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문종이야기(28) 귀화 여진인의 살인사건

 고려 문종조 이야기를 틈틈이 하고 있는데요, 오늘은 문종말년에 동여진 추장으로서 15부락을 이끌고

고려의 군현에 편입되길 바란 여진족 추장 고도화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이 고도화가 젊을적에 부락 추장을 살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사건의 개요는 이렇습니다. 

고려 중기 많은 여진부락들이 고려에 귀부를 청하였는데요.

고려는 부락의 우두머리에게 도령(都領)이라는 직위를 내리고 부락민을 통솔케 하였는데요,

정종4년 (1038년)에 부락내부에서 도령을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 졌습니다.

고려 조정에서는 이 살인사건을 두고 고려법대로 처리하느냐? 아니면 그들이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두느냐?

를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졌습니다. 결국은 황주량의 의견을 쫒아 그들이 알아서 하도록 조치하게 합니다.


살인자 : 동여진 계주(鷄州)의 고도화(高刀化), 위주(威州)의 구둔(仇屯)

피살자 : 동여진 도령장군(都領將軍) 개로(開老)/개로(開路)


*위주(威州) 평안도 희천군(熙川郡) 일대이며, 계주(鷄州) 또한 인근으로 보입니다.

*고도화의 이름은 기록(고려사세가/고려사열전/고려사절요/동사강목)마다 틀립니다.

 고조화(高刁化)/고도화(高刀化)/고도화(古刀化)/고도화(高陶化)

 같은 년월에 기록마다 상이하기도 하는데, 동일 인물인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일단 이들은 덕종조부터 활발히 고려조정에 방물을 바치며 조공을 하였는데요,

이에 따른 고려조정에서 하사한 직위의 계급은 대략적으로 이렇습니다.


대상(大常)/대상(大相) (고려 정4품급) > 도령장군(都領將軍) (고려 정4품급) > 원보(元甫) (고려 종4품급)


고려에 입조내역

1031년 9월 회화장군(懷化將軍) 오어나(烏於那) + 원보 개로(開老) 입조

1031년 10월 원보 개로 단독 입조

1032년 2월 장군 개로 입조

1032년 7월 귀덕장군 개로 + 원보 고도화 입조

1035년 12월 대완(大完) 고도화 단독입조

1036년 2월 장군 개로 입조

1038년 5월 고도화+구둔 장군 개로 살해

1043년 3월 장군 개로 입조?

1045년 4월 영새장군 고도화 입조

1073년 2월 귀순주도령 대상 고도화 15주 추장을 이끌고 고려에 완전 복속 원함, 

               고도화에게 손보새(孫保塞)라는 이름 하사하고 회화대장군에 봉함

1076년 1월 귀덕장군 개로 입조



개로의 경우 1031년 9월에는 장군 오어나와 함께 입조하였는데, 당시에는 원보였지요. 오어나+개로의 입조인은 67명인데요.


한달뒤인 1031년 10월에는 개로가 단독으로 입조하고, 입조인은 46명입니다. 

덕종은 개로의 작위를 올려 귀덕장군(歸德將軍)에 봉하지요.


1032년 7월에는 개로는 다른 추장 2명[가이로(加伊老)/야반(也半)]과 함께, 

그리고 개로 보다는 세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짐작되는 또다른 추장 1명 바로 원보 고도화(古刀化)를 데리고 입조합니다. 

이때 입조인은 91명입니다.


고려 입조의 실리가 있었는지, 고도화는 3년뒤 1035년 12월 대완(大完)이란 칭호로 단독 입조합니다. 
대완(大完)은 고려초부터 여진인들이 입조시에 간혹 보이는 관직명으로, 거란에서 하사받은 관직명입니다. 
이때 입조인은 30명입니다.
개로와 고도화가 따로 입조 한것을 보면 개로와 고도화는 인접 하였지만 다른 부족 추장일 확률이 높은것 같습니다.

1036년 2월에는 장군 개로가 다시 입조하여 준마를 바쳤지요. 이때 입조인은 71명입니다.


문제는 1038년 5월에 발생합니다. 위주의 구둔과 계주의 고도화가 인근을 통솔하던 도령장군 개로를 살해해 버리는 일이 벌어진 것이지요. 일단 1차적인 원인은 재물다툼으로 알려졌으며, 개로가 술에 취한틈을 타 때려 죽였습니다.
이후 여진의 풍습대로 근방의 노인들이 살해범 고도화와 구둔의 재물을 모아 개로의 집에 보내주어 죄를 갚았다고 합니다.

이에 고려 조정은 [부하가 상관을 살해하였고, 이미 고려에 귀부하였으니 고려법대로 처리해야 한다]는 문하시중 서눌의 의견과,[여진인은 인면수심의 오랑캐인데, 저희들 풍속대로 알아서 하도록 하자]는 평장사 황주량의 의견이 대립하게 됩니다. 이에 정종은 황주량의 의견을 따르게 되지요.


고려사절요 1038년 5월 기사中

○ 5월에 동계병마사(東界兵馬使)의 보고에, “위계주(威鷄州)에 있는 여진의 구둔(仇屯)ㆍ고조화(高刁化) 두 사람이 그 도령(都領)인 장군 개로와 재물을 다투다가 개로의 취한 틈을 타서 때려 죽였습니다." 하였다. 대신에게 의논하게 하니, 문하시중 서눌 등이 의논하여 아뢰기를, “여진이 비록 다른 종족이나 이미 귀화하여 이름이 우리 호적에 올라서 일반 백성과 같으니 본래 우리나라 법대로 따라야 할 것이고 이제 재물을 다투는 일 때문에 그의 윗사람을 때려 죽였으니 그 죄를 용서해서는 안 됩니다. 법대로 처리하소서." 하였다. 내사시랑 황주량 등은 의논하여 아뢰기를, “이들이 비록 귀화하여 우리의 번리(藩籬)가 되기는 하였으나 겉만 사람이고 속은 짐승 같아서 사리를 알지 못하고 풍교에 익숙하지 않으니, 형벌을 가해서는 안 됩니다. 또 법조문에, '교화 밖[化外]의 여러 사람들은 저희끼리 서로 죄를 범한 경우 각각 제 나라 풍속대로 처리한다.' 하였고, 더구나 그 이웃에 사는 늙은 이들이 이미 저희의 풍속대로 범인 두 집의 재물을 내다가 개로의 집에 보내주어 그 죄를 갚았으니, 어찌 다시 죄를 논하여 처단하겠습니까." 하니, 왕이 황주량 등의 의논을 따랐다.



이후 5년후 1043년 3월에 또다시 동여진 장군 개로(開老)가 40여명을 이끌고 입조하여 말을 바치게 됩니다.


고려사 정종9년 (1043년) 3월 기사中

임진일. 동여진의 장군 개로(開老) 등 40명이 와서 말을 바쳤다.


5년전에 살해된 개로가 또다시 입조? 뭔가 이상해 보이지만, 저는 이경우를 추장 아들이 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추장아들이 새롭게 고려에 입조하면 새롭게 이름을 등록하고 관직도 받아야 하는데

그들 입장에서는 상당히 번잡스러운 일이겠지요. 

이미 선대부터 바친 물품도 있고, 받아온 관직이 있으니 그대로 대접받길 원했다고 보면 타당할듯 싶습니다.

마치 탐라가 고려에 입조할때, 성주와 왕자를 계속 이어 받았듯이 말입니다.


또한 1045년 4월에는 고도화가 영새장군(寧塞將軍)이란 칭호로 70명을 이끌고 입조합니다.

10년전 마지막으로 입조하였을때 고도화는 원보였고, 입조인은 30명이였는데, 살인사건이후

관작은 장군, 입조인은 70여명으로 늘게 됩니다.


반면에 5년전 입조했던 개로는 장군의 관작이며, 입조인은 71명이였습니다. 1043년에는 40명으로 줄었지요.

즉 입조인의 수를 세력의 강약이라고 가정할때, 고도화는 2배이상 세력이 늘어났고, 개로는 반수가까이 줄어든 셈이지요.



이후 30여년의 세월이 흘러 문종의 치세가 절정에 다다른 1073년 2월 고도화를 대표로 하는 동여진 15개 부락이

드디어 고려의 군현에 편입해 줄것을 간청합니다. 즉 완전한 복속을 의미하지요.

아래 기록상으로는 11주인데, 아마 기록에 부도령 및 번장 3인이 보이는데

소규로 부락을 포함하여 15주인듯 싶고, 혹은 그전에 경우까지 포함한듯 보이네요.

또 2달후 문종의 조서를 살펴보면 15주가 맞는듯 싶습니다.

우선 여진부락은 부락의 의미로 촌(村)의 명칭을 사용하였는데, 고려 조정에서는 편입을 원하는 부락에

주명(州名)를 내려 주었습니다.

1073년 9월에 군현요청을 한 대란등 11개 촌은 스스로 주명을 정해 고려에 윤허를 받고자 하기도 하였습니다.


고려사 절요 1073년 4월 기사中

“동북 변방 15주 바깥에 번인이 서로 잇달아 귀화하여 군ㆍ현을 설치해 주도록 원하는 자가 지금까지 끊이지 않으니, 이것은 실로 종묘사직 영령의 덕택이다


고려사 1073년 4월 기사中

“동북 국경지역 15개 주(州) 외곽에 사는 오랑캐들이 계속 귀부해 오면서 우리 행정구역에 편입시켜 줄 것을 끊임없이 간청하고 있으니, 이는 실로 종묘와 사직의 신령들 덕분이다.


동사강목 1073년 2월 기사中

동여진의 귀순주 도령(歸順州都領) 고도화(古刀化)와 창주 도령(昌州都領) 고사(高舍) 등 15주(州)의 추장이 무리를 이끌고 내부하여 군현이 되기를 청하므로


문종원년의 30여 부락의 귀부이후, 많은 여진부족들이 귀부와 입조를 거듭하였지만 이처럼 직접 군현을 설치하고
고려에 편입을 원하기는 처음 있는 일이였습니다.


-귀순주(歸順州)=귀주(歸州)+순주(順州) : 도령(都領) 대상(大常) 고도화(古刀化) + 부도령 고사(古舍)

-익주(益州) : 도령 귀덕장군(歸德將軍) 고사(高舍)

-창주(昌州) : 도령 금부(黔夫)

-전주(氈州) : 도령 봉국장군(奉國將軍) 야호(耶好)

-성주(城州) : 도령 귀덕장군(歸德將軍) 오사불(吳沙弗)

-공주(恭州) : 도령 봉국장군 다로(多老) + 번장(番長) 파가불(巴訶弗)

-은주(恩州) : 도령 원보(元甫) 아홀(阿忽)

-복주(服州) : 도령 나거수(那居首)

-온주(溫州) : 도령 삼빈(三彬) + 아로대(阿老大)

-성주(誠州) : 도령 이다불(尼多弗)


고도화는 귀주와 순주 2개부락을 다스리는 추장으로서, 15주를 대표하였고 입조여진의 최고 관직인 대상(大常)을 하사받은 

상태였지요. 30여년전에는 원보로서 장군 개로를 따라 입조하였고, 점차 세력이 강해져 이당시에는 2대 부락의 추장이 되어 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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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도 한번 여진 1부락의 규모에 대해 알아본적이 있었는데 약간의 오류가 있었습니다.

고려사절요에는 1073년 6월에 군현편입을 요청한 기사에

<삼산(三山),대란(大蘭),지즐(支櫛) 등 마을의 번장 1238호> 라고 하여 3개 마을 1238호로 계산한적이 있었는데

고려사에는 <삼산촌포함 9개 부락이 1238호> 라고 자세히 적혀 있어, 계산상의 오류가 나고 말았습니다.

당시에 1부락의 평균 호수를 400으로 잡았는데 이는 잘못 되었고

1073년 6월의 군현 편입 동여진의 경우

삼산촌등 9개 부락이 1238호, 대제촌등 12개 부락이 1970호  합산하면 1부락당 평균 153호정도 됩니다. 

당시의 여진부락의 1호당 평균인구는 평로진 근처의 서번마을의 7.2명을 기준으로 삼으면

1073년 2월 고도화가 이끄는 동여진 15주의 호수는 총합 2300 여호, 인구는 16500 여명이 됩니다.

1073년 6월 군현편입을 요청한 동여진은 총 21부락, 3208호, 인구로 추산하면  23100 여명이 됩니다.

즉 1073년 2~6월 사이에만 5500 여호, 4만여명이 고려의 국적에 붙길 원한것이지요.


이후 이해 5월에는 서여진 추장 만두불(曼豆弗)이 동여진의 전례에 따라 군현을 설치해준다면

거란과의 관계를 끊고 고려의 영원한 번병이 되겠다는 청을 하게 됩니다.
이어 오랑캐 도적이 머물고 있는 삼산촌(三山村)이 인근 흑수여진 30개 부락의 원수인데, 
이들을 공격할때 참관해 달라는 청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즉 30개 부락의 연합군 2천명을 지휘해? 달라는 청이였지요. 당시에 삼산촌의 호수는 150여호에 보기병 500여명을 보유하였는데
삼산촌의 세력이 강해 주변부족들을 많이 괴롭힌 모양입니다.
실제로 정주 낭장 문선등 고려군인 15명이 귀순한 여러 추장들과 함께 이전투를 참가하기도 하였습니다.
세부 내용이 상당히 흥미로운데,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다음에 한번 상세히 다뤄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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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설이 길어졌는데요, 귀화?한 고도화는 문종으로부터 손보새(孫保塞)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회화대장군(懷化大將軍/이민족 장수에 내리던 당나라의 관명, 고려에서도 여진족등에 사용하였음)에 임명되게 됩니다.

아마 고도화의 입장에서는 평생을 암투와 전투속에서 살아오다가
말년에 이르러 2개 부락 추장이 되니 고려의 군현이 되어 지역유지로서 편안한 삶을 살고 싶었나 봅니다.
사실 당시 여진쪽 사정이 고려는 나날이 국력이 강해지고 있었고, 여진 부족간의 전투가 빈번하게 발생하던 시기였습니다.
앞서 언급한 삼산촌 전투를 보게 되면, 부족간의 전투는 굉장히 치열하고 처절하더군요.
노후가 되니, 고려의 울타리속에서 지역유지로서 편안하게 살고 싶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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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산촌의 경우 호수 150호에 총인구는 1000 여명인데, 보기병이 500 이였습니다.
이들은 병력을 크게 둘로 나눠 나갈촌(羅竭村)유전촌(由戰村)에 주둔하였는데
나갈촌 전투에서 병사 220명이 전사하고, 330명을 사로잡혔으며 나머지는 모두 불에 태워 죽였습니다.
남녀노소 약 300명으로 추산되는 유전촌은, 흑수말갈 30부족 연합군 2천명의 공격을 막아내게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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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나가는 고도화에 반해 개로는 고려로의 입조를 계속 하였는데요, 규모는 매우 적었습니다.

3년후인 1076년에는 귀덕장군 개로는 10여명을 이끌고 입조를 하게 됩니다.



요약결론 : 야심많은 고도화는 추장 개로를 제거하고 결국 2개부족 추장이 되었으며

              말년에 15부락을 이끌고 고려로 항복해 손보새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잘살았다?

              반면 개로의 가문은 크게 세력이 꺽이고 말았다?



P.S) 고려의 군현에 소속되었던 수많은 여진부족들이 계속하여 고려의 울타리속에 존재 하였는지는 의문이 드네요.

       자세히 살펴보진 못하였으나 고려사와 지리지에 나온곳을 간략히 살펴보면

       귀주(歸州), 순주(順州), 익주(益州), 창주(昌州), 성주(城州/신증동국여지승람), 온주(溫州), 복주(福州) 정도입니다.

       상당수 나타나지 않는것으로 보아 완전한 고려로의 복속은 이루워지지 않은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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