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문종이야기(20) 흑수말갈인으로 재상이 된 고열(高烈)

 고려 문종조 이야기를 틈틈이 하고 있는데요,

오늘은 드물게 흑수인으로 고려 조정에 출사해 재상까지 오른 고열(高烈)을 소개 드릴까 합니다.



고려사절요 문종10년 (1056년) 윤3월 기사中

을유일에 수사공(守司空)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로 치사한 고열(高烈)이 졸하였다. 열은 흑수(黑水) 사람으로 활을 잘 쏘고 

여러 차례 전공을 세운 당시의 명장이었다. 그가 죽자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으며, 

왕은 사흘 간 조회를 중지하고 백관들로 하여금 장례에 참석하게 했다.


흑수인의 고려 내투는 고려초 태조조부터 기록에 나타납니다.

태조 4년(921년) 4월에 흑수(黑水)의 추장인 고자라(高子羅)가 일족 170명을 이끌고 투항해 왔습니다.

일리천 전투에서는 흑수인들은 유금필 휘하의 기병 9500인에 포함되기도 하였는데요.

태조이후부터 목종조까지는 흑수인에 관한 기록이 없습니다.

이후 현종중기(1017년)부터 다시 흑수인의 입조 및 내투가 시작되는데요.

고열의 나이를 감안하면 현종조에 고려에 온것 같지 않고, 고려초 내투한 고자라의 후손이 아닐까 짐작이 되네요.



고열이 고려사에 처음으로 기록된 것은 정종7년(1041년) 11월입니다.

이때 받은 품계가 1품 2위급 중대광(重大匡)으로, 시중 서눌(徐訥)과 같은 품계였습니다. 

단, 중대광은 공신등에게 내리던 향직의 품계로 실직인 백관 등급에는 해당하지 않았지요.

즉 어떤 공을 세워, 서눌을 포함해서 5인이 중대광에 임명된 것입니다.

이때의 관직은 1047년 고열의 후임으로 상서우복야에 임명된 위정(韋靖)을 통해 유추할수 있습니다.

1041년 당시의 위정의 직급은 무신으로 대장군직에 있었음으로, 고열 또한 대장군 내지 상장군 정도였던듯 싶네요.


공식적으로 고열의 품계를 알수 있는 기록은 정종10년(1044년) 11월입니다.

1044년은 덕종2년(1033년)부터 시작된 천리장성이 드디어 완성되던 해로, 

1044년 10월에 장주(長州 ), 정주(定州), 원흥진(元興鎭) 3성을 쌓음으로서 마무리가 되지요.

이때 고열은 섭병부상서(攝兵部尙書)로 병사들이 성을 쌓을때, 이를 방해하는 적이 나타나면 출전하여 공을 세운 모양입니다.


섭은 임시직으로, 정식 병부상서에 임명되기전 일시적으로 붙는 명칭입니다.

병부상서는 정3품으로, 오늘날로 따지면 국방부차관급 입니다.

병부의 수장은 병부판사(兵部判事) 혹은 판상서병부사(判尙書兵部事)로 2품이상의 재상이 겸직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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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흔희 재상은 재(宰), 추(樞)를 뜻하며, 종2품 이상을 말합니다. 

       문종조 재추회의의 정원은 약 16인 정도 되었습니다. 

       (5재7추등 의견이 다양합니다만, 문종조 법제상으로 2품이상은 16인입니다. 겸직하기도 하였습니다.)


문하부 

문하시중1 종1품

내사시랑평장사1, 문하시랑평장사1, 내사평장사1, 문하평장사1 정2품

참지정사1 종2품

정당문학1 종2품

지문하부사1 종2품


상서성

좌복야1, 우복야1 정2품

지성사1 종2품


밀직사

판원사1, 원사2, 지원사1, 동지원사1 종2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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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장성이 완성되자, 동북면병마사 김영기(金令器)는 3성을 쌓는데 공을 세운 장졸들의 진급을 정종에게 건의하면서

섭병부상서 고열의 포상 또한 건의합니다.

동북면병마사도 정3품으로 병부상서와는 거의 동급입니다.



고려사 정종10년(1044년) 11월 기사中

을해일. 병마사(兵馬使) 김영기(金令器)가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이번 장주(長州 : 지금의 함경남도 정평군)·정주(定州 : 지금의 함경남도 정평군 정평)와 원흥진(元興鎭 : 지금의 함경남도 정평군 정평면 원흥리)에 성을 쌓는 일이 단시일에 끝나게 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수고한 덕분입니다. 축성을 감독한 주진(州鎭)의 관리 가운데 1과의 7품 이상은 정직(正職) 1급씩을 특진시키고 그 부모에게도 작위를 주며, 1과의 8품 이하는 정직 1급씩을 특진시키고 그에 맞게 품계를 올려주며, 2과는 정직 1급을 올려주고 품계도 1등급 올려주십시오. 또한 세 성(城)이 위치한 지역은 본래 적의 소굴로서 그들이 침략해 올 것을 우려한 나머지 병마사 휘하의 부대를 요해처에 분산 배치해 수륙 양면에서 적이 접근하지 못하게 방어하고 있습니다. 해당 군사 가운데 1과의 별장(別將) 이상은 정직 1급씩을 특진시키고 부모에게도 작위를 주며, 대정(隊正) 이상은 정직 1급과 향직(鄕職)을 모두 특진시키고 군인은 향직 1급씩을 특진시켜 주십시오. 2과의 대정 이상 및 선두(船頭)3)는 정직과 향직 1급을 올려주며 군인 및 초공(梢工)4)과 수수(水手)5)는 향직을 올려주고 차등을 두어 물품을 내려주십시오.

축성 당시 출전해 전공을 세운 1과의 섭병부상서(攝兵部尙書) 고열(高烈) 등 10명, 차1과의 소부감(小府監) 유교(柳喬) 등 5명, 그리고 2과의 대악승(大樂丞) 정패(鄭覇) 등 5명에게도 포상을 하심으로써 뒷날의 모범으로 삼으소서.”


고려사절요 정종10년(1044년) 11월 기사中

11월에 동북면 병마사 김영기(金令器)가 아뢰기를, “지금 세 성을 쌓는데 며칠이 안 되어 다 마쳤으니, 그때 역사를 감독하던 주ㆍ진의 관리들에게 작상을 주어야 마땅하고, 또 세 군데 성을 쌓은 땅이 원래 적의 소굴이어서 침입할까 염려하여 요해마다 둔을 설치하고 뭍과 육지를 막아서 적이 얼씬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그 군사들 역시 포상하여 칭찬해야 하며, 성을 쌓을 때에 나가 싸워 공이 있는 병부상서 고열(高烈) 등에게도 역시 특별히 포상하여 뒷사람을 권장하소서." 하니, 따랐다.


 



병부상서에 오른 고열은 3년후 문종이 즉위하자 그해에 드디어 재상에 임명됩니다.

문종원년(1047년)에 정2품의 상서우복야에 오른것이지요.


고려사 문종원년(1047년) 4월 기사中

을축일. 무신(武臣) 고열(高烈)을 수사공(守司空)·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로, 하흥휴(何興休)를 수공부상서(守工部尙書)로 각각 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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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공은 3사3공 중 하나인 사공이지만, 명예직이였습니다. 문종조에는 재상이나 왕족들이 임명되었지요.

[3사 태사, 태부, 태보 / 3공 태위, 사도, 사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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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7년에 수사공, 상서우복야에 임명된 고열은, 그 직위에서 치사(70세 이상시 은퇴)하였으며 1056년에 졸하지요.

고열의 치사년도는 문종3년(1049년) 3월에 단행된 조정인사에서 위정(韋靖)이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로 임명 되었음을 

감안하면 유추할수 있습니다.

또한 문종조에는 현직으로서 겸임한 3사3공의 정원은 1인으로 하였는데, 
1049년 2월에 최충을 수태보, 이자연을 수사도, 왕총지를 수사공으로 임명하게 됩니다.

즉 1049년 2월 이전에 고열이 치사했음을 알수가 있습니다. 
보통 치사는 69세 되던해의 년말에 시행됨으로 1049년이 70세임을 짐작할수가 있습니다. 
즉 생년이 980년으로 추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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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열의 관직변화


62세 1041년 향직 중대광, 관직은 상장군(정3품) 내지 대장군(종3품)으로 짐작됨


65세 1044년 섭병부상서(정3품)로 천리장성 완성에 공을 세움


68세 1047년 상서우복야 (정2품)수사공


70세 1049년 상서우복야로 치사


77세 1056년 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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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현종이후 문종대까지 고려사에 기록된 흑수말갈의 내투 및 입조 기록입니다.



1017년 흑수말갈(黑水靺鞨) 아리불(阿離弗) 등 6명이 와서 의탁하니 강남의 주ㆍ현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1019년 동흑수(東黑水)의 추장 구돌라(仇突羅)가 와서 말과 병기를 바쳤다.

1020년 흑수말갈(黑水靺鞨)의 알시경(閼尸頃)ㆍ고지문(高之門) 등 24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흑수말갈 오두나(烏頭那) 등 70여 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1021년 흑수말갈의 추장 아두타불(阿豆陀弗) 등이 와서 말과 활ㆍ화살을 바쳤다.

          동여진 흑수(黑水)의 추장 거울마두개(居蔚摩頭盖)가 왔다.

          흑수말갈의 소물개(蘇勿盖)와 고지문(高之門)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1022년 흑수(黑水) 추장 사일라(沙逸羅)ㆍ만투불(曼投弗) 등이 내조하였다.

          흑수말갈 소의(疎意) 등 30여 명이 내조하였다.

          철리국의 추장 나사(那沙)가 흑수의 아부간(阿夫間)을 보내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1023년 흑수말갈의 오사불(烏沙弗) 등 80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니 각기 포백을 내려주었다.

          흑수의 추장 야힐라(耶肹羅) 등이 내조하였다.

1024년 흑수말갈의 고도매(古刀買) 등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흑수말갈의 아리고(阿里古)가 왔다.

1027년 흑수말갈의 귀덕대장군(歸德大將軍) 아골아가(阿骨阿駕)가 와서 말과 가물ㆍ무기를 바쳤다.

1064년 거란의 고로(高奴) 등 3명과 흑수(黑水)의 포기(包棄) 등 8명이 와서 의탁하였다.

          제하기를, “흑수(黑水) 통역 고가서로(高加西老)가 동번을 타일러 우리의 주ㆍ현으로 되게 하였으니, 

          그 공으로 감문위산원(監門衛散員)을 제수하고 맹이라는 이름을 내려준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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