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고려 문종조 이야기를 틈틈히 하고 있는데요,
오늘은 특이한 사건에 대한 문종의 판결에 대해 알아볼까 합니다.
문종12년 (1058년) 12월 고려사 열전 왕총지(王寵之) 中
개성감목직(開城監牧直) 이계(李啓)가 어떤 일로 인해서 사적으로 기두(旗頭) 이인(李仁)과 구사(驅史) 가달(加達)을 보내어
부군(府軍) 김조(金祚)를 체포하게 하였더니 김조가 강물에 투신해 자살하였다.
상서형부(尙書刑部)에서는 "이계의 죄상은 협박 치사죄(畏懼致死罪)에 해당하니 마땅히 격투하다가 살인한 죄목에 준하여 단죄하여야 할 것인바 현행 법규에 의하면 그 형(刑)은 범인의 등(背)에 곤장을 쳐서 사람 사는 섬으로 귀양 보내고, 이인과 가달은 종범(從犯)으로 취급하여 3천리 밖으로 귀양 보내는 것이 합당합니다"라는 뜻으로 왕에게 아뢰었는데
이자연(李資淵)의 의견도 형부와 같았다.
그러나 왕총지 등의 견해는 "협박치사죄(畏懼致死罪)란 마치 물가에서나 혹은 험준한 곳에서 협박을 받고 공포에 못 이겨 죽은 것을 가리키는바, 이 사건에서는 김조가 스스로 물에 빠져 자살하였은즉 위에서 말한 경우와는 같지 않다. 그러므로 당연히 이인을 주범으로 취급하되 교수형은 면제하고 가달을 종범으로 취급하여 이인의 절반으로 벌할 것이며 이계는 사리로 볼 때 중한 형에 의하여 논죄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라고 제기하였는데
이에 대한 왕이 판결 명령은 다음과 같았다.
"협박 치사죄로써 이계를 논죄하는 것은 판례의 올바른 적용이 아닌 듯하다. 관리의 적에서 제명하고 녹과전을 회수(收田)하는데 그치고 기두 외의 종범들은 품신한 바와 같이 집행하라!"고 하였다.
개성감목직(開城監牧直) : 감목직(監牧直)은 조신시대 관직명으로, 고려의 목감직(牧監直)의 오기로 보이며,
관목장를 관리하는 하급 관직이다.
고려 문종 30년에는 권무관(權務官/임시 관직)으로 녹봉 8석 10말을 받았다.
조선시대에는 종6품 수준이였다.
고려초중기에는 전국적으로 관영 목장이 8개소 있었으며,
개성목장[병지에는 양란(羊欄)]도 그중 하나였다.
병지에 의하면 목장에는 정규군인 간수군(看守軍) 장교 2인과 병사 17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기두(旗頭) : 고려도경에 의하면, 각부대의 맨앞에서 깃발을 들고 있는 군인을 말한다.
구사(驅史) : 종친(宗親), 공신(功臣), 당상관(堂上官)를 호종하는 잡직(중인)이다.
부군(府軍) : 문종조 지방행정조직 부(府)에 속한 군인. 지방관인은 주(州),부(府),군(郡),진(鎭)에 속했다.
협박치사죄(畏懼致死罪) : 물가나 낭떠러지 같은 위험한곳에서 타인을 협박하여 죽게 만든죄
상서형부(尙書刑部) : 고려 6부중 하나로 법률·소송·형옥(刑獄)에 관한 일을 관장. 현재의 법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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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인즉 이렇습니다. 관영목장인 개성목장의 말을 관리하는 하급관리인 이계(李啓)가
공적인 체포령이 아닌, 개인적으로 하급군인 이인과 중인 가달을 보내, 병사 김조를 체포하게 합니다.
준민간인 수준의 하급관리가 자기휘하도 아닌 군인등을 사적으로 보내 군인을 체포한다?
문맥이 이상하여 원문을 찾아보니, 사적으로 보내 체포하려 했다는게 맞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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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이에 김조는 그만 강물에 투신해 자살하고 말지요.
사건의 발단에 관한 내용은 나와 있지 않지만, 목장에 관련된 개인적인 비리같은게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이에 대한 판결은 상서형부에서 문종께 아뢰고, 재상이던 왕총지가 의견을 보내고
최종판결은 문종이 하게 됩니다.
현 법무부에 해당하는 상서형부에서는 이는 명백한 협박치사죄다 하여
이계 : 일을 시킨 자로 주범, 협박치사죄에 의하여 등에 곤장을 때리고, 유인도 귀양형!!!
이인+가달 : 종범으로 취급하여 3천리밖 귀양형!!!
에 처하도록 문종에 아룁니다.
이에 당시 재상이던 왕총지는 이렇게 처결토록 권하지요.
김조 협박에 의한것이 아니라, 스스로 죽은것이니 협박치사죄는 아니다.
이인 : 주범이며, 교수형을 제외한 마땅한 형벌를 내려야함!!!
가달 : 종법이며, 이인이 받을 형의 절반!!!
이계 : 중한형을 내려야함!!!
이에 문종께서는 이렇게 판결하십니다.
이계 : 협박치사죄는 아니다. 관직에서 해임하고, 지급된 토지를 몰수하라.
이인+가달 : 형부상서에서 올린대로, 3천리밖 귀양형!!!
끝으로 문종께서 사형수를 판결함에 있어, 세번에 걸쳐 심의하시곤 하였는데,
사형을 결정한 날에는 업무를 중단하고, 육식을 금하며, 궁중에 음악이 흐르지 않게 하였지요.
또한 치세기간 사형죄 이하는 사면령도 십수차례나 내기도 하였습니다.
고려사 문종 1년 (1047년) 8월 기사中
○ 형부가 사형을 복주(覆奏)하니, 왕이 이르기를, “사람의 목숨은 지극히 중하니,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날 수 없다. 과인이 사형수를 판결할 때마다 반드시 삼복(三覆)을 하고도 오히려 그 실정에 어긋나지는 않나 염려하는데 혹시나 원통하고 억울함이 있어서 하소연할 길이 없이 한을 품게 되면 애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살피고 조심하라." 하였다.
고려사 문종 10년 (1056년) 8월 기사中
○ 8월에 사형수를 판결하므로, 정전(正殿)을 피하고 소선(素膳)을 들었으며 음악을 철폐하였다.
[출처] 고려 문종이야기(16) 협박 치사죄에 대한 판결 (【부흥】네이버 대표 역사 카페) | 작성자 길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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