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신(水神) 정성공(2) ─ 저항의 시작

 일본 사이트에서 본 정성공의 그림. 정성공은 (최소한 이름을 알고 있다면) 일본에서도 우호적으로 보는 인물입니다. 물론 어머니가 일본인이기 때문이죠. 지카마쓰 몬자에몬(近松門左衛門)의 국성야합전(國性爺合戰)은 1715년 초연되었는데, 중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주인공 와토나이(和藤内)가 중국에 건너가, 명나라를 점령한 달단국(韃靼國)를 물리친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와토나이의 모델이 정성공 임은 두 말할 나위도 없을 것입니다. 이 작품은 3년에 걸쳐 무려 17개월 동안 연속으로 상영되며 공전의 히트를 쳤고, 지카마쓰 몬자에몬과 쌍벽을 겨루던 조루리 작가 기노 가이온(紀海音) 역시 게이세이고쿠센야(傾城国性爺)를 집필(1717년) 하기에 이릅니다. 정성공의 상징과도 같은 국성야의 일본 발음이 고쿠센야 입니다. 즉 국성야합전은 고쿠센야갓센이라는 발음이 됩니다.






정성공의 아버지, 정지룡은 아들을 적법한 후계자이자 지체 높은 가문을 만들 인물로 키우기 위해, 자신은 거부했던 학업을 이 아들은 반드시 이수하도록 할 작정이었습니다. 다행이 아들은 자신과 같은 반동기질은 적었습니다. 정성공은 남경으로가서 학업에 매진하게 됩니다. 그 시기의 가장 주도적인 학문이라면 물론 물론 유학의 경전이었습니다.



정성공의 스승은 전겸익으로, 남명 정권을 다룬 글에서 언급을 했듯이, 애첩과 물에 빠져 자살하려다가 "물이 차가울 것 같다." 는 이유로 그만두고, 만주족에 항복했던 인물입니다. 이 시점에서의 전겸익은 뛰어난 학실을 지닌 인물로 명성을 떨쳤고, 북경의 명나라 조정에서 고위 관직을 역임했지만 부패한 조정 대신들에게 온갖 공격을 받고 감옥에 들어갔다 나오기도 하는등 골치를 썩고 있었습니다. 이런 인물에게 정지룡은 먼저 접근해서 자신의 범상치 않은 아들의 스승이 되주기를 원했고, 전겸익은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나중에 이르면 만주족에 항복하게 되는 전겸익이지만 이 시점의 그는 부패한 무리와 어울리느니 차라리 궁벽하게 사는 편을 택하는 의지를 보여준 인물이었습니다. 정성공은 대단히 열성적이고 부지런한 학생이었으며 남는 시간에는 승마나 무술을 익혔습니다. 이 시기의 그는 유생의 옷을 입고 다녔는데, 배울만큼 배우자 학당을 나가 국자감에 들어갔습니다. 어찌되었건 그에게는 출세하라는 아버지의 바램을 이루어질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한편, 17살의 정성공은 이 무렵 결혼을 하게 됩니다. 부유한 동씨 가문의 딸 Cuiying(최영崔颖인지 최영崔莹인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이름일수도 있고. 일단 취잉이라고 하겠습니다.)이라는 여인이었고, 이를 준비한것은 정지룡이었습니다. 정성공은 결혼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아버지를 기쁘게 할 요량으로 결혼에는 동의했습니다.



취잉은 정지룡보다 한살이 더 많았습니다. 즉 일반적인 기준이라면 혼기를 조금 넘긴 나이었는데, 그녀의 성격도 문제가 좀 있었습니다. 옷이나 장신구 등에 신경을 많이 썻고 부유하게 자라서 버릇이 없던 말괄량이였던 것입니다. 정성공하고는 완전히 반대의 성향이었습니다.


정성공은 말광량이 부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살다 보면 우리도 서로 사랑하게 되겠지요."



둘 과의 관계가 그다지 좋아보이지는 않지만, 여하간에 부부의 의무는 충실히 이행했고 아직 40세도 안되는 정지룡은 손자를 보게 됩니다. 바로 이 아들이 정경(鄭經)이고, 어린 시절의 아명은 금사(錦舍) 였습니다. 이렇게 조용히 정지룡의 후계자가 되기 위하여 정성공이 시간을 보낼 무렵, 만주족이 중원을 진동시키게 됩니다. 명나라가 무너졌고, 이자성이 무너졌으며, 남명 정권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정성공의 학업은 중단되었고, 정지룡이 전면에 나서게 됩니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남명 정권 이야기를 하면서 언급을 했으니 참조하면 되실듯 합니다.결과적으로 정지룡은 배반을 했고, 정성공의 어머니 다가와는 죽었으며, 남명 정권도 무너졌습니다. 정성공은 청 왕조에 저항하기로 했습니다.


이에 대한 사족을 덧붙이자면 융무제와 정성공의 관계입니다. 이때 21살의 정성공은 책을 매우 가까이 하고 있었고 이에 융무제는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융무제는 정성공을 자기 사위로 삼고 싶으나 딸 자식이 없는것을 한탄하면서, 성공이라는 이름을 내리게 됩니다. 문제 그대로 뜻을 이룬다는 소리고, 바로 이때부터 정성공은 정성공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전까지는 주로 자였던 대목 등으로 많이 불렸습니다.

또한 융무제는 정성공에게 명 황실의 성인 주씨를 써도 좋다는 윤허를 내렸습니다. 사실상 명 황실에서 정성공을 양자로 받아들이겠다는 이야기였고, 정성공은 그 후로도 정씨 성을 계속 쓰긴 했지만 "황실의 성을 쓰는자" 라고 불리며 국성야라고 존칭되었습니다. 또한 어영중군도독(御營中軍都督)·초토대장군(招討大將軍)에 임명되었고 충효백(忠孝伯)에 봉해졌습니다.

융무제의 이러한 태도는 정성공에게 호의를 보여 정지룡의 지원을 이끌어보려는데 있었겠지만 정지룡은 전혀 도움이 되는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비협조적인 정지룡의 태도에 융무제가 고통스러워할떄, 정성공은 효를 지켜야 하는 입장과 충을 지켜야 하는 애매한 위치 속에서 이를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그는 융무제에게 말했습니다.


"어찌 폐하의 용안에 수심이 가득하십니까? 제 아비가 폐하를 향한 마음을 돌렸다고 여기시기 때문이옵니까? 미천하나마 소신이 목숨을 바쳐 폐하를 보필하겠나이다."




코에이 사의 삼국지 시리즈에 나온 정성공



정지룡은 결국 사기꾼으로 판명이 났고, 정성공은 저항 운동을 하기로 했는데, 중요한것은 다른 정씨 일족들의 지원이었습니다. 분명하게 알아야 할것은 정성공이 정씨 가문을 좌지우지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정성공보다 나이도, 경험도 많은 숙부나 친척들이 정지룡의 대에서부터 일을 하고 있었고 그들 모두 나름대로의 입지가 있었습니다. 정성공은 그들에게 '명령' 을 내릴 입장은 못되었고, '협조' 를 구하여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정성공은 정지봉의 아들이자 사촌인 정채, 정련등과 합류했고 또한 정지룡 때부터 이어지고 있던 가문의 무역 활동도 계속 이어나갔습니다. 비단을 잔뜩 실어 류쿠 열도를 경유해 일본에 보넀는데,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봉건 영주들에게도 지원을 요청하고, 마침내는 극단적인 기치까지 내세우게 됩니다. 지금까지 어떤 저항가도 내세우지 못했을 캐치프레이즈였습니다.



"애비를 죽이고(殺父), 나라에 보답하리라(保國)."



워낙 무지막지한 말이기에 진순신은 "구부(求父)가 잘못 전해진것 아니냐" 라는 입장을 보이기도 하고, 청에서 조작을 했다는 소리도 있습니다. 어찌되었건 정성공이 나라에 보답하고 싶다면, 충성을 바칠만한 대상이 필요했습니다.


광저우(廣州)까지 달아난 융무제의 동생이 황위에 오르게 되는데, 이 사람이 소무제(紹武帝) 였습니다. 그런데 소무제가 등극하고 난 뒤 몇일 뒤, 불과 몇 킬로미터 떨어진 광저우 부근에서 만력제의 손자이자 22살이었던 영력제(永曆帝)가 즉위했습니다. 융무제는 짦긴 했지만 명 왕조의 적통을 이어받았고, 영력제는 북경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의 가장 가까운 혈통 중 한명이었습니다. 나름대로 둘 다 정통성이 있다보니 어느쪽이 적법한지 혼란이 일게 됩니다.



여러곳에서 보고가 들어왔고 그 이야기에 따르면 만주족은 겨울 동안 움직이지 않을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에 소무제와 영력제는 마음 놓고 서로 싸우면서 시간을 낭비했습니다. 소무제는 해적 세력을 협조자로 거느렸는데, 숫자가 많아 영력제를 물리치고 그를 굴복 직전의 상황까지 몰아넣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낯선 기병 수백명이 등장하게 됩니다. 처음에 광저우의 사람들은 이들이 남명 정권을 지원하려고 온 비적일 것이라 여겼지만, 경비병들을 공격하는 그들을 보고 경악하게 됩니다.



그들은 만주족의 기병대였습니다. 만주족 병사들은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성문은 우리가 지키고 있으니 꼼짝 말아라. 얌전하게만 있는다면 두려워할 일은 없을 것이다."



만주족은 단 한번도 진격을 멈춘 적이 없었습니다. 만주족이 겨울을 나고 있다는 보고는 전부 거짓으로, 남명 조정의 각종 문서와 인장을 손에 넣은 청나라 측이 날조를 해서 정보에 혼선이 일게 했던 것입니다. 백성들은 놀라 도망쳤고, 도성의 수비대는 도망을 치는 한편 기마병들은 저항 세력을 색출했습니다. 혼란의 와중에 만주족 병사 4명이 붙잡혀서 소무제 앞에 끌려왔습니다. 이 황제의 옆에 있는 사람들이라곤 환관과 후궁 몇 명밖에 없었습니다.


"저 자들이 나보다는 빨리 죽어야지! 처형하라!"


4명의 만주족 병사들은 처형 당했습니다. 이게 청군이 광저우를 점령하는데 입은 피해의 전부였다고 합니다. 날이 저물 무렵 다른 청나라 병사들이 황궁에 도착하자, 그들의 눈에 비친것은 황실 일가의 사람들이 죽어서 널부러진 모습과, 자살한 소무제가 황상에 구부정한 자세로 앉아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처음 들은 영력제는 당초에는 소무제의 기만채깅라고 여겼으나, 실상을 알게 되자 서쪽으로 멀리 피하게 됩니다. 어찌되었건 남은것은 영력제 뿐이었고, 정성공은 영력제에 대한 충성을 대외에 공표했습니다. 하지만 남중국해의 바다에 있는 정씨 세력과, 내륙 서부로 깊숙이 도주중인 영력제 집단과의 의사소통은 매우 드물게, 그리고 아주 위험천만하게 이루어질 뿐이었습니다.



정성공은 군사행동을 취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비록 그 공격은 산발적인 수준에 그쳤지만, 함대전 따위에 대한 지식은 전무한 청나라는 정성공을 통제하지 못했습니다. 그보다도 더 큰 문제는 연해의 한족들이 정성공에게 도움을 준다는 것입니다. 사실상 정성공은 남중국해의 모든 운송과 교류를 통제하고 있었기에, 만일 정씨 일족에게 미움을 받는다면 그 사람은 뱃사람 노릇하기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정씨 가문을 도우면 만주족에게 명 황실을 돕는 범죄자로 여겨지고, 만주족을 지지한다면 바다에 나갈시 정씨 일족의 함대와 만나면 죽은 목숨이 되기에 연해 지역의 사람들은 엄청난 긴장감 속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참지 못하고 아예 혼란스러운 중국을 영원히 떠나 동남아시아나 필리핀, 대만 등지에 정착하기 위해 배를 타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때 그들이 타던 배도 물론 정씨 가문의 배로, 적법한 뱃삯을 내고 탑승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불안불안한건 정성공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다에선 무적이라고 하지만, 바다에서 싸우기 위해서는 육지에서의 보급이 필요했습니다. 해적질 수준이면 모르되 청나라를 공격하기에는 병력, 물자 모두가 부족했습니다. 내륙을 급습하기도 했지만 점령지를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그럴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성공은 지속적인 거점을 만드는데 골몰했습니다.



하문 근처에 있는 동안(同安)이라는 곳이 목표가 되었습니다. 청나라 군대는 정성공의 습격을 예상하고 바다에 대하여 철통같은 태세를 취했지만, 이미 정씨 가문의 첩자들이 떠돌이 승려, 거지 등으로 위장하고 작전 시간을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마침내 정씨 가문의 함대가 화공선을 앞세우며 나타나자, 이 첩자들도 초병들을 죽이며 성문을 열어 작전을 완벽하게 수행했습니다. 정성공은 이 승리를 영력제에게 보고 했고, 영력제는 정성공을 위원후(威遠侯)에 봉했습니다.



황제와 연락이 통한다는것은 정성공이 자유의사를 포기하고 황제의 지시를 따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성공은 물론 황제의 지시가 내려올 경우 시행하려 애를 쓰기는 했지만, 어떠한 경우는 아예 모르는 척 하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정지룡으로부터 내려왔던 조직은 정성공의 손 안에서 개편되고 있었습니다. 이 와중에 정지룡의 동료이자 최고참 급이며 그 시대 최고의 수군제독이었던 시랑이 정성공을 변절하는 일이 생깁니다. 이에 관해서는 다른 글에서 언급한 적 있으니 넘어가겠습니다. 이 무렵 정성공은 광저우라는 대도시를 공략하는 일에 골몰하고 있었지만, 만주족은 반대로 정성공의 본거지인 하문을 급습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하문을 지키던 정씨 일족의 일원 정지완은 도성을 비운 후 될수 있는 모든 주민을을 여러 섬의 정씨 근거지로 실어날랐지만 남은 재물은 고스란히 청나라 병사들의 약탈 거리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정성공이 제법 민감한 성격인게 여기서 처음 보이는데, 이때 입은 피해 ─ 전사한 병력, 겁탈당한 부녀자들, 약탈당한 수백만 냥의 금은보화 ─ 액수를 정성공은 몇년이 지나도 가끔씩 생각날때마다 뇌까릴 정도였습니다.




정지봉은 이들을 물리쳐서 구석으로 몰아넣어 포위했지만, 만주족 병사들은 위기에 처하자 정지룡을 들먹여댔습니다. 정지룡이 '손님' 으로서 북경에 머물러 있는데, 어떤 불상사가 이루어질지 모르는 일 아니냐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정지봉은 그들이 무사히 빠져나가도록 허락합니다.


결국 이 일등이 겹쳐 정성공은 광저우 공략에서 손을 때고 하문으로 돌아가 분노한 채로 가장 큰 책임자인 정지완을 참수했습니다. 정지완은 만주족의 공격을 막지 못했을 뿐 아니라 광저우를 공략하고 있던 정성공에 대한 지원도 소홀했다는 것입니다. 정지봉은 파직되었습니다.



다른 이야기로, 하문이 공격 당할시 정씨 가문의 병사들은 정성공의 저택으로 파견되어 부인들과 자녀들의 피난 준비를 도왔습니다. 이때, 정성공의 정실 부인인 취잉은 갑자기 발길을 돌려, 불이 붙고 있는 집으로 달려가 위험을 무릎쓰고 가문의 사당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나무 명패를 하나 뽑아서 가지고 나왔습니다.



정성공의 모친, 다가와의 명패였습니다.




"살다 보면 우리도 서로 사랑하게 되겠지요." 라고 말했던 정성공은, 그 후로 집안의 대소사에 대해서는 꼭 취잉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취잉은 그 후로 정성공의 가장 가까운 동료이자 친구로서 정성공이 집안과 군사에 관해 내린 결단등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광저우에서는 손을 때긴 했지만 정성공은 그 후로도 내륙으로 군사를 파견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명예와 의무를 어느정도는 집착 수준으로 보일만큼 중요시했는데, 하루는 만주족 장수의 노비가 그 주인을 살해하고 정성공의 진영으로 도망쳐 왔습니다. 정성공은 우선 그 노비에게 큰 상과 부를 내리긴 했는데, 얼마 후에 그를 참수해버리고 맙니다.





겉으로만 보면, 이 일은 정성과 청나라의 대립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 뒤에 있는 존재들, 즉 네덜란드 VOC는 정성공의 싸움에 비상한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이미 그 아비 정지룡때부터 복잡하게 얽혔던 사이가 그들이었습니다. 현재 그들은 정씨 조직에 세금과 사용료를 내고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정성공의 싸움은 실패 할 수 밖에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바타비아에 있는 VOC 본사의 이사회는 대만 총독에게 이런 서한을 보내며 주의를 당부했습니다.




─ 우리는 타타르인들에게 수차례 패배한……고위 관리 정성공에 대한 불안감을 아직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가 궁극적으로 하문을 떠나 부하들을 데리고 보다 안전한 곳으로 이주할 수 밖에 없게 될 텐데, 십중팔구 대만이 그 목적지가 될 것입니다. 그곳의 비옥한 토양과 기타 여러 양호한 조건들에 대해서는 그도 우리 못지 않게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성공은 부하들의 호감을 사지 못하고 있습니다. 군율이 엄격한데다 부하들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단도 별로 없어 부하들의 이탈이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자가 마침내 본국을 떠나야만 하는 상황을 맞게 되었을 때에는 그 자의 휘하에 남아 있는 부하도 얼마 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거의 운명론적 예언에 가까운 이 서한은 상당한 통찰력이 있었지만, 정작 '그 날' 이 올때 VOC는 전혀 이때의 혜안을 보여주지 못하게 됩니다. 나중에 언급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청의 승리를 예상했던 VOC와는 반대로, 청나라 조정은 상당히 불안한 입장이었습니다. 하루에 수차례 정성공으로 입은 피해가 조정에 보고 되었습니다.


남중국 백성들은 만주족의 공격에 자진 항복했는데, 정성공이 이토록 많이 승리를 거두다 보면 결국 그에게 다시 항복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청나라 정부는 그를 정지룡처럼 여기고 복건 도독에게 명하여 협상에 나갈 것을 지시했습니다. 복건 도독은 과거 숭정제와 정지룡 사이의 계약과 비슷한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정성공을 바다의 지배자로 인정하겠고, 새 작위를 내릴 것이며, 군사를 유지해도 문제 삼지 않을테니 대항 활동을 멈추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성공은 명 왕조를 무너뜨리고 자신의 어머니를 죽인 원수를 용서할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정성공은 놀랄 정도로 짦은 문구만을 적어 보냈습니다.


"나는 오랑캐들의 말을 믿지 못하며, 반역자들과는 협상하지 않는다."


이 말이 끝이었습니다. 복건 도독은 파직되었는데, 청 왕조는 그들이 보유하고 있던 다른 무기를 쓰기로 했습니다. 북경에 끌려온 정지룡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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