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예종조 여진정벌 간략 상황요약 1부

 *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사강목, 금사, 송사, 동문선, 해동역사지리고, 세종실록지리지 등을 참고 하였습니다.

  일자 계산에 관해서는 1108년 이후로는 하루, 이틀 오차가 있을 수 있습니다.


-완안부 절도사 오아속의 영향력이 고려와의 접경 지역인 갈라전에 이름
-갈라전 부족민들 오아속을 거부하고 고려로 내투하자, 완안부 이를 저지하기 위해 석적환을 보냄 (병력 약 5백)
-금사에 따르면, 처음 고려로 내투한 성은 7개 성임
-1104년 1월에만 여진인 1753명이 고려 내지로 의탁하여 들어옴
-고려에서는 석적환이 보낸 (고려로 들어간 여진인 잡아오기 위한)사신의 입국을 거부하고, 단련사 14인을 구금함
-1104년 2월 고려 임간이 정주성 밖으로 출전하여 결전 → 패전 →여진군 정주 선덕관성(宣德關城) 침략 노략질
 (고려사에는 이때 여진장수를 추장 연개의 부장 지훈이라 기록/석적환으로 추정됨)

※ 참고사항 : 정주(定州 : 지금의 함경남도 정평군)의 병력구성(고려사 병지中)
-고려 동계에 편성됨
-정규군 37대(초군14대, 좌군13대,우군6대, 영새4대) 주둔함
-장교구성 : 도령(都領/현대령급)1 > 낭장4(현중령급) > 별장8(현소령급)> 교위16(현중위급)> 대정37명(현 소위급)
-당시 동북계 1대의 평균병력 약 25명, 총합하면 정규군 925 여명,
-현지 동원군은 기록되어 있지 않음. 북계의 경우에는 정규군과 규모가 비슷함

-1104년 3월 고려 윤관이 추가 파병 되어 싸웠으나 대패함(고려군 사상자 절반, 여진군 30명 죽임)
-고려에서 화친 청하고 단련사 및 귀부자 돌려보냄
-고려 숙종 매우 대노하여, 천지신명께 복수를 맹세함

-1104년 12월 윤관의 건의로 별무반 설치 운용시작


-1106년 1월 예종 신기군 사열
-1106년 3월 고려사에 따르면 지훈 2천 기병을 이끌고 관문밖에 진을 치고 귀순 및 조공 청함
-1106년 11월 윤관, 오연총 신기군, 신보군 사열


-1107년 10월 국경에서 여진족들이 계속 침범 한다고 하자, 예종 숙종의 맹세문을 신하들에게 보이고 출정식 거행
                    (윤관의 표문에 의하면 이시기 여진이 고려를 만만히 보고 능멸 하였다함)
-1107년 11월 19일 예종 서경 행차, 
-1107년 11월 22일 예종 자비령 도착
-1107년 11월 24일 예종 서경 도착 
-1107년 12월 01일 서경 위봉루, 조진전에서 윤관과 오연총에게 부월 하사하여 동계로 보냄, 4로군 출진(윤관의 표문 근거)
                             본군 윤관 53000명+중군 김한충 36700명+좌군 문관 33900명+우군 김덕진 43800명+해군 2600명=총합 17만
-1107년 12월 13일 함경남도 정평군에 도착하여 둔병하며 대기
-1107년 12월 13일 여진 완안부 사신과 추장 일행 400여명 초대잔치 벌리다 모두 죽임

-1107년 10~12월초, 고려 → 여진 완안부에 귀부자 돌려 준다고 사신 오라고함
-1107년 11월말~12월 14일 완안부 절도사 오아속 마기령에서 사냥하며, 사신이 돌아오길 기다림

-1107년 12월 14일 여진 관내로 진입함, 
                            대내파지촌(大乃巴只村)에 여진인들 모두 도주하고 가축만 들에 넘침
                            윤관 본군 53000명 문내니촌(文乃泥村) 동음성(冬音城) 공격, 여진족 촌민 패배하여 도주함

-1107년 12월 15일 좌군 33900명 석성(石城) 통역 보내 항복권고 → 거부 → 공성시작 
                             → 척준경 적진으로 돌진하여 추장2~3명 죽임 → 전군 돌격 → 성안의 남녀노소 모두 죽임

-1107년 12월15~12월24일간
  윤관 본군 대내파지등 37촌 격파, 2120명 참수, 500명 포로
  본군중 일부 이위동(伊位洞) 공격하여 함락시킴, 1200명 참수
  중군은 고사한(高史漢)등 35촌을 격파, 380명 참수, 230명 포로
  좌군은 심곤(深昆)등 31촌을 격파, 950명 참수
  우군은 광탄(廣灘)등 32촌을 격파, 290명 참수, 300명 포로
  총 136개촌 격파, 4940명 참수, 1030명 포로, 이후 수천명 추가로 포로
-오아속 완안부로 돌아와 부족회의 주재(모든 부족민이 전쟁 불가 주장, 아골타만이 전쟁불사 주장)

-1107년 12월24일 여진족 추장 요을내 3200명 이끌고 항복청함
-함북 길주와 함남 단천에 4개성 축성시작, 영주성,웅주성,복주성,길주성

-1108년 1월 여진 완안부 각부족 총동원하여 알새를 주장으로 파견, 
                  선봉 아도한 30명으로 고려해군 전함 불태우고 타길성(駝吉城) 함락 
-1108년 1월 알새 10개 부대(약 2만명)로 나누워 고려군 대항시작
-1월 윤관,오연총 병목으로 8천명 진군중 매복에 걸려 군대 패퇴,
       10여명만이 윤관,오연총을 호위하고 있고, 여진이 몇겹으로 포위
       척준경 단독 돌입후 10여명 죽임, 원군 도착해 구원 36명 죽임 → 영주성 입성
-여진 추장 가로환(呵老喚)이 403명을 이끌고 윤관의 군진으로 와 투항
-여진 백성 남녀 1460명 좌군에 투항
-여진군 2만 영주성 포위 → 척준경 결사대 이끌고 적 선봉 격파

-1월 4성 축성 완료
       → 영주성, 웅주성, 복주성, 길주성

-2월11일 여진 수만명 웅주성 포위, → 성문열고 공격 대승(90명 참수, 다량 군수품 획득) 
              → 척준경 밤에 성을 빠져나와 원군 이끌고와  대파

-2월27일 2성 축성완료 (총 6성)
              → 함주, 공험진
              공험진 비석 세움. 윤관 예종에게 정호를 각성에 배치 했다는 표문 올림
              군정(군인가정) 이주 현황 : 함주(1948호), 영주(고려사에는 1238호/윤관의 표문에는 1228호),
                                                      웅주(1436호), 복주(632호), 길주(680호), 공험진(532호)
                                                      총 6466호
-3월 3성 축성완료 (총9성)
        → 의주성, 통태진, 평융진

-3월28일 영주성밖에 여진군 진치자 관군 출격 패퇴시킴 20명참수, 말8필 획득
-3월29일 윤관 포로 346명,말 96필, 소300마리 개경에 보냄
               남계(南界) 백성 총 68000호 이주 시켰다고 보고 (동문선에 기록된 윤관의 여진정벌 표문中)
  → 남계 백성 이주 현황 총 69000호 (고려사 병지 1108년中)
      함주 13000 호 / 영주 10000 호 / 웅주 10000 호 / 복주 7000 호 / 길주 7000 호 / 의주 7000 호 / 
      공험진 5000 호 / 통태진 5000 호 / 평융진 5000 호




*동북9성의 규모와 인원 현황, 위치 (엄밀히 따지면 6주 + 6진 총12성)
  총 12성중 훗날 여진에 돌려준 성중에 의주성, 공험진, 평융진이 빠짐
  또한 의주성의 경우에는 정주 이남, 안변도호부에 있었음.
  고려사 예종조 및 지리지에는 9성을 6주(함,영,웅,복,길,의) + 3진(공험,통태,평융) 으로 기록함
  즉, 초기에 건설한 9성중에 3성(1주 2진/의주,공험진,평융진)는 돌려 주지 않았으며, 
  공험진의 경우 전쟁이 끝난후 1111년에도 고려에서 산성을 축성하였음
  허나 추가 축성된 3개진(숭녕진, 진양진, 선화진)을 폐성후 땅을 돌려 주었음.

→ 결론 : 초기 축성한 9성중 최소 1성 의주성은 고려 내지에 건설한 성이고,
             공험진은 돌려 주지 않았으며, 평융진은 돌려 주지 않았는데 내지에 쌓은 성이거나, 함락당한 성일 가능성이 있음
             고려사 각주에는 의주성은 현 함경남도 덕원, 평융진 함경남도 함주, 통태진 함경남도 함주로 비정하였음.

축성순서
1108년 1월 영주,웅주,복주,길주 → 2월 함주, 공험진 →3월 의주,통태진,평융진

폐성 순서
1109년 7월 숭녕진,통태진,진양진,영주,복주 → 함주,웅주,선화진
  
함주성(咸州城) : 군정 1948호 + 백성 13000호
- 영주성(英州城) : 군정 1238호 + 백성 10000호, 성곽규모 950간(둘레 1.73km), 위치 몽라골령(蒙羅骨嶺) 아래
웅주성(雄州城) : 군정 1436호 + 백성 10000호, 성곽규모 992간(둘레 1.80km), 위치 화곶산(火串山) 아래
복주성(福州城) : 군정  632호 + 백성   7000호, 성곽규모 774간(둘레 1.41km), 위치 여진 오림금촌(吳林金村)
길주성(吉州城) : 군정  680호 + 백성   7000호, 성곽규모 670간(둘레 1.22km), 위치 여진 궁한촌(弓漢村)
의주성(宜州城) : 군정          + 백성   7000호
공험진(公險鎭) : 군정  532호 + 백성   5000호
통태진(通泰鎭) : 군정          + 백성   5000호
평융진(平戎鎭) : 군정          + 백성   5000호
숭녕진(崇寧鎭)
진양진(眞陽鎭)
선화진(宣化鎭)

파란색은 폐성하고 여진에 돌려준 성빨간색은 돌려주지 않은 성, 굵은글자는 초기의 9성  
*고려사 지리지에는 영주성의 규모를 990간이라 하였으나, 고려사절요와 고려사 병지의 기록에는 950간이라 되어 있음



*고려의 동원현황(1107년 12월~1108년 3월간)
  → 병력 17만, 군인가정 6500호 (5인기준 약 3만3천), 남계백성 68000호 (5인기준 약 34만)
  → 초기에 17만 병력 동원 하였으나, 9성에 계속 유지 한것으로 보이지 않음.
      1144년 건립된 허재묘지명(許載墓誌銘)에 의하면,
      9성 말기 가장 최전방에 있던 길주성을 허재가 130일 동안 병력 2천으로 여진 6만을 방어 하였다고 기록됨
      금사등으로 추정한다면, 당시 여진의 총병력은 완안부의 영향하에 있는 생여진 모든 부족을 합하면
      보기병 2~3만으로 생각됨.
      그러나 9성의 경우 여진이 방어하는 입장에서 삶터를 잃어버린 남녀노소가 합심으로 대항한 것을 상고해 보면, 
      9성 말기에는 보기병외에도 고향을 찾아온 남녀노소의 여진인들이 많았을 것으로 추정되니
      6만도 허언이라고 볼수 만은 없지 않을까 생각됨.

      처음으로 돌아가, 전국에서 동원된 17만의 대군을 9성에 유지시키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한 일이였음.
      문종이후 태평성대를 거치면서 고려의 최대 300만석이 저장이 가능한 태창에
      수십~2백만석까지 양곡이 저장 되어 있던것으로 추정하여, 
      양곡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여유가 있다고 보여지나
      (문종중기 다년간 보관되던 태창의 창고에 화재가 발생해 곡식 전소, 
       이후에도 계속 비축하여 창고에 쌀이 썩어갈 지경이였음)
     9성을 축성한 후 농사철이 되어, 정규군을 제외한 일반 민병은 고려로 돌아간 것으로 생각됨
     1108년 4월에 원수 윤관과 부원수 오연총이 개선한 것을 보면, 이때 다수의 민병도 귀환 하였을 것으로 판단됨

     애시당초 고려의 전략이, 병목을 막고 요충지 9성만 방비하며 
     이외의 땅은 남계의 백성으로 개간, 정착한다는 것이였는데 
     즉 백성을 사방으로 풀어 놓고, 성을 지키는게 어려운것이
     동북9성 지역이 험하긴 하나 사방으로 길이 뚫려 있어
     방어가 어려웠으며. 각성이 연계하여 수비작전을 펼치기도 어려웠음.
     이런 상황에서 계속하여 남계의 백성을 유지 시켰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듬.

     고려에서는 9성 축성이후 공격측에서 수비측으로 전략을 전환하였으며,
     1성당 수비 병력 2~3천명을 유지하고, 
     정규군 1만~5만을 각성의 원군으로 편성해 고려 내지에 주둔 했던것으로 보임.
     이주된 군정의 수가 1108년 2월에 6466호 이니, 영구 주둔을 꾀하였던 정규군은 약 7000명 안밖이 될것으로 추정됨
     고려중기의 경우 군반이 세습이 되었기 때문에, 군정 1호에 보통 병졸이 1인이나, 자식이 같이 병이 되거나 망군정인에
     편성 되었을 것으로 추정됨으로 최소 6500에서 많으면 1만정도 전후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됨
     이는 고려 친위군을 제외한 정규군의 16%~25% 였음.

*9성의 규모 환산 추정
 성곽 규모와 군정, 배치된 백성수가 명확히 나와 있는 4성을 기준하여 평균하면
 4성의 총간수는 3386간이며, 군정은 3986호이고, 백성은 34000호
 평균하면 1간당 군정 1.18호, 민호 10.04호 임.
 함주의 경우 군정이 1948호에 민호 13000호이니, 군정을 기준으로 하면 1650간, 민호를 기준으로 하면 1295간임.
 의주의 경우 민호만 7000호이니, 697간, 참고로 똑같은 민호가 배정된 길주가 670간, 복주가 774간임.
 공험진의 경우 군정 532호, 민호 5000호이니, 군정기준 450간, 민호기준 500간임.
 통태진과 평융진의 경우 민호 5000호이니, 민호기준 500간임.

-함주성 : 1295~1650간 추정, 둘레 2.35~3.00km, 면적 345000~562500 ㎡ (약 10만4천평~17만평)
-영주성 : 950간, 둘레 1.73km, 면적 186600 ㎡ (약 5만6천평)
-웅주성 : 992간, 둘레 1.80km, 면적 202500 ㎡ (약 6만1천평)
-복주성 : 774간, 둘레 1.41km, 면적 124000 ㎡ (약 3만7천평)
-길주성 : 670간, 둘레 1.22km, 면적  93000 ㎡ (약 2만8천평)
-의주성 : 697간 추정, 둘레 1.27km, 면적 100000 ㎡ (약 3만평)
-공험진 : 450~500간 추정, 둘레 0.82~0.91km, 면적 42000~51600㎡ (약 1만3천평~1만6천평)
-통태진 : 500간 추정, 둘레 0.91km, 면적 51600 ㎡ (약 1만6천평)
-평융진 : 500간 추정, 둘레 0.91km, 면적 51600 ㎡ (약 1만6천평)
*파란글씨는 추정임


*9성의 관병 및 백성수 추정 (1호 5인 기준)
함주성 : 관병 약 2000 + 군인가족 약 9700명 + 백성 65000명 = 총합 약 76700 명 / 1인당 면적 1.36~2.22평
영주성 : 관병 약 1300 + 군인가족 약 6200명 + 백성 50000명 = 총합 약 57500 명 / 1인당 면적 0.97평
웅주성 : 관병 약 1500 + 군인가족 약 7200명 + 백성 50000명 = 총합 약 58700 명 / 1인당 면적 1.04평
복주성 : 관병 약  700 + 군인가족 약 3200명 + 백성 35000명 = 총합 약 38900 명 / 1인당 면적 0.95평
길주성 : 관병 약  700 + 군인가족 약 3400명 + 백성 35000명 = 총합 약 39000 명 / 1인당 면적 0.72평
의주성 : 관병 약  700                               + 백성 35000명 = 총합 약 35700 명 / 1인당 면적 0.84평
  → 의주성은 군정 이주  기록 없음 / 관병은 민호의 배치가 비슷한 복주나 길주성과 비슷할 것이라고 추정하여 약 700명
공험진 : 관병 약 600
   → 통태진은 군정 이주 기록 없음 / 관병은 민호의 배치가 같은 공험진과 비슷할 것이라고 추정하여 약 600명
평융진 : 관병 약 600                               + 백성 25000명 = 총합 약 25600 명 / 1인당 면적 0.63평
   → 평융진도 군정 이주 기록 없음 / 관병은 민호의 배치가 같은 공험진과 비슷할 것이라고 추정하여 약 600명

→ 수성시 동원 병력은 금석문 허재묘지명(許載墓誌銘)의 길주성 수비병 2천명에 근거하면
    길주는 관병 700 에 민병 1300 정도가 동원 된것으로 보여짐
    1109년에 가면 길주성에 배치된 백성들이 그대로 있었을 것이라고는 보여지지 않음
    고려의 전략이 완전히 틀어진 데다가, 현지 경작도 되질 않았을 것임으로 상당수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을까 생각됨.
    즉 고려의 초기의 수비 전략은 1성당 관병 600~2000 에다가 민병 다수를 동원하여 방어 한다는 구상이였던듯 싶은데
    후기로 갈수록 민병의 동원력은 극히 줄어들어 관병의 약 2배 정도밖에 동원하지 못하였음
    → 대략 추정하여 1108년 4월 당시, 17만 동원군은 대부분 고려로 개선하였고, 
        관병 7천, 군인가족 3만3천, 백성 34만 총합하여 약 38만명 정도의 고려인이 동북9성에 남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됨


*고려군 획득상황(1107년 12월~1108년 3월간)
 - 1107년 12월 14일~ 24일 10일간총 136개촌 격파, 4940명 참수, 1030명 포로
 - 1107년 2월 윤언순(尹彦純)이 올린 표문에는 살상 5천, 포로 5천
 - 1107년 2월 임언이 지은 영주척벽기에는 참수한자가 6천, 항복한자 5만 으로 기록 하였음.
    그러나 고려군을 정병 30만이라 기록 하기도 하여, 승전비의 경우 과장이 있을 수 있음.
    허나 참수한자가 6천이라는 기록은, 전후 기록을 살펴 보아도 사실에 가깝고,
    포로가 아닌 항복한자라고 기록한것으로 보아, 여진의 남녀노소가 다량으로 항복하였을 가능성도 있음으로
    항복 5만명이 사실일 가능성도 있음
 - 자진 투항의 경우 1107년 12월 추장 요을내외 3200명 / 1108년 1월 추장 가로환외 403명 / 1108년 1월 남녀 1460명 으로
    총 5063명
 - 획득 영토 면적(길이가 아님) 약 300리 
    세종실록지리지의 경우 조선 함길도(현재의 함경남북도)가 남쪽 철령에서 북쪽 공험진까지 총 1700리이니
    단순계산하면 함길도의 약 18%를 차지한다고 볼수 있음.


*고려사에 기록된 임언의 영주 척벽기中
 점령한 지방은 면적이 3백 리며 동녘으로는 대해에 접했고 서북방에는 개마산을 끼고 있으며 남녘으로는 장주(長州)와 
 정주(定州) 두 고을에 연접하였는바 산천이 수려하고 토지가 비옥하여 넉넉히 우리 사람들이 거주할 만한데 
 이곳은 본래가 고구려의 영토였다. 그 증거로는 낡은 비석과 유적이 오늘까지도 보존되어 있다. 
 그런즉 전일에 고구려가 잃었던 영토를 금일에 성상께서 다시 찾으신 것이니 이 아니 천명인가! 
 이에 새로 여섯 개 성(城)을 설치하였으니 
 첫째는 진동군 즉 함주대도독부(鎭東軍咸州大都督府)이니 여기에 속한 병민(兵民)이 1천9백48 정호(丁戶)요. 
 둘째는 안령군 즉 영주 방어사(安嶺軍英州防禦使)이니 여기에 속한 병민이 1천2백38 정호요. 
 셋째는 영해군 즉 웅주방어사(寧海軍雄州防禦使)이니 여기에 속한 병민이 1천4백36 정효요. 
 넷째는 길주 방어사(吉州防禦使)이니 여기에 속한 병민이 6백80 정효요. 
 다섯째는 복주 방어사(福州防禦使)이니 여기에 속한 병민이 6백32 정효요. 
 여섯째는 공험진 방어사(公險鎭防禦使)이니 여기에 속한 병민이 5백32 정호이다. 
 이상 각 성의 주민들 중에서 현명하고 재간이 있어서 능히 임무를 감당할 만한 사람을 선택하여 
 그 지방을 진무(鎭撫)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곧 시경에 이른바 
 <정복하고 선무하여 왕실의 울타리로 삼았다(于蕃于宣以蕃王室)> 라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제부터 앞으로는 동녘 국경에 대한 근심이 없어 베개를 높이 하고 편안히 잠잘 수 있게 되었다. 


*같은 내용을 고려사에서는 항복한자 5만명, 고려사를 보고 강역한 해동역사 지리고에는 5천으로 되어 있음
  고려사 찬자가 오기한 것인지는 알수 없으며, 이를 왜 해동역사 한치윤 선생은 5천으로 수정한 것인지 연유를 알수가 없음
  개인적으로는 왜 五萬餘口라고 표기하면 간단할것을 굳이 五十千餘口 로 기록 했는가에 대해
  고려사 찬자가 오기한 것으로 보여짐. 정황상 또한 동시기 윤언순의 표문에 근거하면
  1108년 3월 당시 포로수는 5천명이 맞다고 생각됨.
  그러나 포로수를 제외하고 이당시 자발적으로 투항한 여진인이 남녀 5천명이 넘음으로,
  1108년 3월 당시 고려의 수중에 있었던 여진인은 최소 5천에서 최대 1만으로 보여짐
   

고려사 윤관 열전中

해동역사 지리고中

*해동역사 지리고에서는 고려의 함락된 타길성을 길성, 즉 길주로 강목하였으나
 이는 잘못된 것임. 타길성이 함락 된것은 1108년 1월로, 길주성은 그달에 축성 되었고
 9성 철군시까지 함락된 적이 없음, 허재묘비명에도 나타나 있고, 고려사에도 나타나 있음.
 아마 바다를 건너 수군을 공격하였다는 구절을 보아
 고려 해군 2600명이 대기하고 있던 도린포(道麟浦)로 보여짐


P.S) 임언의 영주척벽기에 따르면 윤관이 김유신(金庾信)을 존경하여 항상 언급 하였다고 함.
       김유신의 무공을 동경한 듯이 보임
       임언은 부총사 오연총을 신중한 성격이라고 평함. 
       실제로 오연총은 여진정벌에 앞서도 꼭 정벌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졌음.
       
P.S2) 영주척벽기를 살펴보면, 막상 고려가 점령하고 보니 9성지역은 알려진 바와 달리 매우 비옥한 땅이였음. 
        세종실록 지리지의 경우 함길도의 간전(墾田)은 130413결(밭 123742결, 논 6670결)로 
        이는 논은 매우 적지만 간결 총합은 전라도(제주도제외)의 50%에 해당함.

P.S3) 영주척벽기를 보면, 당시 9성 지역이 본시 고구려 땅이였다는 문구가 있음
        고구려의 유적과 비석이 나온다고 하니, 본래 여진이 살던 곳이 아니라 고구려의 직할령이였는지 의문이 생김
        각종 지리지등에는 이 지역의 고구려 때의 명칭이 나와 있지 않음
        9성 아래 지역은 고구려 당시의 명칭이 정확히 나와 있음
        본시부터 여진의 자치령이였으나, 고구려의 간섭을 받았기에 고구려의 유적이 존재 했던 것인지
        고구려의 직할령이였으나, 패망후 빈땅을 여진인이 들어와 산것인지 정확히 알수 없음.

P.S4) 수치부분에 있어서는 추정글이 많음으로 너무 믿지는 마시구요 ^^;
        수정 할것 있으면 알려 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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