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충헌이 처음 두각을 나타낸것이 1174년 서경 반란때 전봉별초 도령으로 출전한것인데,
산원(대위급) 벼슬에서 도령으로 자원해, 군공을 세워 별장(소령급)으로 진급하게 되지요.
최충헌 묘지명에 보면 이때의 일을 이렇게 적고 있더군요.
분발하여 목숨을 돌보지 않는 자를 뽑아 전봉별초(戰鋒別抄)를 만들었는데, 공이 천거되어 도령(都令)이 되었다.
한 지역을 맡아서 진(陣)을 함락시켜 적을 물리치고, 성벽에 올라 앞장서 들어가니 드디어 이겨서 난을 평정하였다.
하여 고려군의 선봉부대가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았습니다.
고려사 병지中
문종이 즉위하매 시중 최제안 등이 주하기를 「병서에 이르기를 만인의 군대는 3,000인 취하여 기로 삼고 1,000인의 군대는 300인을 취하여 기를 삼는다고 하였으니 청컨대 6위군의 한 장군의 영하마다 200인씩을 뽑아 선봉군을 삼으소서.」 하니 이를 청종하였다.
고려사 절요 1047년 7월(문종 1년) 기사中
제하기를, “서경감군(西京監軍)과 분사어사(分司御史)가 모두 맹해군(猛海軍) 10령(領)을 뽑는데 상경(上京 개성)의 예를 따라 천 명마다 선봉 3백 명을 가려서 낭장 1명이 영솔하게 하고, 그대로 좌부(左府)에 예속시키라." 하였다.
이를 종합해 보면, 6위의 병력 42000명중 약 20%인 8400명 정도이데,
실질적인 6위의 주력 전투부대인 3위 32령으로 따지면
약 6천명정도가 선봉부대로 편성되었을듯 싶네요.
서경(평양)의 경우 고려사 병지에 약 1만명이 편성되었고, 위의 글에서도 약 10령이라 하니 얼추 비슷한듯 싶습니다.
서경의 경우는 총병력 1만명중 약 3천명 정도를 선봉군으로 삼은듯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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