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시대 군벌 중에서, 풍옥상(冯玉祥)은 단연 유명한 인물입니다. 군벌 항쟁 시절부터 장제스와 마오쩌둥이 중국 천하를 놓고 다툴때까지 활약했기에, 중국의 근현대를 살펴보면 정확히 풍옥상이란 사람이 무엇을 했는지는 몰라도, 그 이름은 한번쯤 들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는 성격적으로도 다른 군벌들 ─ 아편과 마작에 찌든 군벌의 스테레오 타입─ 하고는 상당히 다른 금욕적인 성격이었고, 무엇보다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풍옥상을 크리스천 장군이라고 불렀습니다.
풍옥상의 자는 환장(煥章)이며, 그는 1882년 생의 안휘성 출신입니다. 1897년에 군에 입대해서 1913년에는 육군 제7사 보병14여단장이 되었고, 1921년에는 제11사단장, 그해 8월에는 섬서 독군이 되었습니다. 1922년 5월엔 하남 독군, 10월엔 육군 검열사가 되었습니다. 1923년 5월 서북 변방 독판을 겸했으며 11월 장군부의 양무 상장군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풍옥상에 관한 대략의 이력입니다.
제 1차 직봉대전에서 장작림을 물리친 오패부는 대단히 기고만장해졌고, 동시에 복종하지 않는 부하들은 다방면으로 교활하게 괴롭혔습니다. 그런데 풍옥상도 그런 오패부의 손아귀에 걸려들고 말았습니다. 평소에 풍옥상이 북양 군벌의 탐욕과 부패에 대해 반감이 큰게 원인이었습니다.
풍옥상은 아주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군에 입대한것도 너무 가난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린시절 자기 자신에게 엄격했으며, 야심도 커서 한번 크게 떨치고 일어나기를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워낙 근면하고 착실한데다 열심히 노력까지 하니 계급이 순풍을 단듯 올라가 섬서 독군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풍옥상은 장작림을 매우 증오했습니다. 일본에 아첨해서 나라에 해를 끼치는 인물이라고 말입니다. 풍옥상이 직계 군벌이긴 하지만 이러한 이유로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장을 물리치려 나오려고 하는데, 하남 독군 조척을 견제해야 했기 때문에 전공을 세우진 못합니다.
1차 직봉 대전 때, 봉계와 전투를 벌이기 위하여 직계의 후방이 비어있는 상황이 있었습니다. 이때 직계의 하남 독군 조척은 장작림과 손을 잡고 직계의 후방을 공격하였고, 조척의 동생 조걸(趙杰)이 포덕전(鮑德全)이라는 인물과 함께 공격을 했던 일이있습니다. 그리고 그 피해를 고스란히 입은 것은 다름아닌 풍옥상 군이었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후 믿을수도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분명히 변명의 여지도 없을 배신 행위를 했음에도 불구, 포덕전이 평소에 조곤, 오패부와 친하다는 이유때문에 아무 처벌도 받지 않은 것입니다. 당시 군벌들의 싸움이란것이 대부분 이런 식이었습니다.
조곤, 오패부야 좋게좋게 넘어간다고 생각한다고 쳐도, 큰 피해를 입은 풍옥상은 크게 분노했습니다. 조척의 뒤를 이어 하남 독군으로 임명된 풍옥상은, 개봉에 도착했을때 포덕전이 거들먹거리면서 영접하러 나오자 크게 대노해서 마구 소리쳤습니다.
"네 놈이 조척을 도와 얼마나 많은 병사들이 네 손에 희생되었느냐, 그런데 네가 나를 보러 나와? 내가 후안무치한 너를 받아 줄 성 싶으냐!"
그리고 소총 대장 이향인이라는 사람에게 명령해서, 즉시 포덕전을 체포해서 총살시켜 버립니다.
오패부는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전화를 해서 어찌된 영문이냐고 힐문했습니다. 그런데 풍옥상은 별다른 사과도 없이 이런식으로 대답했습니다.
"아마 그가 난군에 맞아 죽었던 모양이지요."
오패부는 크게 불만스러웠습니다.
둘의 대립은 이 일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풍옥상이 하남으로 가기전에, 오패부는 미리 어떤 명단을 만들어 보내왔습니다. 주요 자리에 배치할 인물들 추천서였는데 요직이란 요직은 죄다 오패부와 친한 인물들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풍옥상이 개별적으로 쓸 수 있는 인물은 비서장이 유일했습니다. 풍옥상 크게 화가 나 오패부의 추천서를 무시하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이게 뭐야, 독군이 내가 뭘 하라는 말인가?"
오패부는 다시 풍옥상에게 전보를 쳐, 요긴하게 쓸 곳이 있으니 자금 80만원을 마련해서 보내라고 통보했습니다. 이것은 명령이었고, 강압적인 명령이었습니다. 하지만 풍옥상은 그 자리에서 거절해버립니다. 전에 없던 착취라는게 이유였습니다. 이런 일이 발생하자 자연히 오패부와 풍옥상은 크게 대립하고 맙니다.
육군 검열사(陸軍檢閱使) 시절의 풍옥상
사실 풍옥상이 처음부터 오패부에 대한 반감을 가진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초에는 풍옥상도 오패부를 돕고 싶어 정성껏 20개 조항의 감형과 감세 등 애국애민에 대한 건의서를 제출했습니다. 그런데 오패부는 그 수작이 가소롭기도 하고 풍이 고분고분한 맛이 없는것 같아 건의서를 무시해버립니다. 풍옥상은 크게 모욕을 당한 기분이었고, 둘은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오패부는 풍옥상이 자금 지원을 거절하자 당장 돈이 부족해서 손해를 보았으며, 거기다 자신이 낙양에 머무르는데 풍옥상이 머무르는 개봉과는 지척이라 더욱 불안했습니다. 바로 코 앞에 전혀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풍옥상을 북경에 주둔케 했는데, 실권이라고는 전혀 없는 육군 검열사 자리 였습니다.
1922년 10워 31일, 발령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하남 독군이 지위에서 풍은 반년만에 해임되었고, 모든 기반을 잃게 되었습니다. 오패부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초에 오패부는 풍에게 매월 하남에서 120만원 씩 보내 군비에 보태 주겠다고 약조를 했는데, 이동을 하고 보니 오패부는 그런 약속을 한적도 없는것처럼 굴었습니다. 풍의 입장에서는 오패부가 자신을 궁지에 몰아 넣어 굶어 죽게 하려는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풍옥상은 쉽게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를 기회처럼 여겨서 교수를 초청해 강의를 듣고, 부대 훈련을 강화해서 병사들을 정예로 만들었습니다. 기율을 엄격하게 한 결과 풍의 부대는 공격과 수비에서 강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렇지만 오패부와의 대립은 쉽게 가라않을것 같지 않았습니다.
이 상황을 보고 쾌재를 친것은 다름 아닌 장작림입니다. 풍의 동향을 주의 깊게 살피던 장작림은 1923년 봉군 사령부 참모처 부흥패(傅興沛)를 비밀리에 북경으로 파견, 공작을 벌이도록 했습니다. 부흥패가 풍옥상의 참모장이던 유기(劉驥)와 육군대학 동창이기 때문입니다. 부흥패가 유기를 만나 풍과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하자, 유기는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습니다.
"만일 내가 오전에 전화를 주면 풍을 만나러 오면 되네. 그런데 전화가 없다면 뒤도 보지 말고 봉천으로 돌아가게."
다행이 전화가 왔기에 부흥패는 급히 풍을 만나러 왔습니다. 부흥패가 장작림을 대표해서 안부인사를 하자, 풍은 긴말을 하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모든 걸 다 알고 있소. 북경은 남의 이목이 많은 곳이지. 일단 즉시 봉천으로 돌아가 계시오."
이렇게 풍과 장의 1차 접촉이 이루어졌습니다. 풍은 그 후에 과연 자신이 장과 함께해야 하는지 고민을 여러차례 했는데, 풍의 참모들과 친한 자기 쪽 사람들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장작림은 기뻐하며 다시 한번 풍과 접촉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신임하던 부관 마병남(馬炳南)을 북경으로 보내 풍옥상을 만나도록 했습니다.
때마침 시기도 좋게 풍옥상이 부인 이덕전(李德全)과 결혼을 하는 일이 생깁니다. 그래서 마병남은 공개적인 하객 신분이 되어, 장학량을 대표해서 축하하러 가는 모양새가 되었습니다.
풍옥상과 이덕전
기독교도인 풍옥상은 마병남을 전 북경 기독교청년회 간사 자격으로 특별히 초청했습니다. 즐겁게 예식이 끝난 후에 마병남은 풍을 단독으로 만나게 되었고, 이 자리에서 장씨 부자가 풍옥상과의 합작을 원한다는 사실을 단도직입적으로 말했습니다. 풍은 크게 웃었습니다.
"큰 일을 하시는구만. 당신 책임이 많겠소."
풍옥상은 이후 장자림과 확실히 연대를 취했습니다. 봉군에서 풍군에게 군사 보급품을 비밀리에 지원해주기 시작한 것입니다. 또한 200만원이라는 거금이 장의 손에서 풍으로 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 풍옥상과 합작을 벌이려던 인물은 장작림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오패부와 대립하고 있는걸 주시하는 사람이 또 있었는데, 쑨원이었습니다.
쑨원은 벌써 1920년부터 풍옥상에게 친필 서신을 보내, 혁명 사업을 도와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동맹회 회원이었고, 쑨원을 존경하던 풍옥상은 쑨원같은 큰 인물이 자신을 알아 주자 매우 감사해하기도 합니다. 그 후 쑨원 - 단기서 - 장작림의 삼각합작이 이루어졌을때, 쑨원은 이 정황을 풍에게 알려주면서 직예군을 타도하자고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풍옥상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목전의 직계 병력은 나에 비해 수배나 됩니다. 만일 모험을 무릎쓰고 함부로 행동을 하면, 반드시 실패하게 될 것이오. 기회가 오면 나는 반드시 움직입니다. 이 뜻을 쑨원 선생님께 전달해 주시오."
본래 부터 풍옥상은 남방의 많은 국민당 인사들과 친교가 있었습니다. 국민당 인사들을 자주 만나다 보니 쑨원의 국민혁명 사상을 좀 더 깊이 알게 되었고, 무엇보다 쑨원의 건국대강(建國大綱)을 읽고 나서 큰 사상적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풍옥상에게 접근하는 인물은 장작림, 쑨원 만이 아니었습니다. 풍옥상은 인기가 좋은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에게 접근하는 또다른 인물은, 군벌이나 보통의 혁명가와는 조금 다른 성격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공산당이었습니다.
이 시점에선, 공산당의 전신격이라고 해야겠죠.
중국 공산당의 설립자, 이대소(李大钊). 중국 원음 발음은 "이대조"에 가깝다고 하지만 일단 이대소라고 부르겠습니다.
이대소는 하북성 출신으로 천진 북양 법정전문학교를 졸업했고,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과에 유학했습니다.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했고, 1918년에는 북경대학 도서관 주임, 북경대학 역사학과 교수를 지내고, 이 시대 청년들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친 <신청년> 편집에 참여했습니다. 진독수(陳獨秀)와 함꼐 중국 공산당을 조직하고 중국 최초로 마르크스 사상을 소개한 당내 최고 이론가입니다. 마오쩌둥에게 사상적 영향을 끼쳤고 중국공산당 2,3,4회 중앙위원과 국민당 제1회 중앙 집행위원을 지냈습니다. 그야말로 중국 공산당의 시조뻘이 되는 사람입니다.
사실 이대소와 풍옥상의 인연은 아직 공산당이라는게 중국에 있기 한참 전부터 이루어졌습니다. 1911년 신해혁명 당시 이대소와 풍옥상은 처음 알게 되었고, 나란히 동맹회에 가입했던 것입니다. 또한 1912년에는 북방에서 반청 기의를 같이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실패하긴 했지만 혁명 동지인 셈입니다.
북경대학 교수로서 저명한 학자로 이름을 떨치던 이대소는 혁명 대열에 다시 풍옥상을 참가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에게 접근했습니다. 본래 전우였던 둘은 서로 만나자 격식 따위를 잊고 매우 친하게 굴었습니다. 풍이 이대소의 학식, 인품에 대해서 매우 존경하기도 했던것입니다. 이 자리에서 이대소는 러시아 10월 혁명의 정황을 설명하고 레닌이 제정러시아와 중국이 체결한 불평등 조약을 폐지한 조치에 대해서 찬양했습니다. 아울러 중국 혁명의 정세를 분석하고 중국 혁명 실패 교훈에 대해서 평가했습니다.
"쑨원 선생이 남방에 있고, 풍 검열사가 북방에 있어 만일 서로 마음을 합하여 협력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러시아를 본받아 정치를 쇄신하면 중국은 전도가 유망할 것입니다."
풍옥상은 매우 흥분했습니다.
"이 교수와 한 번 이야기한 것이 10년 책을 읽은 것보다 낫소."
1924년, 조곤과 오패부는 동북 출병을 모의했습니다. 동시에 풍옥상을 보내 동몽고를 돌게 해 봉군의 후방을 타격하게 할 음모를 꾸몄습니다. 만약 일이 성사되면 풍옥상을 흑룡강성의 지배자로 인정해주겠다는 것입니다. 소식을 들은 장작림은 마병남을 다시 파견해서 풍을 만나보게 했는데, 풍은 짐짓 이미 군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하면서 자신은 중앙의 명령을 따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병남은 깜짝 놀랐습니다. 하지만 곧 풍의 주위 사람들이 실제적인 뜻을 전달해주었습니다. 풍옥상의 말은 진심이 아니며, 이미 1개 사단과 3개 여단이 명을 받들고 진지를 옮기고 있고 사방에 분산 배치되어 음모를 꾸민다는 것입니다. 풍의 뜻을 전달했는데 동시에 봉군은 절대 입관하지 말 것을 요청ㅇ했습니다.
장작림은 이 소식을 듣고, 만일 평화가 이루어진다면 봉군으 산해관을 넘어 입관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풍옥상은 서신을 읽고 크게 만족했습니다. 그는 창호지에다 낡은 붓으로 크게 이룰 성(成) 자를 쓰고, 밑에다 옥상(玉祥)를 썼습니다.
"만일 양군이 서로 만난다면, 같이 하늘을 향해 총소리를 냅시다. 풍군은 홍포를 두른 완장을 차고, 봉군은 흑포를 두른 완장을 차 서로 식별하도록 합시다."
풍옥상과 장작림의 합작은 성공적이었습니다. 남은것은 전투 개시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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