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검의 최후에 관한 여러가지 기록들이 있어 소개해 드립니다.
우선 정사인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는 후백제왕 신검이 고려태조 왕건에게 항복한후
사형을 면하고 관작을 받았다고 나와 있습니다.
반면에 두 형제 양검과 용검은 진주(眞州/평북 정주)에 끌려간후 처형당했다고 나옵니다.
그리고 이후 행적에 대해서는 일체 기록이 없지요.
고려사 936년 9월 기사中
936년 9월 신검이 왕위를 찬탈한 것은 협박에 의한 것으로 죄가 두 아우보다는 가볍고 또한 항복해 왔기 때문에 특별히 사형을 면하고 관작을 내려주었다.
고려사절요 936년 9월 기사中
신검이 참람되이 왕위에 오른 일은 남에게 협박을 당하여 한 것이요, 그의 본심이 아니었으며 또 귀순하여 죄를 애걸하므로 특별히 그를 용서하였다. 그런데 견훤은 이것을 분하게 여겨 번민하다가 등창이 나서 수일 만에 황산(黃山)의 절에서 졸하였다. 왕이 후백제의 도성에 들어가 영을 내리기를, “괴수가 이미 귀순했으니 나의 적자(赤子 백성)에게는 침범하지 말라." 하였다. 장수들을 위로하고 재능을 헤아려 임용하였으며, 군령이 엄하고 분명하여 추호도 범하지 않았으므로, 주ㆍ현이 편안하여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신검에게는 작(爵)을 내려 주고, 양검과 용검은 진주(眞州)에 귀양보냈다가 얼마 뒤에 죽였다.
동사강목 936년 9월 기사中
신검이 참람되이 왕위에 오른 것은 다른 사람의 협박 탓이어서 죄가 두 아우보다 가볍고 또 귀순(歸順)한 공이 있다 하여, 조서로 특별히 죽음을 면해 주고 벼슬을 내렸다. 이에 진훤은 울분과 번민으로 종기가 난 지 며칠 만에 황산(黃山)지금의 연산 동쪽 5리에 있다 의 절에서 졸(卒)하니, 나이 70이었다. 진훤의 묘는 지금의 은진현(恩津縣) 남쪽 12리 풍계촌(風界村)에 있는데 세상에서 왕묘(王墓)라고 부른다
(중략)
유씨(兪氏)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신검은 아비를 가두고 스스로 왕이 되었으니, 그 죄는 주륙(誅戮)을 면하지 못할 것인데, 고려 태조는 그 죄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관작까지 주었다. 아, 반역은 천하의 가장 악한 것이니, 구적(仇敵)으로 간주하여 그 율(律)을 가볍게 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귀순하였다 하여 용서한다면 이것은 송나라의 유소(劉邵)와 수나라의 양광(楊廣)도 또한 살 수 있는 길이 있게 되는 것이니, 천하에 어찌 그럴 이치가 있겠는가? 아니면 고려 태조가 남쪽을 정벌한 것은 그 토지를 욕심낸 것인가, 반역을 토벌하려 해서인가? 오직 반역을 토벌하였으므로 한번 싸워서 백제 수천 리의 봉강(封疆)을 항복시킨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고려 태조의 위덕(威德)일지라도 응당 이와 같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미 그 땅을 얻고 나서 그 원흉(元兇)을 사(赦/용서)하였으니, 인의(仁義)로 시작하고 이익으로 끝낸 것이라 어찌 심히 애석하지 않는가?”
“신검은 아비를 가두고 스스로 왕이 되었으니, 그 죄는 주륙(誅戮)을 면하지 못할 것인데, 고려 태조는 그 죄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관작까지 주었다. 아, 반역은 천하의 가장 악한 것이니, 구적(仇敵)으로 간주하여 그 율(律)을 가볍게 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귀순하였다 하여 용서한다면 이것은 송나라의 유소(劉邵)와 수나라의 양광(楊廣)도 또한 살 수 있는 길이 있게 되는 것이니, 천하에 어찌 그럴 이치가 있겠는가? 아니면 고려 태조가 남쪽을 정벌한 것은 그 토지를 욕심낸 것인가, 반역을 토벌하려 해서인가? 오직 반역을 토벌하였으므로 한번 싸워서 백제 수천 리의 봉강(封疆)을 항복시킨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고려 태조의 위덕(威德)일지라도 응당 이와 같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미 그 땅을 얻고 나서 그 원흉(元兇)을 사(赦/용서)하였으니, 인의(仁義)로 시작하고 이익으로 끝낸 것이라 어찌 심히 애석하지 않는가?”
하지만 신검의 최후를 짐작해 볼수 있는 여러 기사가 있어 같이 소개해 드립니다.
삼국사기 견훤 열전中
신검은, 왕위의 찬탈이 타인의 협박에 의한 것으로서 자기 본심이 아니었으며, 또한 나라를 바치고 자기의 죄과를 사죄했다 하여 특별히 사형을 면하였다.[혹은 삼형제가 모두 처형당하였다고도 한다.] 견 훤은 근심과 고뇌로 말미암아 등창이 나서 수일 만에 황산의 불사에서 생애를 마쳤다.
<太祖>受降, 除<能奐>, 餘皆慰勞之, 許令與妻孥上京. 問<能奐>曰: “始與<良劒>等密謀, 囚大王立其子者, 汝之謀也. 爲臣之義當如是乎?” <能奐>俛首不能言, 遂命誅之. 以<神劒>僭位爲人所脅, 非其本心, 又且歸命乞罪, 特原其死.[一云三兄弟, 皆伏誅.]
신증동국여지승람 中
태조가 크게 기뻐하여 그 사자(使者)에게 후히 물건을 주어 돌려보냈다. 그 뒤에 신검을 베자 태조는 영규에게 이르기를, “임금이 이미 나라를 잃었는데 경의 내외가 홀로 그 아비에게 정성을 다하고 겸하여 아름다운 공을 내게로 돌려보냈으니, 그 의리를 잊을 수 없도다.” 하고, 인하여 좌승(左丞) 벼슬을 주고 그의 두 아들도 벼슬을 시켰다.
이중 삼국사기는 일리천전투후 200여년이 흐른뒤 만들어진 기록으로, <신검이 처형당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식으로 기록해 두었습니다. 즉 당시만 하더라도 신검의 후손이 아예 없었거나, 영향력이 극히 미비하였다고 볼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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