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문종이야기(25) 고려사신의 횡포로 잘못 알려진 부분

 항간에 떠도는 송사 고려전의 내용 중에 

<고려 사신이 거란에 가서 그곳 관리들을 채찍으로 내려쳤다>는 부분은 오역인듯싶습니다.

국역 송사 고려전에도 주어가 거란의 관반과 공경입니다.



송사 고려전 중 흠종 즉위년의 기록을 살펴보면

고려가 거란에 대해 한 해에 조공을 여섯 번이나 하였지만 거란의 주구(誅求)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歲貢契丹至於六, 而誅求不已

  

거란에서는 항상, 고려는 바로 우리의 노예인데 남조(南朝/송)는 무엇 때문에 고려를 후하게 대우하는가?” 라고 하였다.

高麗乃我奴耳, 南朝何以厚待之

  

고려의 사신이 거란에 이르면 더욱 거만하고 포학스러워 관반(館伴)이나 공경(公卿)의 비위에 조금이라도 거슬리면 함부로 머리채를 잡아 흔들거나 채찍으로 쳤다.

使至其國, 尤倨暴, 館伴及公卿小失意, 輒行捽箠,

  

송나라 사신이 고려에 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반드시 다른 일을 핑계하여 와서 정탐하고 하사한 물건들을 나누어 가져갔다.

聞我使至, 必假他事來覘, 分取賜物

  

거란이 한번은 고려가 서쪽으로 조공한 일에 대하여 힐책하자, 고려는 표를 올려 사과하였다.

그 표의 대략 내용이,

“중국에서는 3갑자(甲子)만에 한번씩 조공하고 대방(大邦)에게는 1년마다 여섯 번씩 조공합니다.” 
하니, 거란이 깨달아 고려가 마침내 화(禍)를 모면하였다. 
嘗詰其西向修貢事, 高麗表謝, 其略曰: 「中國, 三甲子方得一朝; 大邦, 一周天每修六貢.」 契丹悟, 乃得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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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주요 요지는 거란이 고려에게 횡포를 부리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館伴及公卿小失意, 輒行捽箠

 

관반(館伴)은 사신의 영접을 담당하는 관직으로, 주로 3품 이상의 고위 관리가 임명됩니다.

또한 공경(公卿)은 재상을 뜻하지요.


즉 고려 사신이 관반이나 공경의 머리채를 휘어잡거나, 채찍질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관반이나 공경이 비위에 거슬리면 고려 사신을 괴롭혔다는 뜻입니다.

 

또한 송나라 사신이 고려에 오면, 거란에서 핑계를 대고 고려에 와서 송나라가 주고 간 물건을 뺏어간다는 뜻입니다.

 

이런 기록을 남긴 이유는 앞뒤 문맥을 보고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당시 송나라가 고려와 외교관계를 수립한 이유는 역시, 유사시에 거란을 견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반대로 고려가 송나라와 외교관계를 수립한 이유는, 군사적인 목적보다는 문화 수입과 고려 국왕의 열망 때문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신하들은 송나라와 외교관계를 회복하는 것 자체를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중화 사대주의자?로 널리 알려진 김부식 조차도, 송나라가 제의한 군사연합을 깨버린 장본인이기도 하였습니다.

고려 외교는 철저히 실리를 택하는 외교를 선택하였습니다.

 

 

이런 엄연한 현실을 알고 있던 송나라 관료들은 고려와의 외교관계가,

실질적인 대거란 견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란 걸 알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다가 금이 건국하자, 금에 대한 사대를 결정한 고려 자체를 신뢰하지도 않았지요.

(금에 대한 사대는 여진족과 치열한 싸움을 한 척준경과 이자겸이 결정한 일입니다)

오히려 금과 내통할까 두려워, 사신을 보내놓고 정탐까지 할 정도였지요.

 

 

하여, 역시 고려에 일말의 희망?을 품고 있던 송 황제들에게,

(실제 1126년 7월 흠종은 고려에 사신을 보내 연합군을 제의하기도 합니다, 

이에 고려 인종은 1127년 5월 송나라가 금나라를 쳐들어가 금나라가 고전중이다는 첩보를 듣자마자 군사를 일으키려 하였습니다. 이때 급히 귀국한 김부식이 그 반대로 송나라가 멸망 직전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어 참전 회의가 중단된 적도 있었습니다.)

  

고려에게 아무리 잘해줘봤자 거란을 배신할 리가 없다. 봐라~ 거란에게 쩔쩔매는 고려를.....

 

외교와 사대는 지극히 현실적인 것입니다.

송이나 거란이나 고려 사신을 접대하는데, 만만찮은 재물이 들어갈것은 당연지사입니다.

반대로 송이나, 거란사신을 대접하는데도 고려가 얼마나 힘들어하였는지는

고려사에 여실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고려의 리즈시절이라고 하는 문종조에도

거란 사신의 접대 때문에 북방 백성들이 너무 힘들어한다는 내용이 곳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려도 일개 1부족의 여진 추장이 조공을 와도, 후하게 대접해줬습니다.

그러나 과도한 부담이 될까 봐, 2주 이상 개경에 머무는 것을 금지 시킬 정도였지요.

아무리 금은 재화가 많이 들어가도 외교는 군사 목적이 최우선입니다.

또한 형식상의 상하관계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상국에 사신으로 가서 그곳 고위 관리를 채찍으로 내려쳤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지요.

 

그렇다고, 송 관리의 말대로 거란이 고려를 막대한 것도 아닙니다.

서로 충분한 예를 갖추었지요. 거란 황제가 직접 성밖으로 나와 고려 사신을 맞이한 적도 있었습니다.

실상 사신을 통해 고려의 실상을 정탐할 정도밖에 안되는 송의 정보력도 믿을만한 것도 아니고요.

 

거란 관리가 고려 사신을 채찍질했다는 것을 송이 어찌 알았겠습니까.

고려를 자신의 노예라고 허세를 떠는 거란을 통해 들었을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렇게 큰소리친 거란도, 금에게 멸망 직전에 이르자 고려에 재차, 삼차 구원 요청을 하였지만

고려는 쌩까버리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게 진짜 외교의 현실인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기고만장하던 거란도, 결국은 고려 땅에서 종족이 없어지고 다른 종족의 노예가 되었으니

만약 거란이 고려를 노예 취급했다면, 인과응보인 셈이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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