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 196년 겨울.
그 해는 지중해 세계를 둘러싼 포에니 전쟁이 끝난지도 벌써 6년이 지날 무렵이었다. 혹자들이 말하는 '한니발 전쟁' 이라는 표현처럼, 그 전쟁은 오직 '한니발 바르카' 라는 역사상 그보다 유명한 사람을 찾기도 힘든 하나의 사나이에 손에서 시작되어 그 마무리에 이르도록 모든것이 좌지우지되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선 그도 자마에서 패배하여 무너진 전설이었다.
한니발의 신화가 마무리된 BC 202년은 항우(項羽)가 자결하였던 바로 그 해였다.
항우…… 일찍이 거록(巨鹿)의 싸움에서 진나라 군을 몰락시키고, 팽성(彭城)에서는 56만의 한(漢) 군을 쓸어 담듯 잡아 죽였으며, 천하를 손에 넣고, 스스로 서초패왕(西楚覇王)이라 자처한 사내. 천하를 갈라 왕들을 봉하고, 그 모든 왕들을 꿇어 엎드리게 한 지배자. 힘은 산을 들어 올리고, 전투에 있어 패배하지 않으며, 기세는 바다를 뒤덮을 위인.
일찍이 위대한 관찰자인 사마천(司馬遷)은 항우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했다.
가까운 과거 이래, 이런 인물이 없었다. (近古以來 未嘗有也)
그러나 지금의 천하는 항우가 죽은 천하다.
그리고 그 해는 한 고조(高祖) 12년이기도 했다. 고조 12년, 한나라 황제 유방(劉邦)은 견(甄) 땅에서 경포(黥布)의 반란을 격파해야 했다. 쉬운 싸움은 아니었다. 경포는 잔뼈가 굵은 무장이었고, 황제의 수하 중에는 그를 대적할만한 장수들이 많지 않았다. 팽월(彭越)과 한신(韓信)은 이미 죽었다.
황제는 그들을 직접 죽이지는 않았지만, 유방 자신으로서도 알고 있었으리라. 그는 그들을 죽음으로 밀어 넣었다. 자신은 그들을 죽인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유방은 경포의 토벌에 직접 나서려 하질 않았다. 마침 그는 병을 앓고 있었으므로, 어떤 불안감이 머릿속을 감돌았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팽월이나 한신이 살해된 지 일 년도 지나지 않았다. 황제는 그들에게서 자신을 비춰 보았을까? 그는 경포 토벌의 임무를 태자에게 넘겼다. 그러자 반응은 즉시 나타났다. 여후(呂后)는 즉시 달려와 베갯머리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황제의 인사를 비난하고, 태자에게 자비를 기원했다.
'경포의 용병(用兵)은 실로 귀신과 같고, 여러 장수들은 황제의 옛 친구들로서 사나운 이리와 같다, 그들을 다스리려면 황제가 직접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병 중이라고 하지만, 수레에 올라 누워서라도 지휘를 해야 한다.'
지독한 여자다. 저 여자는 태자를 정치적으로 보호하여, 자신의 안위를 꾀하는 것이다. 필시 그렇게 생각했으리라 보이지만, 유방은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그 조무래기가 시원치 않으니, 당신 남편이 나서야겠군. (吾惟豎子固不足遣,而公自行耳)"
그는 내키지 않으면 않는 데로 일부러 더 허세를 부렸다. 예전부터 몸에 밴 태도였다.
미묘한 느낌 ─ 혹은 그저 미묘하다고 느끼고 싶을 뿐인 죽음의 느낌은 장량(張良)의 얼굴을 보았을 때 한층 더 강렬해졌을 수 있다. 황제의 출정에 당연히 여러 신료들은 그를 전송하기 위해 나왔는데, 그 자리에 불려 나온 장량의 안색은 거진 시체의 그것이었다. 하지만 장량은 가히 억지로 몸을 움직여 곡우(曲郵)까지 마중하였다. 여러 기록에서 보이는 바로, 유방은 장량이라는 사람을 좋아했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하다가도 타오르는 불꽃처럼 열정적인 양면을 가진 사람이 바로 장량이었다.
병든 남편을 전쟁터로 밀어 넣는 아내와 죽어가는 책사를 등 뒤에 두고 나선 유방은 격렬한 싸움을 벌였고, 바라던 승리는 얻었지만 영광스럽지는 못 했다. 전장의 눈먼 유시(流矢)는 황제의 몸을 맞췄으며, 이러한 외상에 대해 속수무책일 정도로 조악한 것이 고대의 의술이다. 덧난 상처는 이미 죽어가는 유방의 몸을 절벽 끄트머리로 밀어 넣었다.
그러나 유방은 종말이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이후의 태도에서 보이듯 별다른 두려움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나는 일개 평민의 몸으로 태어나, 삼척의 칼을 잡고 천하를 평정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천명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목숨은 곧 하늘에 있다. 비록 편작(扁鵲)이 온들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吾以布衣提三尺劍取天下,此非天命乎. 命乃在天,雖扁鵲何益"
하잘것없는 평민에 불과했던 자신이 황제가 되었다. 이것은 천명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유방은 그렇게 생각했다. 천하를 취한 것도 천명이라면 수명도 천명이니, 그 어떤 명의를 불러와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며 그는 달관했다. 틀림없이 난세의 대혼란 속, 하늘 높이 날아오른 자신의 일생이 그러한 사고방식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들' 이 살고 있던 시대는 기이하면서도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진 시대였으며, '그들' 이 영위해 온 삶 역시 결코 평범한 삶이 아니었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이 살아남았다면, 그건 틀림없이 하늘의 명운이리라.
그런 생각 때문이었을까. 유방은 패현(沛县)으로 가자고 했다. 패현이 있는 강소성(江苏省)은 경포와 싸움을 벌인 안휘성(安徽省) 에서 동쪽에 있다. 제국의 수도는 서쪽에 있으니, 돌아가자고 하면 강소를 거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방은 패현을 향했다.
패현. 고향이며, 모든 것이 시작된 곳.
그곳을 있었을 적 유방은 일개 한량이었으며, 그곳을 떠날 적엔 미래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시기였다. 진이세(秦二世) 2년인 BC 208년, 그는 옹치(雍齒)의 배반으로 풍읍(豐邑)을 잃고 쫓겨나듯 패 땅을 떠났다. 그로부터 12년. 유방은 황제가 되어 귀환하였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패현에는 옛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패의 부형(父兄)들, 제모(諸母)들, 그리고 옛 친구들. 그들을 보면서 유방은 무슨 생각을 하였을 것인가? 그 아련하고 벅차오르는 내심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의 행동으로 추측은 가능하다. 유방은 고향 사람들과 날마다 즐겁게 술을 마시며 마음껏 즐기고, 옛날이야기를 하면서 웃으며 기뻐했다. (沛父兄諸母故人日樂飲極驩)
유방은 고향으로 돌아왔다. 옛 친구, 부형, 제모들과 마음껏 기쁨을 나누었다. 자신보다 나이 많은 남성은 부형이고, 여성은 제모이다. 마을 사람들은 가족에 빗대어 서로 이처럼 불렀다. 그들은 만사를 잊고 즐기면서, 술과 옛날이야기, 그리고 노래와 춤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황제와 귀인의 예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이야기를 할 소재는 무궁무진했을 것이리라. 저 옛날 유방에게 속거나 속았던 자, 유방과 맞붙어 드잡이를 한 자, 술에 취한 유방의 외상술을 내주던 자, 관청에 추궁에 그럴싸한 거짓말을 하며 유방을 도왔던 자. 생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아련해지는 이야기들.
천하를 평정한 사내로서 고향에 돌아온 다는 것은, 그러한 이야기다. 항우의 금의환향(錦衣還鄕)은 조롱의 대상이지만 항우에게 있어서도 '고향에 돌아온다.' 는 행위는 적지 않은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이백여 년의 세월이 흐르고,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 역시 천하를 평정하고 반란을 진압한 후 고향에 돌아왔다. 고향인 용릉(舂陵)은 장릉(章陵)으로 이름을 바꾸었지만, 일족은 바로 그곳에 있어 연회를 베풀고 즐겼다.
이때 친척인 나이든 여인들이 다음과 같은 말을 주고받았다고 전해진다.
"문숙(文叔)은 어렸을 때 조심스러워서 남과 허물없이 사귀지 않았다. 그저 유(柔) 하기만 했는데, 지금도 여전히 똑같구나."
광무제는 호쾌한 척하며 다른 사람과 속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일 따위는 할 수 없었다. 남과 사귈지라도 오로지 수동적인 자세만을 취했다. 그런 사람이 용케도 황제가 될 수 있었다고, 아주머니들은 감탄도 하고 이상하게도 생각했던 것이다. 광무제는 그 말을 듣고 크게 웃으며,
"나는 천하를 다스리는데도 역시 유(柔)의 도(道)로써 이를 행합니다."
라고 말했다는 기록을, 『후한서』(後漢書)에서 볼 수 있다. 광무제 유수(劉秀)와 유자(儒者)를 보면 관을 벗겨 거기에 오줌을 누었다는(諸客冠儒冠來者,沛公輒解其冠,溲溺其中) 유방은 기질에 있어 천양지차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 씨 성을 가진 사내로서 무언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 유 씨 성을 가졌다기보다는 천하를 평정한 사내로서의 공통점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을 것이다.
끝날 줄 모르고 이어지는 옛 추억 속에서, 유방은 마을의 어린이 120여명을 선발하여 노래를 가르쳤다.
대풍(大風)이 일어 구름이 날아오른다. 大風起兮雲飛揚
위(威)를 해내(海內)에 떨치며 고향에 돌아왔는데, 威加海內兮歸故鄕
어디서 맹사(猛士)를 얻어 사방을 지키게 할까. 安得猛士兮守四方
대풍이 일어 구름이 날아오른다. 대풍은 난세를 말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구름은 자신까지도 포함한 영웅호걸이다. 세상이 어지러워 뭇 호걸들이 구름처럼 일어나 활약했으며, 자신의 위광이 천하에 미쳐 이리 경사스럽게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제 용맹스러운 대장부들을 얻어, 천하 사방을 지키게 하겠다.
조선 중종(中宗) 연간에 문신 민수천(閔壽千)은 이 대풍가(大風歌)에 대해 '천하를 평정하는 기세가 있다.' 고 말하였다. 확실히 그것은 천하를 평정한 사내이기에 할 수 있는 웅대한 노래였으며, 그 일을 끝내고 고향에 돌아와 부른 노래이기에 더욱 마음을 자극하는 노래다. 설사 다른 장소에서 다른 사람이 똑같은 노래를 불렀다 한들, 그 기상은 비교조차 되지 않았을 것이다.
유방이 아이들에게 가르친 노래는 이 노래였다. 백 명이 넘는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을 들으며, 유방은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고 있었다. 춤이라고 하지만, 경망스러운 몸동작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는 강개(慷慨) 했다. 감격과 흥분에 겨워, 그리고 지난날의 기억과 지금을 떠올리며 눈물을 여러 갈래로 흘렸다. (慷慨傷懷,泣數行下) 명(明)의 이탁오(李卓吾)는 이에 대해 '영웅은 다감한 것인가' 하여 영웅 다감을 이야기 했다.
그렇게 눈물을 흘린 유방은 패현의 부형들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객지로 떠돌아다니는 사람은, 항상 그 고향을 그리워하는 법입니다. 내 비록 관중(关中)에 도읍을 정해 머물고 있지만 언젠가 죽게 되면 나의 혼백은 고향 패현을 그리워하며 찾아들 것입니다. 또한 나는 패공의 신분으로 출발하여 포학한 역도들을 주살함으로 해서 천하를 얻게 되었으니, 내 고향 패현을 나의 탕목읍(湯沐邑)으로 삼아 이곳의 백성들에게 부세와 노역을 대대로 면제하도록 하겠습니다." (遊子悲故鄉。吾雖都關中,萬歲後吾魂魄猶樂思沛。且朕自沛公以誅暴逆,遂有天下,其以沛為朕湯沐邑,複其民,世世無有所與)
탕목읍이라고 하면, 황제의 사적인 비용을 대는 것이다. 실질적인 부세는 감소하면서도, 그들에게는 '황제를 위한' 현이라는 영예가 뒤따랐다. 모두가 즐거워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유방은 10일간 패현에서 머물렀고, 패현 부형들의 설득으로 3일을 더 머문 뒤 겨울의 눈을 헤치며 장안으로 떠났다.
그는 이미 출정을 하기 전부터 병마에 시달리는 몸이었으며, 반란의 진압 중에 부상을 당한 몸이다. 자신의 몸 상태를 자신이 모를 리 없을 것이다. 장안에 돌아온 유방은 최고의 공신이라고 할 수 있는 소하(蕭何)를 의심하여 가두기도 했으며, 태자를 바꾸기 위해 마지막으로 시도했지만 적잖은 반대에 직면하자 낙담하고 포기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의 마지막을 준비했던 것이다.
겨울의 패현, 그 잔잔히 내리는 눈을 보며 유방은 인생의 마지막 만년을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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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하는 '초한전쟁' 연재 입니다.
글 내용에 쓸데없는 잡설이 많이 붙을 것 같으니 차라리 역사소설 보는 느낌으로 봐주시는게 더 나을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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