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통일 1년 후 태조에 대한 금석문

 후삼국 최후의 전투인 일리천 전투 1년 후인, 937년 8월 17일에 기록된 금석문

서운사(瑞雲寺) 요오화상비(了悟和尙碑)의 태조 관련 내용입니다.

 

요오화상은 평주박씨 출신으로 보입니다.

 

 

오관산(五冠山) 서운사(瑞雲寺) 화상(和尙)의 휘는 순지(順之)요, 속성은 박씨(朴氏)며, 패강(浿江) 사람이다.

할아버지 때부터 가업(家業)이 웅호(雄豪)하여 대대로변장(邊將)을 지냈는데, 마치 규화향일(葵花向日)처럼 충성스럽게 근무하는 호국(護國)의 아성일 뿐만 아니라 패강도호부(浿江都護府)에서 북방(北方) 변새(邊塞)를 수호함에 있어 없어서는 안될 명장(名將)이라는 칭송이 자자하였다. 그리하여경사스러운 위대한 업적(業蹟)을 지방 곳곳에 남겼던 것이다.

 

(중략)

 

깊이 생각해 보건대 대왕전하(大王殿下)께서는 날마다 상서로움을 나타내시고 용안(龍顔)에는 경사스러움을 보일 뿐만 아니라,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묘(妙)한 책략을 품었으므로

위급(危急)을 구하고 절망(絶望)을 소생시키는 영모(英謀)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므로 복된 명지(明地)를 얻어 (결락) 북궐(北闕)에 거존(居尊)하였고, 동명(東溟)에는 발자취가 두루 닿았다.
이 때 외역(外域)에서는 왕께 귀화(歸化)하는 공물을 올렸으며, 중화(中華)에서는 태조(太祖) 임금의 등극(登極)을 축하하는

사절이 오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서방(四方)으로부터는 도산(塗山)의 모임으로 찾아오고 삼천열국(三千列國)들이 함께 천토(踐土)의 동맹(同盟)에 참가하였다.


이러한 위력(偉力)을 갖추었으므로 암혈(岩穴)과 숲 속에 숨어있는 패잔병(敗殘兵)을 모두 소탕하였고
궁예(弓裔)와 견훤(甄萱)의 참모들인 전범자들을 모두 마진(馬津)에 몰아 놓고 문죄(問罪)하였다.

공손히 천명(天命)을 봉행하여 모든 갑옷과 무기를 버리고 한 손을 머리에 얹고 양을 이끌고 항복하여 오므로

모두가 평화롭게 농사지으면서 살게 되었다.


이로써 높은 영(靈)의 위력을 의지하고, 잠시 신용(神用)을 수고롭게 하여 먼저 원흉(元兇)의 악당들을 제거하였으니,

마치 위황(魏皇)인 조조(曹操)가 촉(蜀)나라 유비를 격멸한 것과 같다고 하겠다.

 

(결락) 오류(五流)의 형(刑)에 해당하는 죄인에게도 한결같이 사면령을 내려 석방하고 가택을 소유하게 하는 관용정치를 행하고, 백 가지의 일거일동 몸가짐을 오로지 정절(貞節)의 덕행으로 지켰으니,
이 모두가 숙세(宿世)로부터 조상(祖上)이 선인(善因)을 심었고, 선왕(先王)들이 음덕을 쌓았기에 그 자비의 인因이 후예後裔에게로 끼쳤으며, 그 복을 후손들이 입게 된 것이다.

 

 

전체적인 내용은 우리 임금님 최고 영웅 킹왕짱! 이런 내용입니다만
특이한 것은 고려초의 조조와 유비를 인용한 구절입니다.
고려초의 인식은 조조는 위황이고, 유비는 마군으로 표현이 되네요.
 
태조가 견훤이나 궁예를 친 것이, 조조가 유비를 친 것과 같다니
당시의 인식은 조조가 선이고, 유비가 악이었나 봅니다.^^
 
 
또 한가지 태조 당시만 해도 폐하가 아닌 전하를 사용하였다는 점이네요.
정확히 937년 8월17일이라는 음기가 적혀 있음으로 사서에 흔히 나타나는 후세 교정은 없었던 듯 보입니다.
태조의 건국 교지에도 궁예의 참칭을 비판하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미루워
태조의 즉위 전기간에 걸쳐 전하라는 호칭을 사용한 듯 보입니다.
대신 태조의 살아생전에도 대왕전하(大王殿下)라고 극존한 듯 보이고요.
 
[각종 금석문 등을 살펴보면 제 생각으로는 광종조부터 시작된 내제형태는
거란의 침략과 더불어, 송나라가 고려의 원군 요청을 회피한 후 덕종~문종조의 정착기를 거치다가
대륙 왕조의 교체기인 숙종~인종조에 절정을 맞이한듯싶습니다. 

이시기의 사적이나 금석문 등에 특히나 극존칭이 많이 눈에 띄네요.

예종조에 공식호칭에 대한 정리<성상폐하,태자전하,영공각하 등등>와 

인종조의 <신성제왕> 사용금지등의 일부 규제가 있었으나, 

왕족이나 귀족 간의 일상 대화의 극존현상은 무신정권 초기까지도 이어진듯싶습니다.
(이규보의 서신 등)]
 
 
그리고 또 하나, 궁예와 견훤의 참모들인 전범자들을 모두 마진현에서 문죄하였다는 구절은
혹 궁예의 측근들이, 궁예 몰락 후 백제로 귀순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하게 만드네요.
또한 마진현에서 문죄하였다는 구절은 역시 937년 건립된 광조사진철대사비(廣照寺眞澈大師碑)에도 나오는 구절인데요,
진철대사 이엄이 입적한 해가 931년이고, 이엄이 입적전에 태조를 알현코자 하였는데
마침 태조가 마진현(충남 예산 추정)에서 죄인을 문책하고 있는 바, 태조를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섰다가 노상에서 죽게 됩니다.

요오화상비의 마진현이 충남 예산을 뜻한다면 신검의 최후 항복지인 마성(현 익산/금마 추정)에서 논죄 후, 

다시 북상하여 예산에서 다시 추가 논죄를 하였을 가능성도 있을듯하네요.
하지만 문맥상으로는 마진현은 백제를 통칭하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에 또, 견훤은 고려로 귀순해 왕건이 상보로 존칭하며 극진한 대접을 해주었는데요,
금석문에는 견훤을 악인으로 묘사했다는 점입니다. 이때가 견훤이 죽은 지 채 1년이 안되는 시점인데도 불구하고
또 태조가 생존해 있었는데 견훤을 악인으로 묘사했다는 점입니다. (혹은 견훤의 무리들만 지칭하였을 수도있습니다만)
어찌 보면 태조가 진심으로 견훤을 존중하였다면, 신하가 감히 이런 글을 쓰진 못하였을 듯싶기도 하고요.
역시 태조는 견훤을 이용하였고, 그가 죽자 다시 적국의 수장 및 마군으로 되돌려 놓았다는 식의 해석이 가능할듯싶습니다.
 
궁예와 견훤을 악인으로 묘사한 것은 태조가 직접 진철대사와 나눈 대화에서도 "이흉" 이라고 나오는데요,

물론 이때는 견훤이 고려에 투항하기 전이였음으로 어느 정도는 감안해야겠지요.
 
 
P.S) 이 당시 각종 금석문 등에는 궁예 및 견훤의 무리를 마군(魔軍)으로 종종 표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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