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문종이야기(22) 2대시중 해동공자 최충(崔沖)

 고려 문종조 이야기를 틈틈이 하고 있는데요,

이번에는 문종조 백관의 영수인 문하시중을 역임한 인물에 대해 차례대로 알아볼까 합니다.
오늘은 초대시중 최제안(崔齊顔)에 이어 2대 시중을 지낸 최충(崔冲)을 알아 보겠습니다.


고려 문종조 초대시중 최제안 ( http://cafe.naver.com/booheong/78852 )


최충의 생년에 관한 글( http://cafe.naver.com/booheong/79802 )은 참고하시구요.

여기서는 생년을 985년으로 하겠습니다.


최충의 관직변화


21세 1005년(목종8년) 갑과 1등 장원 급제
27세 1011년(현종2년) 우습유(右拾遺/종6품)
29세 1013년(현종4년) 우습유(右拾遺/종6품), 7대실록 복원 수찬관(修撰官/한림원 3품이하 겸직)
32세 1016년(현종7년) 우보궐(右補闕/정6품)
36세 1020년(현종11년) 기거사인(起居舍人/종5품)
40세 1024년(현종15년) 중추직학사(中樞直學士/정3품)
41세 1025년(현종16년) 한림학사(翰林學士/정4품) 겸 내사사인(內史舍人/종4품) 겸 지제고(知制誥/한림원 3품이하 겸직)
42세 1026년(현종17년) 태자중윤(太子中允/정5품) 겸직
42세~45세 1026~1029년 사이 예부시랑(禮部侍郎/정4품)

45세 1029년(현종20년)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정4품)
46세 1030년(현종21년) 태자우유덕(太子右諭德/정4품) 겸직

49세 1033년(덕종2년)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정3품)
50세 1034년(덕종3년) 4월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종2품)
       1034년(덕종3년) 7월 중추원사(中樞院使/종2품) 겸 형부상서(刑部尙書/정3품)

53세 1037년(정종3년) 참지정사(叅知政事/종2품) 겸 수국사(修國史/2품이상의 관리 겸직)
56세 1040년(정종6년) 좌복야(左僕射/정2품)
57세 1041년(정종7년) 8월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정2품) 겸 참지정사(參知政事/종2품) 

                                    겸 판서북로병마사(判西北路兵馬使/3품)

       1041년(정종7년) 10월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정2품)

59세 1043년(정종9년) 수사도(守司徒/정1품 3공중 2위) 겸 수국사(修國史/2품이상 겸직) / 상주국(上柱國/2품 훈위) 훈위

60세 1044년(정종10년)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정2품) 추정

62세 1046년(문종즉위년) 평장사(平章事/정2품)
63세 1047년(문종1년) 문하시중(門下侍中/종1품)
65세 1049년(문종3년) 문하시중(門下侍中) 겸 수태보(守太保/정1품 3사중 3위)
66세 1050년(문종4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문산계 1등급 종1품) 수태부(守太傅/정1품 3사중 2위) 

                              추충찬도공신(推忠贊道功臣) 칭호 
       1050년(문종4년) 문하시중(門下侍中/종1품) 겸 도병마사(都兵馬使/3품이상 겸직)
67세 1051년(문종5년) 식목도감사(式目都監使/재상 겸직)

69세 1053년(문종7년) 궤장하사 (70세에 이르러도 치사를 면케 해주는 관례)

71세 1055년(문종12년) 문하시중(門下侍中/종1품)  겸 내사령(內史令/종1품) 치사

84세 1068년(문종22년) 졸 [수태사(守太師/종1품 3사중 1위) 중서령(中書令/종1품)] 시호 문헌(文憲)

1086년 (선종3년) 정종(靖宗) 묘정 배향



최충은 해주(海州/현 황해 해주) 대녕군(大寧郡)의 호족이자 목민관(牧民官)을 지낸 해주최씨(海州崔氏)의 시조 최온(溫)의 아들로 985년 (생년은 앞서 언급) 태어 났습니다. 

자는 호연(浩然)이고 고려사 열전에 따르면 풍채가 훌륭하고 지조가 견실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어릴 때부터 공부하기를 좋아하였고 글도 잘 지었습니다.


최충은 21세 되던해, 목종8년(1005년) 4월에 갑과(甲科)에 응시하여 장원급제를 함으로서 관직의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27세인 현종2년(1011년)에는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훗날 문하부) 예하의 종6품의 우습유(右拾遺)에 임명됩니다.

습유는 흔히 간관(諫官)이라 칭하며 예종11년에 정언(正言)으로 명칭이 변경됩니다.


29세 되던해 현종4년(1013년) 9월 현종은 전란중에 소실된 실록을 편찬하고자, 이부상서 참지정사(吏部尙書參知政事) 최항(崔沆)을 감수국사(監修國史)로 삼아 실록을 편찬하게 되는데, 이때 최충도 수찬관(修撰官)이 되어 작업에 참여하게 됩니다.


32세 되던 현종 7년 (1016년) 1월 조정개편에서 최충은 내사문하성 소속의 정6품직 우보궐(右補闕)에 임명됩니다.


36세 되던 현종 11년 (1020년) 1월 조정개편에서 최충은 내사문하성 소속의 종5품직 기거사인(起居舍人)에 임명됩니다.


40세 되던 현종 15년 (1024년) 12월 조정개편에서 최충은 중추원의 직학사(直學士)에 임명됩니다.

       중추원은 왕명의 출납과 숙위(宿衛)와 군기(軍機)에 관련되는 정무(政務)를 관장하는 부서로, 

       정3품의 직학사는 중추원의 7추에 해당되기도 하였습니다.

       헌데 36세에 종5품으로 승진한 최충이 4년만에 정3품 추에 임명된것은 무엇인가 오류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다음해인 41세에 정4품에 임명되기 때문이지요.

       1025년 건립된 거돈사원공국사승묘탑비(居頓寺圓空國師勝妙塔碑)에 나타난 최충의 관직은

       중추원직학사(中樞院直學士) 선양랑(宣議郞) 상서(尙書) 사부(吏部)랑중(郎中) 지제고(知制誥) 겸 사관(史舘) 

      수찬관(修撰官) 사자금어대(賜紫金魚袋)이라고 되어 있는데,

       선양랑은 선의랑(宣議郞)이며 문산계 종7품 상(上)이며, 

       상서(尙書) 사부(吏部) 랑중(郎中)은 상서이부(尙書吏部)의 낭중(정5품입니다)을 뜻합니다.

       지제고(知制誥)은 한림원의 3품이하가 겸직하며,

       사관(史舘)는 실록편찬 및 왕의 언행(言行), 정치, 백관(百官)의 행적 등 모든 시정(時政)을 기록하는 관청입니다.

       수찬관 역시 한림원의 3품이하가 겸직합니다.

       전체적으로 보았을시 1024년 최충의 관직은 정5품 상서이부 낭중이 핵심이며

       중추원직학사가 명목상으로는 가장 높은 품계이나, 실질적인 정3품은 아니라고 판단됩니다.

       


41세 되던 현종 16년 (1025년) 12월 최충은 한림원으로 자리를 옮겨 정4품의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임명됩니다.

       한림원은 사명(詞命/외교문서 작성)을 찬술하는 곳으로, 태봉과 고려태조때에는 원봉성(元鳳省)이였지요.

       1026년 건립된 봉선홍경사사적갈비(奉先弘慶寺事蹟碣碑)에는 최충의 관직이

       한림학사 선의랑 내사사인 지제고 겸 사관수찬관 사자금어대

     (翰林學士 宣議郎 內史舍人 知制誥 兼史館修撰官 賜紫金魚袋)

      선의랑, 지제고, 수찬관은 1025년에 이어지는 관직이구요. 

      종4품 내사사인(內史舍人)이 추가되었네요.


42세 되던 현종 17년 (1026년) 11월에는 태자의 동궁관(東宮官)의 태자중윤(太子中允)을 겸하게 됩니다.

       동궁관은 태자의 책봉과 태자비의 납비(納妃)등 여러 의식을 주관하고 태자의 교육 및 시위(侍衛) 등을 맡아보는 관청으로

       대부분 겸직하였습니다. 녹봉도 추가로 더 지급되었지요. 

       문종조 확립된 녹봉제에 따르면 태자중윤은 13석 5말을 지급받았습니다.


45세 되던 현종 20년 (1029년) 11월 조정개편에서 다시 내사문하성 소속의 정4품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에 임명됩니다.

       간의대부는 간쟁봉박(諫諍封駁)을 관장하는 관직 중의 하나였습니다.

       -간쟁(諫諍) : 간관(諫官)들이 국왕의 과오나 비행을 비판하던 일

       -봉박(封駁) : 왕의 조지(詔旨) 내용이 합당하지 못할 경우 이를 봉함하여 되돌려 공박하는 제도


고려사 열전 최충전에 최충의 관직을 나열하면서 한림학사, 예부시랑, 간의대부 순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한림학사와 간의대부 사이에 예부시랑(禮部侍郎/정4품)이 있는것으로 보아 42세~45세 사이에 예부에 소속되어 시랑직을 역임한것으로 보여집니다.

예부는 예의(禮儀)·제향(祭享)·조회·교빙(交聘)·학교·과거(科擧)에 관련된 정사(政事)를 관장하는 관청이지요.


46세 되던 현종 21년 (1030년) 5월에는 동궁관의 태자우유덕(太子右諭德)을 겸직하게 됩니다. 

       우유덕은 정4품으로 16석10말을 추가로 지급 받았습니다.


47세 되던 현종 22년 (1031년) 5월 현종이 훙하고, 태자 왕흠(王欽/덕종)이 즉위하게 됩니다.

       최충은 사신(史臣)으로서 다음과 같이 현종을 논평하였지요.


고려사中

사신(史臣) 최충(崔冲)은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좌전(左傳)』에서는, ‘하늘이 장차 흥기시키려 한다면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천추태후(千秋太后)가 음란하고 방종하여 몰래 나라를 위태롭게 하여 왕위를 빼앗으려 하였는데, 목종께서 백성들이 현종의 촉망함을 알아 천추태후의 악당(惡黨)을 배제하고 멀리 사자를 빨리 보내 맞아와 왕위를 전하여 왕실이 튼튼하도록 하였으니, 이른바 '하늘이 장차 일으키려 하면 누가 능히 그를 폐하리오.' 하는 말을 어찌 믿지 아니하랴? 그러나 이모(姨母 천추태후)가 끼친 화근으로 인하여 병권(兵權)을 가진 신하[戎臣 강조(康兆)를 가리킴]가 반역을 일으키고, 강한 인국(隣國 거란)이 틈을 엿보아 침범하여 서울의 궁궐이 모두 잿더미가 되어 임금이 파천하니 불행이 극도에 달하였다. 그러나 현종이 반정(反正)한 뒤에는 오랑캐와 화호를 맺고, 전쟁을 멈추고 문덕(文德)을 닦으며, 부세를 가볍게 하고 요역을 가볍게 하며, 준수한 인재를 등용하고 정사를 공평하게 하여 서울과 지방이 평안하고 농업과 잠업이 자주 풍년이 들었으니 나라를 중흥시킨 왕이라 이를 수 있다. 현종의 치세야말로 주나라의 성왕(成王)·강왕(康王)과 한나라의 문제(文帝)·경제(景帝)에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다.”


49세 되던 덕종2년 (1033년) 1월 조정개편에서는 내사문하성 소속의 정3품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에 임명됩니다.

       산기상시는 역시 간관(諫官)으로서 정치에 대해 논박하고 왕명과 문서의 출납 등을 담당하였습니다.


50세 되던 덕종3년 (1034년) 4월에는 드디어 재상반열인 종2품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를 역임하고 있었는데

       다음과 같이 덕종에게 건의합니다.


고려사中

“성종(成宗) 때에 안팎 모든 관청 벽에 모두 《설원(說苑)》의 육정 육사(六正六邪)의 글과, 한 나라 자사의 육조령(六條令)을 써서 붙이게 하였는데, 지금은 세대가 이미 오래되었으니 다시 새로 써 붙여서 벼슬에 있는 사람에게 신칙하고 격려한 바를 알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이해 7월에는 형부상서(刑部尙書/정3품)까지 겸하게 됩니다.

       형부는 법률과 사송(詞訟)과 상언(詳讞)에 관련된 정사(政事)를 관장하였지요.


53세 되던 정종3년 (1037년) 7월에는 참지정사(叅知政事/종2품) 겸 수국사(修國史/2품이상의 관리 겸직)에 임명되게 됩니다.

       참지정사는 내사문하성 소속의 재상이였구요, 수국사는 선대왕의 실록편찬관이였습니다.


56세 되던 정종6년 (1040년) 7월에는 좌복야(左僕射/정2품)로서 양대춘(楊帶春/거란과의 전쟁영웅 양규의 아들)의 

       안북대도호부 부사 임명을 재고해달라고 아뢰기도 하였습니다.

       복야는 상서성(尙書省)의 상서령을 보좌하는 정2품 재상직이였지요. 

       허나 상서령은 종실, 주로 왕자들에게 수여되는 관직으로 허직이였고, 실직은 복야가 수장이였습니다.

       허나 상서성은 고려초 광평성(백관을 중심)의 후신으로 내사문하성이 있는 상황에서

       실직은 없는 기구였다는 설이 상당하여, 복야 자체도 허직으로 보는 설도 있습니다.

       일설에서는 복야도 재상반열에는 들지 못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만약 복야가 허직이라면, 최충의 좌복야 역임도 겸직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만 3년전에 이미 참지정사로 재상반열에 있었는데, 1040년 기사에 좌복야라고 나와 있는것을 보면

       복야 자체도 실직이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또한 조정개편에서 종종 좌복야도 임명된것을 보면, 허직의 가능성은 낮은듯 싶네요.

       하지만 최충의 경우 고려사 열전에 따르면 좌복야(정2품)에서 승진하여 내사시랑평장사(정2품)에 임명되었다는 구절을

       살펴보면 같은 정2품 반열은 아니였나 봅니다.


고려사中

가을 7월에 양대춘(楊帶春)을 안북대도호부 부사(安北大都護府副使)로 삼으니, 좌복야 최충이 아뢰기를, “대춘은 의지가 높고 지략이 많으며, 군대의 일에 익숙하니, 만일 변방에 근심이 생기면 이 사람 외에는 보낼 만한 사람이 없는데, 지금 외직으로 배치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57세 되던 정종7년 (1041년) 8월에는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정2품) 겸 참지정사(參知政事/종2품) 겸

       판서북로병마사(判西北路兵馬使/3품)의 자격으로 서북면에 순시를 나가게 됩니다.

       이때 정종은 편전에서 최충에게 옷을 내려주기도 하였지요.

       고려사 병지에 따르면 정종7년에 최충이 영원진(寧遠), 평로진(平虜) 두진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아마 서북로 병마사로 성을 쌓은듯 싶습니다.

   

고려사 병지中

정종7년에 최충이 영원(寧遠) 평로(平虜) 두진에 성을 쌓았다. 

영원성은 759간(間)이고, 보자(堡子/돌과 흙으로 만든 작은성)는 구내에 8개가 있다. 금강수(金剛戍)는 42간, 선위수(宣威戍)는 61간, 선덕수(宣德戍)는 50간, 장평수(長平戍)는 53간, 정잠수(鼎岑戍)는 38간, 진하수(鎭河戍)는 42간, 철용수(鐵墉戍)는 61간, 정안수(定安戍)는 32간, 관성(關城)은 11,700간이었다. 

평로성은 582간(間)이고, 보자는 구내에 6개가 있다. 도융수(檮戎戍)는 36간, 진흉수(鎭兇戍)는 30간, 직잠수(直岑戍)는 41간, 항마수(降魔戍)는 50간, 절충수(折衝戍)는 30간, 정융수(靜戎戍)는 30간, 관성(關城)은 14,495간이었다.

동로(東路)의 환가현(豢猳縣)에 168간 규모의 성을 쌓았다.



이해 10월에는 내사문하성의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정2품)에 임명됩니다.


59세 되던 정종9년 (1043년) 2월에는 수사도(守司徒) 겸 수국사(修國史)에다 상주국(上柱國)으로 훈위됩니다.

  

      -수사도는 사3공중 5위에 해당하는 봉작?이며 정1품에 해당하지요.

        [정식 봉작은 아니고, 왕자나 원로대신이 수여받았음, 녹봉과 식읍을 추가로 받을수 있음. 명예직]

      -수국사는 실록편찬의 임무를 맡는 사관(史館) 소속의 서열 2위로, 수장 감수국사(監修國史)는 문하시중이

        수국사는 2품이상이 겸직하게 됩니다.

      -상주국은 고려의 2대 훈위중 으뜸으로 정2품이고, 아래는 주국(柱國)으로 종2품입니다.


60세 되던 정종10년 (1044년)에는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정2품)에 임명 된것으로 보이는데, 

       근거는 고려사 열전에 상주국으로 훈위된후 미구(오래지 않아)에 또 문하시랑평장사로 승진되었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62세 되던 문종즉위년 (1046년) 8월에는 문종은 초대시중 최제안과 최충을 선정전(宣政殿)에 불러 

       당시 정사의 잘잘못을 의논하기도 하였습니다.


63세 되던 문종1년 (1047년) 4월에는 전해 졸한 최제안에 이어 백관의 영수인 종1품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임명됩니다.

       이해 6월에는 문종의 명을 받아 법률 정비를 하게 됩니다.


65세 되던 문종3년 (1049년) 2월에는 문하시중과 겸하여 3사3공중 3위인 수태보(守太保/정1품)에 임명되구요.


66세 되던 문종4년 (1050년) 1월에는 문산계중 1등급인 종1품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와

       3사3공중 2위인 수태부(守太傅/정1품), 추충찬도공신(推忠贊道功臣) 칭호를 하사 받게 됩니다.

       이해 11월에는 도병마사(都兵馬使/3품이상 겸직)도 겸직하여 서북 주진의 모든 공역을 중단시켜 달라고 아뢰기도 합니다.

       또한 12월에는 억류되었던 동여진 추장 염한(鹽漢) 등 85명을 풀어 달라고 아뢰기도 하지요.

       염한은 동여진의 영새장군(寧塞將軍)으로, 15명을 이끌고 이해 3월에 고려에 입조하였다가 과거에 변방을 침번한 전력이

       있다해서 12월까지 억류 상태였습니다.


고려사中

최충이 아뢰기를, “동여진 추장 염한(鹽漢) 등 85명이 일찍이 여러 차례 국경을 침범하여 변방 백성을 노략질해 갔으므로 경관(京館)에 억류한 지가 오래되었으나, 오랑캐는 겉만 사람이고 속은 짐승이어서 형법으로도 응징할 수 없고 인의로도 교화할 수 없습니다. 구류시킨 지가 이미 오래되어 앙심을 먹고 원한을 품을 것이며, 수구(首丘)의 정이 반드시 그 근본을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고 또 드는 비용이 너무 많으니, 모두 놓아 보내소서." 하니, 따랐다.

 

67세 되던 문종5년 (1051년)에는 재추 합좌 회의기관인 식목도감의 수장인 식목도감사(式目都監使)로 이신석의 관리 등용등을 

       논의하기도 하는데, 여기서 최충의 원칙주의를 엿볼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문무반이나 지방호족의 경우 중앙에 씨족(氏族)를 등록하여야만 관리로 임용될수가 있었는데요,

       과거에 급제한 이신석(李申錫)이 씨족에 등록이 안된 모양입니다.

       식목도감에서 이문제를 가지고 회의가 벌어졌는데, 최충은 내사시랑 왕총지와 함께 임용을 취소해야 한다고 하였고

       이에 반해 문하시랑 김원충과 판어사 김정준은 씨족누락은 이신석 조상의 잘못이지

       별다른 허물도 없이 몇년동안 글공부하여 과거급제한 인재를 등용치 않는것은 사리에 부합되는 원칙이다고 주장합니다.

       이에 대해 문종은 아래와 같이 결정합니다.


고려사 열전中

이에 대하여 왕이 교시하기를 

"최충 등의 주장하는 의견이 사리에 부합되는 원칙이다. 그러나 어진 사람을 등용하기 위해서는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며 

전례에만 구애할 일은 아니다. 김원충 등의 의견대로 처리하라"고 결정하였다.



69세 되던 문종7년 (1053년) 12월에는 최충은 관례대로 치사를 요청하였으나, 문종은 치사를 면할수 있는 궤장을 하사하게 하여

       은퇴를 막습니다.


고려사 절요 1053년 12월 기사中

제하기를, “시중 최충은 대대로 유종(儒宗)이며 삼한의 기덕(耆德)이었다. 지금 비록 늙어서 물러가겠다 하나 차마 윤허할 수 없으니, 해사(該司)를 시켜 옛 법을 상고하여 궤장을 내려주어 일을 보게 하라." 하였다.

 

71세 되던 문종12년 (1055년) 7월에는 드디어 치사가 허락되었고, 

       내사성의 수장인 내사령(內史令/종1품 명예직/최충 은퇴시기에 중서령中書令 으로 변경)으로 퇴직을 하게 됩니다.

       이때 문종으로부터 의대와 은그릇, 비단, 포백과 안장 갖춘 말 등의 물품을 하사 받기도 하였습니다.

       뒤를 이어 이자연(李子淵)이 3대 문하시중에 임명되게 되지요.


고려사중 최충의 치사를 허락하는 문종

최충은 왕이 자기 집으로 사신을 보내 임명서와 예물을 전달한다는 말을 듣고 사양하는 글을 올리기를 

"제가 출사한 이래 아무런 공헌도 보좌도 하지 못하고 몸만 노쇠하여 이제 은퇴를 청원하게 됩니다. 그 동안 직무상 성과도 없이 막대한 국록만 받았으므로 이것을 이미 과분한 은혜로 생각하는데 이제 또 특별한 교지를 내리시고 장차 사신까지 내려 보내시어 영광이 마을에까지 미치게 하신다 하오니 분수에 넘치는 일이라. 하정에 미안하며 분복에 지나치는 일을 저는 항상 송구하게 여기는 바이온즉 이미 내리신 분부를 회수하시고 새로운 은총을 더는 베풀지 말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았다. 그리고 내사시랑평장사 김원정과 동지중추원사 왕무숭을 최충의 집으로 보내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그대는 태학의 영수로서 국정에 광채를 내었다. 누대의 임금들을 문필로 섬기어 문장으로써 나라를 빛나게 했으며 삼공의 지위에 있으면서 국정을 협찬한 공적이 또한 컸다. 이제 비록 관직에서 물러가지만 지난날의 공적을 잊을 수 없다. 다시금 재상의 직품에 올리고 아울러 녹야당(綠野堂-당나라 때 배도裵度의 별장) 같은 영예를 베풀고자 이제 그대를 내사령으로 임명하는 동시에 치사를 허락하는 교지 1통을 주며 아울러 웃, 띠, 은그릇, 채단, 돈, 안마 등을 준다."


또 왕이 그에게 준 관고(官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진 신하를 얻는 것은 성스러운 일이다. 그러므로 요 임금은 8명의 인재(八元)를 들어 썼고 선비를 얻는 나라는 융성한다. 때문에 주나라 왕실에서는 네 명의 현인을 맞이하였다. 그들에게 재상 자리를 주고 그들의 충직한 계책을 채납하여 왕정을 빛나게 하였으며 그들로부터 현명한 보좌를 받아 임금의 지모를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백성들을 문명하고 평화롭게 만들었으며 영원 무궁한 국운을 유지하였다. 만일 우리 나라에서 이런 현철한 옛사람들에게 견줄 수 있는 자 그 누구인가? 고한다면 나는 그런 사람을 얻었노라고 말하겠다. 그대는 침묵하고 성실하며 해박하고 명철한 성품을 타고 났다. 목숨을 내놓고 곧을 말을 하는 점에서는 당웅(唐雄)이나 네형에게 비할 만하고 양(梁)나라 때의 주이(失異)와도 같이 누거만의 부를 가졌으며 진(晋)나라 조정의 극선과도 같이 과거에 장원 급제하였다. 다능하기로는 숙향(叔向)을 능가하며 박식하기로는 장화(張華) 또한 무색할지로다. 과거에 급제한 후 옥당에 뽑히었다. 나는 헌원씨(軒轅氏)의 어진 신하 만날 꿈(吹塵夢)이 맞은 것처럼 어진 인재인 그대를 맞이하였고 그대는 주(周)나라 태사 윤씨(尹氏)와도 같이 만백성의 첨앙을 받고 있다. 내각같이 추대하였고 학궁의 영수로선 선비들이 그대를 위서(魏舒)처럼 칭찬하였다. 이리하여 그대는 군신 화합의 영예를 크게 지니었으며 국정의 기미를 모두 다 살피고 선처하였다. 근자에 그대는 연치도 그다지 노모한 편은 아니며 건강도 그렇게까지 노쇠하지는 않았는데 중요한 관직에서 일찍 물러가 은퇴 생활할 것을 원하고 있다. 그대는 비록 당나라 하지장(賀知章)처럼 벼슬에서 은퇴하고 호숫가에서 자연의 풍경을 즐기며 양나라의 도홍경(陶弘景)마냥 산중에서 거처할지라도 나라의 중요한 정사에 대해서는 언제나 자문(諮問)에 응하기 바란다. 지난날엔 만백성의 모범으로 활동하였다면 오늘엔 온 세상의 스승으로 되었다. 만일 가장 높은 관직으로 승진시키지 않는다면 무엇으로써 그대의 훌륭한 공덕을 표창할 수 있으랴? 그래서 중서성의 최고 관직에 그대를 임명하노라. 아! 재능에 따라 관직을 주는 것은 임금으로서 응당 베풀어야 할 은총이므로 나는 이를 아끼지 않는 바이며 정령을 논의하고 국정을 경륜하는 것은 재상의 중대한 직무인데 그대는 이 역할을 훌륭히 하였다. 더욱 보필하는 꾀를 다하여 태평한 세상을 만듦으로써 도당(陶唐)이나 주나라의 현신들만 못지 않게 되기를 기대하노라!" 그 후 관제 개정으로 인하여 내사 문하성을 중서 문하성으로 개칭하였으므로 최충을 중서령으로 임명하고 치사를 허락하였다.



최충이 공신칭호를 받은 순서는 추충찬도(推忠贊道) → 추충(推忠) 찬도(贊道) 협모(協謀) 동덕(同德) 치리(致理)

추충(推忠) 찬도(贊道) 좌리(佐理) 동덕(同德) 홍문(弘文) 의유(懿儒) 보정(保定) 강제(康濟)를 더해 갔습니다.


퇴직후에도 문종은 군사상 큰일은 모두 최충에게 의견을 구하기도 하였는데요, 

실상 최충은 은퇴후에도 13년동안 제2의 인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거란과의 전쟁을 수차례 겪었던 현종조부터는 군사적으로 여러부분을 정비하느라 상대적으로 문에 대한 교육이

소홀하였는데요, 최충은 은퇴후에 후진들을 불러모아 가름침을 시작 하였습니다.

물론 국초부터 국자감(國子監)이라는 국립대학?이 있긴 하였는데, 이때만 하더라도 교육이 부실했나 봅니다.

최충의 명성을 듣고 찾아오는 학생들이 점차 많아져, 최충의 집에는 양반자제와 일부 평민의 발길이 끊기질 않았다고 합니다.

이에 최충은 사재를 털어 9개의 학당을 만들게 됩니다.

9재(齋) 학당 : 낙성(樂聖),대중(大中),성명(誠明),경업(敬業),조도(造道),솔성(率性),진덕(進德),대화(大和),대빙(待聘)

9재 출신 학생들의 과거급제가 국자감을 능가하자, 과거에 급제할려면 먼저 9재 학당에 입학하여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지요. 

여름철에는 시원한 귀법사(歸法寺)의 승방(僧房)을 빌려, 9재 출신으로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벼슬하지 않은

학식이 풍부한 이를 골라 교도(敎導)로 삼아 학생들을 가르치게 하였습니다.


최충은 학생들과 더불어 시를 읊으며 술잔을 기울리기도 하였는데요.

과거에 급제한 선배들이 학당을 방문하면, 초에 금을 그어 불을 부친후 그시간안에 시를 짓게 하였는데

글에 상하를 두어 순서대로 자리를 배치하여 온종일 시를 지으며 술자리를 하였다고 합니다.

이를 두고 많은 이들이 예의 있는데다가 아름답다고 하여 찬탄하였다고 하네요.


최충의 9재 학당 출신을 최충의 시호를 따라 문헌공도(文憲公徒)라고 하였으며

최충를 따라 11명의 유신들이 은퇴후에 서로 학당을 개설해, 

이후부터는 사학이 관학을 능가하게 되어 과거에 급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12도에 들어야만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 사학이 최초로 시작되고 융성 한때가 바로 이시기라고 합니다.


고려사는 최충을 해동공자라 극찬하기도 하였습니다.


고려사 최충 열전中

과거를 보려는 사람이 모두 9재에 적(籍)을 두니, 문헌공도(文憲公徒)라고 하였다. 또 유신(儒臣) 중에 도(徒)를 둔 자가 11명이 있어 세상에서 12도라고 일컬었으나 충의 도가 가장 성하였다. 동방에 학교가 일어난 것은 대개 최충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당시에 그를 해동공자(海東孔子)라고 하였다.


84세 되던 문종22년 (1068년) 9월에 최충은 향년 84세로 졸하게 됩니다.

       문종은 최충 사후에 수태사(守太師/종1품 3사중 1위)와 중서령(中書令/종1품)를 내려주고

       최충의 아들 최윤선(惟善)에게 조문의 조서를 내리게 됩니다.


고려사中

"그대의 아버지는 무리에서 뛰어난 인물이요, 조정의 귀중한 보배였다. 당세의 으뜸가는 문장으로 일찍이 재상의 직위에 등용되어 나라 다스리는 큰 포부를 발휘했으며 여러 대 왕조에서 세운 위훈은 역사에 길이 빛나리도다. 그리고 중서 문화성의 높은 직위에 올랐을 때에 이르러서는 그 남은 경사를 벼슬 길에 나선 자손들에게 물려 주고 자기는 구장(鳩杖)을 받아가지고 한가한 은퇴 생활로 돌아가 거문고 뜯기와 책 읽기를 즐기면서도 일상 임금을 향하는 일편단심은 변한 바 없고 믿음직한 나라의 기둥이 되었더니 아! 뜻밖에 세상을 떠났으니 슬프고 애석한 마음 한량 없다. 그대들은 불행히 친상을 당하였으니 얼마나 애통하겠는가? 장례 범절에는 효성을 다하되 지나치게 애통하여 건강을 해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시호는 문헌(文憲)이며 선종3년 (1086년) 정종(靖宗) 묘정에 배향되었습니다.



P.S) 금석문중 최충이 찬한것들중
       -거돈사원공국사승묘탑비(居頓寺圓空國師勝妙塔碑)[현종16년(1025년) 건립]이 전해지고 있으니
       - 봉선홍경사사적갈비(奉先弘慶寺事蹟碣碑) [현종17년(1026년) 건립)]

P.S2) 글이 너무 길어 보기 힘드실겁니다.^^; 제글이야 워낙 재미도 없고, 많은분들의 관심분야에서도 빗겨간 부분이라
        여하튼 관심 있는분께 눈요기라도 되었으면 하네요.
        요즘에는 글하나 작성하는데도, 몇달씩 걸리네요. 40이 넘어가니 확실히 머리회전도 안되고 체력도 안되네요.

- 3대시중 이자연(李子淵)에 대해 알아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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