073년 15마을의 고려귀부와 국경개간이 여진을 자극했다고 보여지네요.

여진의 병력은 연합에 참가한 부족이 10여부락이라면, 위의 계산대로 대략적으로 짐작하면

4000~8000명이 최대 동원가능한 병력이였다고 보여지네요.

이보다 적다면 굳이 3만명까지 동원할 필요성은 없었던듯 보입니다.

 

문종은 기분이 정말 좋아지셨는지 다시 다음해 2월에 태조 왕건의 묘등에 인사를 들이기로 결정합니다.

 

고려사절요 문종35년(1081년) 2월 기사中

○ 제하기를, “지난해 겨울에 동북로 오랑캐를 하루아침에 쓸어 없애서 변경이 맑아졌는데, 이것은 모두 위로는 종묘의 위령에 힘입고, 아래로는 여러 장수의 웅략에 의한 것이다. 이제 이미 개선하였으므로 태묘와 6능에 고유해야 마땅하니, 날을 가려서 행사해야 하겠다." 하였다.


 

또 앞으로는 여진추장이 고려에 들어올때는 먼저 병마사에 1차 보고하고, 국왕의 허락이 있어야 알현할수 있다는 자신감도 내비칩니다.

 

고려사절요 문종35년(1081년) 2월 기사中 

○ 2월에 서여진 추장 차단(遮亶) 등 6명이 와서 철갑과 병기를 바치니, 의대와 비단을 차등 있게 내려주었다. 제하기를, “무릇 동서 추장으로서 와서 뵙고자 하는 자는 병마사가 보고하여 성지를 받은 뒤에야 바로 대궐에 나아오도록 허락하고, 그것을 영구한 제도로 삼으라." 하였다.


 

이후 10여년간 여진족의 침입은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문종조가 태평성대인만큼 큰 사건은 없었지만, 여러 재미있는 글감이 있더군요.

조금씩 연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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