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문 고침으로 추측되는 태자사낭공대사비 (2차)

 우선 제가 짧은 시간동안 살펴본 바, 저의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1. 비문은 조작되었다? → 아니다!

2. 비문은 고쳐졌다? → 가능성이 있다.

3. 비문 본문찬자 최언위는 누구의 명으로 비문을 작성했는가? 
    → 경명왕일수도 신덕왕일수도 있다.

4.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시스템의 태자사낭공대사비문의 각주는 잘못 되었다 
    → 그렇다!

5. 김두진 교수의 논문 <왕건의 승려결합과 그 의도>의 낭공대사와 왕건과의 만남에 
   대한 해석은 잘못 되었다.
    → 그렇다!


다시한번 말씀드립니다만, 제가 경황없이, 대책없이 쓰는 글이기 때문에 오류가 있을 가능성도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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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광종도 비문을 조작했네요. 충격입니다.http://cafe.naver.com/booheong/80084
<비문조작?고침?으로 추측되는 태자사낭공대사비 (1차)> http://cafe.naver.com/booheong/800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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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에서도 알아 봤듯이, 낭공대사는 916년 2월에 열반하였으며
이후 신라국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최언위가 왕의 명을 받아 글을 짓고, 
낭공대사의 문하인 단목(端目)이 김생의 글을 집자하여 
917년 11월에 낭공대사 묘를 이장하면서 석호(石戶)을 같이 봉폐한것으로 비문에 나와 있습니다.

즉 비문은 916년 2월~917년 11월에 작성된것입니다.

그렇다면 단목이 집자하였다는 김생(金生)에 대해 간단히 알아 보겠습니다.

삼국사기 김생 열전中
김생은 부모가 미천하여 가문의 내력을 알 수 없다. 경운 2년에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글씨를 잘 썼다. 그는 평생동안 다른 기예는 닦지 않았으며 나이 80세가 넘어서도 붓을 놓지 않았다. 예서와 행서 초서가 모두 입신의 경지여서 지금까지도 더러 그의 진필이 남아 있는데 학자들이 보배로 여겨 전하고 있다. 숭녕 연간에 학사 홍관이 진봉사를 따라 송에 들어가서 변경에 묵고 있었는데, 이 때 한림 대조 양구, 이혁 등이 황제의 칙서를 받들고 사관에 와서 그림 족자에 글씨를 썼다. 홍관이 그들에게 김생이 쓴 행초 한 권을 보이니 두 사람이 크게 놀라 말하기를 "오늘날 왕우군의 친필을 보게 될 줄 몰랐다"고 하였다. 홍관이 말하기를 "아니오. 이것은 신라인 김생이 쓴 것이오" 하니 두 사람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천하에 왕우군말고 어찌 이런 묘필이 있겠오?"라고 하였다. 홍관이 여러 번 말하였지만 그들이 끝내 믿지 않았다. 또한 요극일이라는 사람이, 벼슬이 시중 겸 시서 학사에 이르렀는데 필력이 좋아 구양순의 솔경의 필법을 터득하였다. 비록 김생에게는 못 미쳤지만 역시 특이한 기품을 가지고 있었다.

*왕우군(王右軍) : 중국 진(晋)나라 때의 명필 왕희지(王羲之)의 다른 이름으로 중국 고금(古今)의 첫째가는 서성(書聖)


김생의 생몰년은 711~791 입니다. 당대는 물론 현재 까지도 우리나라 최고의 명필로 손꼽히고 있는데요.

하여 단목스님은 김생의 글을 집자, 즉 김생의 글을 모아 짜집기하여 비문을 제작한듯 싶습니다.

비문의 해당 글자들은 같은 글자라 하더라도 조금씩 다르나, 전체적으로 거의 유사합니다.


그럼 제가 비문이 처음과 달리 고쳐진것 같다는 의구심을 가진 이유를 말해 보겠습니다.


1. 신덕대왕(神德大王)의 네글자가 비문의 동일한 글자와 다르게 느껴진다.


2. 신덕대왕(神德大王) 과 성고대왕(聖考大王)  글자 앞에만 두칸의 공백이 보인다.

    탁문을 살펴본 결과 본문중에 찬사를 제외한 본문의 1칸 공백은 총 24회인데,

    이중 신덕대왕(神德大王) 과 성고대왕(聖考大王) 만이 앞에 2칸의 공백이 있다.

    *신덕대왕(神德大王) : 신덕왕의 시호

    *성고대왕(聖考大王) : 훙서한 전왕

    본문에 대왕은 총 3번 등장하는데, 신덕왕 이전의 전왕인 효공대왕(孝恭大王)은 1칸의 공백이 있다.


3. 비문을 제작한후 신덕왕이 훙하자, 칭호를 미처 바꾸지 못하였다가 후에 바꾼게 아닌가?

   비문이 아무리 늦게 만들어 졌어도 917년 10월에는 마무리가 되었어야 했는데

   그해 7월에 갑자기 신덕왕이 훙하자, 신덕왕의 칭호를 미처 못바꾸거나 경황이 없었던것은 아닐까?

   만약 917년 11월 봉폐될 당시엔 비문에 신덕왕을 살아있는 왕으로 기록하였다가 후에 바꾼것은 아닐까?


4. 비문 말미의 찬사에 표현된 임금은 신덕왕이다.

   비문 본문의 말미에 찬사가 있는데 이런 구절이 있다.

   임금은 숙연하게 도덕(道德)을 흠모하여

   친서를 보내 왕궁으로 초빙하였네. 

   진성(眞聖)과 효공(孝恭)의 양조(兩朝)를 부찬(扶贊)하였고 

   忽飛美譽 頻降佳召 扶賛兩朝

   여기서 임금은 신덕왕이 자명하다. 

   왜냐하면 낭공대사가 진성여왕과 효공왕의 양대에 걸쳐 부찬(扶贊/도왔다. 모시었다)하였기 때문이다.

   즉 여기서 임금은 현왕 신덕왕을 뜻한다.

   본문에 양조의 표현은 비문 앞부분의 고양조국사(故兩朝國師)를 포함하여 총 3번 나오는데, 

   만약 현왕이 경명왕이라면 진성,효공,신덕왕까지 표현해야 하질 않겠는가?




1. 신덕대왕(神德大王)의 네글자가 비문의 동일한 글자와 다르게 느껴진다.

 


a. 신(神)은 총 7번 각자됨

神疲 / 神居 / 神人 / 神儀 / 神色 / 神通  ↔ 神德大王


       


-부수 示 의 경우 맨위의 一 한일자가 뱀이 좌측을 향해 입을 벌리듯 한데

  유사한것이 神居 神人 神儀 神色 神通 입니다. 이에 비해 신덕은 좌측에 굴곡없이 한번 찍고 말았지요.

  다만 神疲 과 신덕은 유사한듯 싶네요.

-또 神疲 神居 神人 神儀 神色 神通 6글자 공통적으로 丨이 끝에 끝 꺽임이있는데, 신덕은 쭉 내려오고 맙니다.


b. 덕(德)은 총 4번 각자됨

德尤 / 德二 / 德顯  ↔ 神德大王

      

德尤 德二 德顯 의 경우 두인변 부수 彳가 유사하지만 신덕대왕의 덕자와는 확연이 다릅니다.

특히 부수 맨위의 꺽임이 세글자는 지팡이 모양으로 유사한데, 신덕대왕만은 꺽이지 않고 살짝 내렸지요.


심(心)의 경우에도 德尤 德二은 점을 두번 찍었으나, 신덕대왕의 덕은 한일자처럼 한번에 쓰윽하고 맙니다.

십(十)자도 위에서 德尤 德二 德顯 모두 아래로 내려올때 심하게 꺽이나, 신덕대왕만은 짧게 끝나지요.



c. 대(大)는 총 37번 각자됨


大師 / 大和 / 大中 / 大川 / 大聖 / 謁大 / 師大 / 大王 / 大覺 / 大地


대부분의 大자가 힘이 넘치는 필체인데, 신덕대왕의 大자는 六 에 가깝게 느껴집니다.

특히 마지막 획수는 다른 大자는 한번에 쓱하고 밀었는데 반해

신덕대왕의 大자는 처음부분이 살짝 휘어지는게 다른 글자들과 다르게 느껴집니다.


1~8

9~16

17~24


25~32
 

33~37



d. 왕(王)는 총 5번 각자됨
王院 / 王城 / 大王


王院 / 王城 두글자는 거의 유사해 보입니다. 흘려 쓴듯이 보입니다.
다만 대왕의 왕과는 사뭇 다르지요. 대왕의 王은 힘있게 쓴게 한눈에 봐도 알수 있습니다.
대왕의 王자는 세글자다 유사해 보이긴 하는데, 신덕대왕과 성고대왕이 좀더 비슷해 보이는군요.

2. 신덕대왕(神德大王) 과 성고대왕(聖考大王)  글자 앞에만 두칸의 공백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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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스스로에 대한 반문

1. 신덕대왕(神德大王)의 네글자가 비문의 동일한 글자와 다르게 느껴진다.

    → 신덕대왕이 전체적으로는 다른 글자와 확연히 다른것 같긴하나, 전문가도 아닌 내가 어찌 상세히 구분할수 있겠는가?


2. 신덕대왕(神德大王) 과 성고대왕(聖考大王)  글자 앞에만 두칸의 공백이 보인다.

    → 무슨 연유가 있지 않았겠나? 비문의 형식일수도 있지 않겠나?

        광종조 비슷한 시기의 다른 금석문을 살펴보니 유사한 사례가 있긴하다.


3. 비문을 제작한후 신덕왕이 훙하자, 칭호를 미처 바꾸지 못하였다가 후에 바꾼게 아닌가?

   → 비문의 본문과 음기를 있는 그대로 보면, 비문의 명을 내린것은 신덕왕이 아닌 경덕왕일수 있다.

       경덕왕이 비문의 명을 내렸다면, 신덕왕의 칭호는 신덕대왕과 성고대왕이 맞다.

       즉 처음부터 비문은 제대로 만들어 진것일수도 있다.


4. 비문 말미의 찬사에 표현된 임금은 신덕왕이다.

   → 진성, 효공왕 때에만 낭공대사가 국사를 지냈을 가능성도 있질 않겠는가?

       그렇다면 찬사에 나타난 임금은 현재의 왕이 아닌라 전왕일수도 있다.


5. 광종조 954년 음기된 후면에는 경명왕조에 시호를 추증하고 탑명을 지었으며, 최언위에게 글을 짓게 하였다고 나온다.

   오직 대사께서 당신라국(唐新羅國) 경명왕(景明王) 때인 천우년중(天祐年中)에 화연(化緣)을 마치고 열반에 드셨을 때,

   명왕(明王)이 시호와 탑명(塔名)을 추증하고 이어 최인연(崔仁渷) 시랑(侍郞)에게 칙명을 내려 비문을 짓게 하였다.

   -연호 천우가 사용된 시기는 904년 ~ 919년으로, 만약 경명왕이 비문의 명을 내렸다면 917년 7월~919년까지이다.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에서는 명왕의 각주도 고려 광종으로 해석하였으나 이는 잘못된것으로 생각된다.


   정면 본문 말미에는 금상(今上/현재임금)이 시호와 탑명을 추증하고 최언위에게 글을 짓게 하였다고 나온다.

   지금 임금이 홍기(洪基)에 올라 공손히 보록(寶籙)을 계승하고, 아울러 선화(禪化)를 흠숭(欽崇)하시기를 전조(前朝)와 

   다름없이 하였다. 그리하여 시호를 낭공대사(朗空大師)라 하고, 탑명(塔名)을 백월서운지탑(白月栖雲之塔)이라 추증하였다.

   -주체를 신덕왕으로 하면, 신덕왕이 진성, 효광왕 때와 같이 낭공대사를 흠모하였으며, 

     낭공대사 사후 916년 2월~917년 7월 사이에 비문의 명을 내렸을 것이다.

   -주체를 역시 경덕왕으로 하면, 경덕왕이 보위에 오른후 1년반전에 죽은 낭공대사를 흠모하여 시호와 탑명의 명을 내렸을 

    것이다.



- 짧은시간 생각을 정리한 글이라, 오류가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많은 의견 부탁드립니다-

- 감사합니다. 길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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