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요사, 금사, 거란국지, 송막기문, 중국고대지명대사전 등등
때는 1114년 8월, 요의 영강주의 병력 규모를 파악한 아골타는 황천후토에 제사를 지내며
대요 전쟁을 선포한다.
즉각 아골타는 각 지역으로 사신을 파견한다.
1. 파로화(婆盧火)는 갈라전(두만강과 함경도 일대) 지역으로 가서 군을 징병하여 오라!
2. 알로고(斡魯古)와 아로(阿魯)는 요 국적의 숙여진으로 가서 그들을 회유하라!
3. 실부질(實不迭)은 달로고부로 가서 요의 매 조공관과 협조하는 여진인을 잡아오라!
또한 영강주의 발해인 대가노(大家奴)를 잡아오라!
1114년 9월 완안부 직속병 1천 정도로 영강주로 진군을 개시한다.
여진군이 영강주로 진군한다는 소식을 들은 정강군절도사(靜江軍節度使) 소달불야(蕭撻不也)는
영강주에 4개 지역의 병력을 끌어모으고, 천조제에게 급보를 알린다.
당시 천조제는 경주(慶州)에서 사냥 중이었는데,
이를 듣고는 해주자사(海州刺史) 고선수(高仙壽)에게 발해인 3천을 이끌고 응원하라 명한다.
※ 지명의 현재 위치는 중국 고대지명백과사전 등을 참고
-해주(海州)
→ 현 요령성(遼寧省) 해성현(海城縣)으로,
요사 지리지에 따르면 동경(東京) 예하의 주(州)로 장정은 3천 명이다.
-경주(慶州)
→ 현 내몽고 적봉시(赤峰市) 임서현(林西县)으로,
요사 지리지에 따르면 상경(上京) 예하의 주(州)로 장정은 1만 2천 명이다.
-영강주(寧江州)
→ 현 길림성(吉林省) 부여현(扶余縣)
-여진 완안부
→ 현 흑룡강성(黑龍江省) 아성시(阿城市)
-동경(東京)
→ 현 요령성(遼寧省) 요양시(遼陽市),
요사 지리지에 따르면 예하 현을 총합하여 장정 4만 1400 명이다.
-요회성(寥晦城)
→ 현 흑룡강성(黑龍江省) 쌍성(雙城) 일대
-내유수(來流水) : 현 납림하(拉林河)
아골타는 요회성(寥晦城)에 머물며 사신을 파견하였던 일들에 대한 보고를 듣는다.
→ 결과
1. 파로화는 갈로전에 갔다 와서 징병하지 못하였다고 말함 → 곤장 때린 후 다시 독촉하러 보냄
2. 계요적 여진, 즉 숙여진은 무응답 → 1116년 5월에나 되어야 항복함
3. 달로고부에서 사람이 와 완안부와 요 중 아직 선택하지 못하였다고 말함
→ 아골타는 알아서 선택하라 함
즉, 이때만 하더라도 아골타의 대요 전쟁에 대한 여진 각 부족의 참여는 미미하였다.
생여진 부족의 총 병력은 약 3만 내외로 필자는 보고 있는데,
찰지수 전투에서 갈라전과 두만강 유역의 생여진의 참여는 없었고,
완안부와 그 주변 부족의 2500 명만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각지에서 모인 2500 병력으로 아골타는 요회성을 나와 내유수(來流水)로 진군하여
천지에 고하고 맹세를 한다.
장수들에게 몽둥이를 나눠주며, 역시 천지에 맹세케 하고는 맹세를 어길 시
몽둥이로 일족을 모조리 죽이겠다고 말한다.
또한 노비→평민, 평민→관리, 관리→진급을 약속하여 군의 사기를 올렸다.
맹세를 마친 여진군은 대알갑(帶斡甲)으로 향한 후, 그곳에서 액운을 쫓는 화살 쏘기를 거행한다.
군의 사기를 올린 아골타는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다음날 아침 드디어 찰지수(紮只水)에 이르러 도강을 결심한다.
우선 종간(宗幹)을 시켜 찰지수를 건널 수 있게 평탄 작업을 한 후, 전군이 찰지수를 건넜는데
곧장 요의 선봉 고선수의 발해군 3천과 조우한다.
당시 여진군의 좌익은 7모극, 700명이었는데 발해군은 여진군의 좌익을 맹렬히 공격하기 시작한다.
점차 좌익이 물러나고, 발해군이 중군을 공격하기 시작하자
여진 중군의 사야(斜也)와 철질(哲垤)이 급히 말을 몰고 발해군으로 돌진하였으나,
아골타는 종간을 보내 급히 두 장수를 회군시킨다.
마침 발해군을 따라 요의 본군의 장수인 야율사십(耶律謝十)이 아골타의 중군에 난입하자,
여진 본군에서 화살을 날려 야율사십을 낙마시킨다.
거란 장병들이 야율사십을 둘러싸자 이에 아골타는 직접 본군을 이끌고 돌격하여
야율사십을 죽이고 난전에 돌입하게 된다.
야율사십을 죽이고 난전에 돌입하게 된다.
아골타는 투구를 버리고 직접 적진으로 뛰어들어 위기에 처한 종간을 구출하고
자신에게 활을 쏜 장수 하나를 화살 하나로 쏘아 죽인 후
여진 병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외친다.
「盡敵而止。」
「힘을 다해 적을 멈추게 하라.」
금사에 따르면 이 한마디에 여진 병사들이 용기가 배가 되어 싸웠고 곧 발해군을 대파하였다.
전투 결과 금사에는 적들이 도주하다가 서로 짓밟혀 죽은 자가 70~80%라고 기록되어 있고
요사에는 살아 돌아온 자가 얼마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요의 군세는 정확하게 기록된 것이 고선수가 이끄는 발해병 3천과
영강주 4개 지역에서 끌어모은 정강군 지역의 소달불야가 이끄는 수천 정도가 되겠는데
거란국지와 금사에서는 주력이 발해병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소달불야가 이끄는 거란병은 3천이하로 보인다.
즉 영강주 동쪽 찰지수 전투에 참여한 요의 군세는 약 3천~6천 정도로 생각되며
이에 따라 금사로 추정하여 퇴각하다 짓밣혀 죽은 자는 2100~4800 정도로 짐작된다.
남은 900~1200 명은 초기에 싸우다 죽은 자가 대다수였을 것으로 짐작되며
살아 돌아온 자가 거의 없다는 요사에 따라 약 100~200 명 정도가 살아 돌아간 것은 아닐까 짐작된다.
결론적으로 요의 3천~6천 병력은 초기에 발해군 3천의 돌격으로
여진 좌익 700을 맹렬히 몰아붙였으나 반격을 노린 아골타의 돌격으로
약 1천 명 내외의 전사자가 발생하자
나머지 2100~4800명은 우왕좌왕 퇴각하다가 서로 짓밟혀 죽은 것으로 보인다.
여진 vs 요 #1 전투 영강주 찰지수 전투
병력 : 여진 2500 vs 요 3000~6000
결과 : 여진 압승
요 전사자 : 최소 2900~5800 명
P.S) 훗날 영강주 전투를 기념하여 금은 영강주에 대금득승타송비(大金得勝陀頌碑)를 건립합니다.
비문은 여진문자가 기록되어 있어 귀중한 자료라고 하네요.
아래는 찰지수 전투 승전 비문이라고 합니다. 여진문자가 거의 한자로 보이네요.^^;
P.S2) 찰지수의 위치를 대략적으로 찾은 것 같습니다.
앞서 말한 대금득승타송비(大金得勝陀頌碑)가
현 길림성(吉林省) 부여시(扶余市) 서가점향(徐家店鄉) 위자촌(崴子村) 동쪽에 있다고 합니다.
요사에 영강주 동쪽이라고 하는데, 비문은 거의 영강주 서북쪽에 건립되어 있네요.
위자촌 부근에 조그만한 하천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찰지수가 아닐까 싶네요.
<대금득승타송비(大金得勝陀頌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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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영강주성 전투에서 계속됩니다.-
P.S) 본 글은 동의 없이 어느 곳에나 담아 가셔도 됩니다. 출처는 남겨주시면 고맙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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