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신(水神) 정성공(14) ─ 모든 이야기의 끝

  ─ 하늘의 선택을 받은 문명 군주가 이민족들로부터 조공의 예를 받는것은 고금을 막론한 주지의 사실이다. 어리석은 네덜란드인들은 천명을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두려움도 부끄러움도 없이 제멋대로 굴었다……그 자들이 좀 더 일찍 공손하게 과인에게 와서 그 동안 지은 죄를 인정하였다면, 오늘날의 저 고생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너희 소왕국이 저 화란 놈들이 했던 식으로 과인의 무역선을 괴롭히고 공격을 했기 때문에 충돌이 발생하고 분란이 야기되었다.……처음에는 과인이 직접 함대를 이끌고 나가 너희의 악행을 응징할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언제나 과인에게 불쾌감만을 안겨주던 너희 소왕국이 최근에 참회의 조짐을 보였음을 기억했다……이에 과인은 화란 놈들에게 취했던 방식과는 전혀 달리……너희에게는 도움이 될 만한 몇 마디 충고를 하기로 했다. 곧 너희 소왕국이 너희의 잘못을 깨닫고 하늘의 뜻을 알고자 한다면, 해마다 과인의 옥좌로 와서 예를 올리고 조공을 바쳐야 할 것이다.

 
 
 
 이 터무니 없이 무례하고 오만한 서신의 태도는 둘째치고, 에스파냐 본국과 그 속지들은 제외하더라도 당장 '소왕국' 이라고 조롱 당한 필리핀만 해도 정성공을 비롯한 명나라 유신들의 세력보다 크다는것은 에스파냐인, 중국인 모두가 알고 있는 일이었기에, 이 서한을 받아본 에스파냐 인들은 이것이 과연 그 전부터 조짐을 보이던 정성공의 과대망상인가, 아니면 치밀하게 계산된 허세인가 긴가민가했습니다.
 
 
어찌되었건, 마닐라에 정성공의 서한이 도착한지 몇 달도 되지 않아 만리케 데 라라 총독은 곧바로 행동에 착수했습니다.
 
 
 
주변에 나가 있던 병력들은 마닐라로 몰려들었으며, 성직자들은 마닐라 방위를 위한 미사를 올렸습니다. 또한 전시 평의회도 소집되었습니다. 대다수 에스파냐인들은 정성공이 허세를 부리거나 지나친 자신감을 보인다고 여겼습니다. 그들은 지금 당장은 정성공보다, 정성공의 침공 소식을 들은 마닐라의 중국인들이 무슨 생각을 할지에 더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상황이 극단적이니만큼 에스파냐 인들은 이 중국인들을 "짜내야할 해로운 채액" 쯤으로 비유했습니다.그들이 두려워 하는 것은 정씨 가문의 선단이 공격해들어는데, 현지 중국인들의 에스파냐인들의 전력을 분산시킬수 있는것을 두려워 했습니다. 그들이 취한 방법은 (믿을만한 증거인)크리스트교도가 아닌 모든 중국인들 추방하는 일이었습니다.
 
 
 평화적으로 일을 해결 하기 위해, 중국인 상인들은 모든 재산을 가지고 떠날 수 있었습니다. 에스파냐인들은 소요상태가 벌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곳곳에 병력을 배치했습니다. 우려 했던 사태는 현실이 되어, 중국인들 사이에 극심한 불안감과 온갖 루머가 퍼지면서 소요사태가 벌어집니다. 현지 중국인들과 에스파냐 진압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진 것입니다.
 
 
 선량한 가톨릭 사제들은 중국인 주민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서 그 거주지로 향했지만, 설득에 나선 도미니크 수도회 수사가 살해되는 일이 벌어졌고 에스파냐 병사들도 두 명이 죽었습니다. 그런 상황속에서도 사제들은 두둑한 신심과 존경받을만한 용기를 발휘해서 양쪽의 분쟁을 중재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거주기 곳곳에서 바리케이트를 치고 분노하던 중국인들은 이 사제들의 설득에 에스파냐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철수용 선박에 올라탔습니다. 다만 몇몇 중국인들이 기병에게 참수당하는 일이 생기면서 산으로 도망친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정크선에 올라탔습니다. 한척의 정크선이 무려 1,300명의 중국인이 승선해서 그들은 앉을 자리도 없이 새곳을 향해 떠났습니다.
 
 
 첫번째 문제를 해결한 만리케 데 라라는 반격에 나서기로 했습니다. 그는 정성공에게 답신하는 서한을 썻는데, 내용이 신랄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중국 해안의 지배자이자 통치자인 정성공 귀하" 라는 말로 시작하는 서한에서, 만리케는 정성공을 중국 황제의 적법한 대리자로 여기지 않는다고 말하며, 정성공에게 중국인들을 필리핀에서 축출했다는 사실을 전해주면서, 다만 자신이 중국인들을 죽일 것이라고 걱정하지는 않아도 된다고 말했습니다.
 
 
"오히려 나는 그대가 그토록이나 자랑하는 그 실력이 몇 배로 늘어나서, 내가 감히 그대와 맞설 엄두조차 못 내게 되었으면 좋겠소."
 
 나아가 그는 모든 중국 선박들은 정성공이 사죄할 때까지 필리핀 항구에 입항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또한, 그는 정성공의 불안정한 심리 상태를 간파하고 다음과 같이 지적했습니다.
 
 
 "(우리)에스파냐 사람들은 그대가 제안하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그대를 만날 용의가 있소만은, 먼저 그대는 타타르인들과 네덜란드인들, 그리고 그대를 따르는 무리 속에서 그대를 증오하는 자들처럼 호시탐탐 반격할 기회를 노리고 있는 자들이 있음을 유념해야 할 것이오. 그러니 그대가 우위에 있을 수 있다고 장담 할순 없겠지."
 
 
 심지어 만리케는 정성공에게 인격적인 공격까지 가하며 신랄한 타격을 입혔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대답은 큰 왕국이든, 작은 왕국이든, 그대의 뜻 따라 좌우되는 일은 없다는 것이오. 그 이유는 그대가 나이도 연소할 뿐만 아니라 아는 것도 뻔하기 때문이지. 그대는 어제 태어나서 내일이면 죽어버릴 자에 불과하오. 후세에 그대의 이름 석자 따윈 남기지도 못한 채 말이오."
 
 
  이 소식을 가져온 사신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정성공은 서한을 읽지 못했습니다. 그는 부친의 빈소를 지키고 있었고, 본토로 나간 주전빈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심한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정황을 보면 이 병은 말라리아였을 것입니다. 아니면 폐렴일 수도 있습니다. 분노, 최악의 몸 상태 등에 정신이 오락가락한 정성공은 이상한 집념만 남아서, 매일 프로빈샤 요새 성루로 나가 대만만 너머만 바라보며 소식을 전해다줄 배를 기다리고만 있었습니다. 이 무렵, 폭풍우가 죽은 고래 한 마리를 대만에 쓸어다놓았습니다. 이는 불길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나, 정성공 본인이나, 고래를 자신들의 수호동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6월 무렵, 필리핀으로부터 한척의 배가 도착했습니다. 이배의 선장은 정성공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울면서 에스파냐 인들이 필리핀에 있는 모든 중국인들을 잔혹무도하게 학살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사실이 아니었고, 선장은 자신이 빠져나온 뒤의 모습을 지레짐작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정성공은 이 이야기를 믿고 분노했습니다. 매우 불안정한 상태의 정성공은 자신의 생에에서도 가장 커다란 분노를 터뜨리며 미친듯이 소리질렀습니다.
 
 
 "에스파냐 놈들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리겠다!"
 
 
 그는 친히 필리핀으로 가서 "혈전"을 불사하겠다고 말했고, 고열로 인해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심지어 이런 소리까지 했습니다. 그 당시 정성공이 얼마나 몸과 마음이 망가진 상태였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만주족과 휴전을 할 것이다. 그들을 불러 이번 원정에 동참시킬 것이다!"
 
 
  정성공은 그 날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침상에서 부들부들 떨며 계속 헛소리를 내뱉었습니다. 시중들은 정성공의 광증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온 세계가 숨을 죽이고 있으며, 에스파냐 놈들은 특히 그렇습니다."
 
 
 정성공은 간신히 진정했습니다.
 
 
 
 
 그는 망가졌습니다.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최악의 상황에 내몰렸고, 부축 없이는 걸을 수도 없을만큼 쇠약해졌습니다. 하지만 그는 바다를 보겠다는 고집 하나 만큼은 꺾지 못했습니다. 하루는, 정성공은 프로빈샤 요새 성루에 서서 시중들은 보지 못하는 "무언가"를 보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두 눈은 공포에 질려고 아무것도 없는곳을 향해 가리키며, 시중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쌓여있는 참수된 시신들을 어서 치워라! 오, 저 시신들이 자신들을 무의미한 죽음으로 몰아넣은 죄를 나에게 묻기 위해 왔구나!"
 
 이제 정성공은 스스로 바다의 여신이 자신을 가호하는것을 끝내버렸다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남명의 마지막 황제, 영력제는 장장 15년간을 도망 다니면서 지냈습니다. 해안 지방에서 쫒겨난 영력제와 남명의 조정 신료들은 내륙을 향해 서쪽으로 몸을 피해야만 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중국의 국경까지 벗어났고, 황실 여인들은 가지고 있는 귀금속까지 팔아치우면서 연명했습니다. 황제는 그들을 따르는 충성스러운 이들에게 피눈물을 흘리며 "나라를 회복하면 영광을 누릴것" 이라는 약속 밖에 해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중국을 떠나, 버마에 도착했습니다. 사가잉(Sagaing)이라는 한 도시에서 빈탈레(Bintale)라는 왕에게 몸을 의탁했습니다. 그들은 2년 동안 버마에서 나름대로 행복한 시기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1616년 6월, 프롬(Prome) 지역의 영주이자 빈탈레의 동생인 폐 민(Pye Min)은 형을 죽이고 옥좌를 찬탈했고, "신성한 물"을 마시기 위한 의식 행사에 영력제 일행이 참가할것을 권했습니다.
 
 
 영력제의 금위대장은 이것이 미심쩍다고 여겼습니다. 폐 민이 영력제 일행을 달갑지 않게 보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를 거절했습니다. 폐 민은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1개 부대와 무려 100여 마리의 코끼리를 보내 불쌍한 영력제 일행을 학살했습니다. 수천명이 죽어갈 무렵, 돌연 폐 민은 일을 중지시켰고, 영력제는 태후, 황후, 후궁, 아들, 그리고 한 환관과 함꼐 목숨을 부지 할 수 있었습니다. 살아있는 병사들은 모두 코끼리등에 처참하게 당해 의식이 불분명했습니다. 이들이 명 제국 최후의 군대였습니다.
 
 
 영력제는 폐 민이 자신들을 죽이지 않은 것이 한 통의 서한을 받았기 때문이라는것을 들었습니다.
 
 
 "명 왕조에 충성스런 장수가 보낸 서한일 것입니다! 그가 폐하를 모시러 올 것입니다!"
 
 
 황실 사람들은 기대에 차서 이런 소리를 했지만, 영력제 일행은 40일동안 또 갇혀있다가 폐 민으로부터 나가도 좋다는 말을 들었고, 문제의 그 부대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5,000여명의 기병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아무런 표지도 없었고 아직 동이 틀 무렵이라 어두워 황실 사람들도 그들의 정체를 잘 알지 못했습니다. 무장을 하지 않은 병력이 영력제의 처소로 와서 말했습니다.
 
 
 "저희들은 명의 유신들로서, 폐하를 본토로 모셔가기 위해 왔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4년 전까지 남명 군대에서 복무하던 자로, 영력제는 이 사람을 알고 있었지만, 영력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삼계가 보냈는가."
 
 
 잠시, 침묵만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침묵은 곧 대답이기도 했습니다. 영력제는 그들을 꾸짖었고, 기세에 눌린 병사들은 자신들이 만주족을 위해 복무하며, 다만 황실 인사들에게 어떠한 위해도 가하지 말라는 명을 받았다고 영력제를 안심시켰습니다. 선택의 여지는 이제 없었기에, 영력제는 변졀자들과 함께 버마를 떠나, 3개월간의 고통스런 여정을 견뎌 중국까지 도착했습니다. 황제는 점점 견디기 힘든 고통에 시달리며 끼니를 거부했고, 갈수록 천식 증세에 시달렸습니다.
 
 
 홍무제 주원장으로부터 이어진 대제국의 마지막 후예는 이제 처량한 꼴로 운남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운남의 지배자는 오삼계였습니다. 그의 나이는 50세. 이 지역의 실질적인 지배자였습니다.
 
 
 영력제를 본 오삼계의 병사들은 동요했습니다. 이제 나이도 들고, 만주족 정권의 밑에 알랑거리며 부귀와 목숨을 연명하는 그들이지만, 그 옛날 그들은 산해관에 남아 만주족의 공격으로부터 명 왕조를 수호하던 마지막 정예군이었으며, 숭정제를 죽게한 이자성군과 죽음을 각오하고 혈전을 벌였던 부대였습니다. 늙은 병사들은 오랫동안 잊고 지내는 뜨거운 충정이 핏속에서 다시 꿈틀거렸지만, 과거 혈기넘치던 무장 오삼계는 이미 노회해질대로 노회해진 뒤였고, 다른 문제가 생기기전에 일을 빨리 처리하기 위해 서둘러 영력제의 구금을 북경에 알렸습니다.
 
 
 
 당시는 아직 네명의 대신이 어린 강희제의 업무를 대리하고 있던 시기입니다. 그들은 영력제의 처형을 명령했습니다. 오삼계는 일을 지체없이 처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1662년 5월 9일. 영력제와 세레명이 콘스탄티노인 그의 아들 주자훤은 오삼계 앞에 섰습니다. 영력제는 최후의 순간을 예상하고 오삼계가 시키는 대로 그대로 조용히 군말없이 따랐습니다. 오삼계는 북경에서 내린 칙령을 자신이 직접 읽었습니다. 그 칙령의 마지막 구절이 끝나기도 전에, 부하들은 영력제와 그의 아들을 붙잡고는, 밧줄로 두 사람의 목을 졸라 살해했습니다. 소식을 들은 황후는 도자기 그릇을 깨어 부수고 누가 말리기도 전에 자신의 목을 쳐 죽었습니다.
 
 
 하늘이 노한것인지, 곧바로 구름이 일고 어두워지고, 천둥번개가 내리치고, 여름철 우박을 둘러싼 폭우가 내렸습니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사람들은 이런 사태를 보고 죽은 영력제를 깊이 동정했고, 오삼계의 부하들도 죄책감과 회의감에 빠진 사람들이 상당 수 있어, 이 조짐을 불길하게 여긴 오삼계는 많은 병사들을 처형했습니다. 비가 그치고 날씨도 좋아지자, 이제 분위기도 달라졌습니다. 이제 중국의 영역에서 청에 대항하는 마지막 남은 세력이 사라진 것입니다.
 
 
 소식은 급속도로 전해졌습니다. 보름이 지나자, 명 왕조 마지막 황제의 죽음은 바다에 면한 복주에도 널리 퍼졌습니다.
 
 
 
 멀리 대만의 프로빈샤 요새에서 바다를 바라보던 정성공은 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하는가 하면, 자신을 배신한 아들과 아내를 저주했고, 에스파냐인들의 도전에 부르르 떨면서도, 네덜란드인들의 혹시나 모를 반란을 걱정했고, 다시 한번 본토로 위풍당당하게 진군해 만주족을 꺾어버릴 생각을 하면서, 그 날이 영영 오지 않을지 초조해했습니다.
 
 
 그는 깨어 있을 때조차 죽은 자와 죽어가는 자의 환영에 시달렸습니다. 병세가 갈수록 시달렸지만, 그는 바다로 나갔습니다. 네덜란드인들로부터 뺏은 망원경을 들고 언제나 성루에 서서, 태풍이 치고 파도가 사나워져도 계속 망원경으로 무엇인가를 꿈결처럼 쫒고 있었습니다.
 
 
 배 한척이 도착하여 본토의 소식을 알렸습니다. 정태 쪽에서 보낸 소식은 아니었습니다. 정성공이 지난 15년간 충성을 바치면서도 한 번도 보지 못한 황제, 영력제의 사망을 알리는 소식이었습니다. 정성공은 극심한 충격에 빠졌습니다.
 
 
 몸을 간신히 추스른 그는 의관을 정제하고, 시중들의 손길을 뿌리치면서, 거의 필사적으로 발걸음을 내디뎠습니다. 어둑어둑했을 복도를 지나, 관저 안쪽 깊은 곳에 위치한 사당으로 떠났습니다. 사당에는 부모의 위패에 우선하여, 위대한 홍무제의 위패가 모셔져 있었습니다.
 
 
 정성공은 떨리는 손으로 위패를 두 손으로 높이 받들어 올리고는, 그 앞에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있던 정성공은 위패를 껴안고 바닥에 엎드려 흐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부하들은 멀찌감치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문득 정성공은 부하들을 바라보고는, 이렇게 오열했습니다.
 
 
 "내 소임을 다 하지 못했으니, 무슨 낯으로 하늘에서 황제 폐하를 볼 수 있겠느냐! 어찌 뵐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그는 앞으로 머리를 숙이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습니다. 흐느끼는듯 상체가 들먹거렸는데, 바로 그 순간, 명왕조의 그대로 고꾸라졌습니다. 부하들이 황금히 나섰지만, 그는 다시 눈을 뜨지 못했습니다. 정성공은, 명 왕조의 넋을 가슴 깊이 간직한 채, 모순과 더불어 한으로 점철된 생애를 그렇게 끝마치게 된 것입니다. 폭풍우가 거센 날이었습니다.
 
 
 
 에필로그
 
 
 정씨 일가는 정성공 사후 분열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죽는데 한 몫을 했던 정경은 그 즉시 자신이 적법한 후계자라고 선언했고, 주전빈을 석방한 뒤 그를 정씨 가문을 지휘할 총사령으로 임명했습니다. 대만 해협에 있던 사람들은 아무런 지도자가 없었기에, 우선 정성공의 동생 정세습을 지지하고 나섰습니다. 정세습보다 후계 서열이 앞선 아들만 5명이 있었지만, 그들의 주장은 "정성공의 유서" 에 근거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는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정경은 하문에서 아버지가 명 왕조에 보인 충정을 어설프게 흉내내고, 휘하 가신들을 임명했습니다. 하지만 사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물려받은지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명 황실에 충성하는 제후인지, 아니면 연안 지역을 독자적으로 다스리는 제후인지, 그도 아니면 만주족과 평화를 유지해야 할 지역 군벌인지 말입니다.
 
 
 
 
 
 
만주족의 특사들은 소식을 듣고 정경에게, 정지룡과 정성공에게 했든 복종을 요구했습니다. 벼슬을 미끼로 내걸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정경은 이미 대만에 대한 공격을 준비 중이었고, 만약 청이 자신들의 복종을 원한다면 정경 자신을 독립된 군주로 인정할 것과, 대만을 조선과 같은 조공국으로 인정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즉 변발을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아마 정경이 삼번과 같은 위치에 서길 원했다면 청 왕조에서는 그를 인정해주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변발을 하지 않는 개별적인 조공국은 이를 더 벗어난 문제였습니다. 만주족이 어찌해야 할까 고민하는 사이에, 정경은 전쟁에 나섰습니다.
 
 
 정경이 정성공의 적통자가 가고 있다고 전령을 보냈고, 많은 장수들은 정경에 항복하여 싸움은 싱겁게 끝났습니다. 정경은 숙부는 시원스레 용서했지만, 다른 정씨 일족 ─ 특히 정태에게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정태가 만주족과 협상중이라는 첩보를 얻은 그는 정태를 체포했고, 곧 정태는 의문의 죽음을 맞이합니다. 정태의 아들들은 청 왕조에 투항했습니다. 정씨 일가 소유의 은이 대부분 일본에 있었기 때문에, 정경은 투항한 정태의 아들과 은에 대한 소유권 근거를 놓고 치열하게 다퉜는데, 결국 정경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정경은 명의 연호를 그 후 계속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각종 겉치레는 다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는 명 왕조에 충성하는 세력이 아닌 독립적인 군주처럼 굴었습니다.
 
 
정성공이 그토록 걱정한 VOC의 역습은 그의 죽음이 전해지자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청 왕조의 묵인 하에 중국 연안의 정씨 가문의 세력권을 공격하고 무자비한 학살과 겁탈을 자행했는데, 어린 아이들도 예외는 못되었습니다. 네덜란드는 청 왕조의 도움을 얻어 대만을 회복하고자 했고, 청 왕조는 어디까지나 바티비아 이사회를 장기말로 쓸 요량이었지만 어찌되었건 두 세력은 동맹을 맺어 네덜란드와 만주족 연합 함대는 정씨 가문의 근거를 사정없이 박살내었습니다. 하문과 금문이 함락되었는데, 그 부대를 지휘한 인물은 다름아닌 황오와 시랑이었습니다.
 
 
 
 청은 하문과 금문을 함락하자 마자 모든 지원을 끊어버려, VOC는 그들의 목표를 이룰 수 없었습니다. 분풀이로 그들은 연안의 정씨 가문의 세력을 완전히 괴멸시켰는데, 정경은 여기에 아무런 미련도 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버지와 달리, 본토 수복 따위엔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 세력의 종말로 여겨졌습니다. 정씨 가문의 많은 사람들이 만주족 정권에 투항했고, 용맹 무쌍한 주전빈 마저도 만주족에 항복했습니다.
 
 
 이제 대만의 "정씨 왕조" 세력은 더 이상 복명 세력이라고 부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정경은 오히려 정지룡과 같이 밀무역에 더 신경을 썻고, 여자들을 납치하여 첩으로 삼기도 했습니다.
 
 
 훗날 삼번의 난이 벌어지자, 정경은 경계무의 아들 경정충과 매우 옅은 우호 관계를 맺고 본토에 대한 공격이 벌어졌습니다. 운이 따라주어 20만 가량이 넘는 병력에 이르렀지만, 온갖 철인부대에 막강한 흑인 부대를 거느리던 정성공의 세력과는 달리 갑작스레 불어낸 힘에 가까웠고, 때마침 경정충도 만주족에게 굴복하면서 두 세력의 연계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만주족의 군대는 정경의 세력을 육지에서 밀어냄과 동시에, 심지어 바다에서도 그들을 격파했습니다. 무적의 정씨 함대는 이제 더 이상 없었던 것입니다.
 
 
 전 중국의 황제인 강희제는 이제 나이가 차서 경험과 역량이 가히 대단했고, 초월적인 힘을 발휘하며 반란군을 모두 격퇴해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대만 문제를 해결해야 겠다고 여기고, 한명의 남자를 불렀습니다. 다름 아닌 시랑이었습니다.
 
 
강희제는 시랑에게 "다른 사람들의 그대의 출신을 가지고 무엇이라 하지만" 자신은 시랑을 믿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대가 아니라면 이 일을 해결할 사람이 없다." 는것이 이유였습니다.
 
 
 시랑은 이 믿음에 보답하려했습니다. 정경은 본토에서 밀린 후에는 거의 자포자기 상태가 되어 주색질이나 부리고 있었고, 실질적인 통치는 장남 (아마 정성공을 그토록 분노케했을 유모의 아들일 가능성이 높은)정극장이 하던 형편이었습니다. 정경이 정지룡의 안좋은 점만 닮은 인물이라면, 정극장은 여러모로 정성공의 장점을 많이 닮은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정경도 눈이 있기에 정극장이 뛰어나다는것을 알았고, 그를 신임했는데, 정성공의 미망인 동 부인은 이 정극장을 혐오했습니다. 아마도 고지식한 남편을 닮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정경은 사망하면서 총관 풍석범과 유국헌을 불러 정극장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게 하고 죽었습니다. 공고롭게도, 아버지와 같은 39세였습니다.
 
 
그러나 그 충성의 맹세와 정경의 시체가 식기도 전에 풍석범이 교활한 역모를 꾀했습니다. 정성공의 다른 네 아들이 모두 풍석범을 지지하고 나섰고, 정극장은 정경의 아들이 아니며 친부가 누군지도 모른다고 주장했습니다. 동 부인이 이에 동의했습니다.
 
 
 정극장은 동 부인이 부르자 아무 생각도 없이 처소에 들어갔다, 살기등등하게 바라보는 4명의 숙부를 보고 경악했습니다. 그는 흑인 노예의 손에 잔인하게 교살되었습니다. 현명한 정극장을 대신한 인물은 11세의 소년으로 정경의 차남인 정극상이었습니다.
 
 
 실권은 동부인과 풍석범이 나눠가졌지만, 곧 동 부인이 사망하면서 풍석범이 사실상의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반항하는 자들을 억눌렀고, 때마침 기근이 대만을 감돌았습니다.
 
 
 대만이 이렇게 요란스러울을때, 바다 건너에서는 전중국 최고의 제독이라 할만한 시랑이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는 정성공에게도 굽히지 않던 오만함으로 인해 복건 관리들과 마찰을 빚었지만, 황제의 승인을 이유로 모든 지원을 얻어내었고, 300척의 함대와 2만 명의 부대에 대한 통솔권을 얻어내고 맙니다.
 
 
 
 시랑은 먼저 대만을 통과하는 주요 관문인 팽호도에 이르렀습니다.
 

 
팽호도를 지키는 장수의 이름은 유국헌이었습니다. 유국헌의 전함은 200여척이 넘었고 병력도 2만 여명이나 되어서 시랑은 숫자로 우위를 확보하기는 어렵게 되었습니다. 6월 17일, 시랑은 팽호열도의 팔조서라는 지역에 정박을 했는데, 이 지역은 해마다 봄과 여름에 걸쳐 거대한 태풍이 자주 오는 곳으로 유난히 물의 흐름이 급하여 태풍이 다가오면 어마어마한 파도가 정박해 있는 배를 쓸어버렸고, 게다가 해마다 6월 17일과 18일, 19일 3일간은 "관음폭" 이라고 하는 강력한 바람이 불어 정박하기에는 최악의 장소였습니다
 

시랑이 팔조서에 정박하는것을 본 유국헌은 큰 소리로 웃으면서 시랑을 비웃었다고 합니다.

 

"누가 시랑이 뛰어난 장수라고 하더냐? 그깟 천문지리도 모르는 작자가 어찌 군대를 거느린다는 말인가! 우리는 그저 술이나 마시며 적들이 섬멸되는 것을 구경하면 되겠군!"

 

그런데 놀랍게도 시랑이 팽호도에 도착한지 무려 열흘이 넘게 바다는 태풍은 커녕 큰 파도 조차 불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그저 우연인지 천문지리도 꿰뚫어본 시랑의 혜안인지는 알 수 있는 방도가 전혀 없으나, 반대로 유국헌은 예상이 빗나가면서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무려 22일간이나 벌어진 전투에서 유국헌은 휘하의 함대 159척을 전파당했고, 35척을 빼앗겼으며 1만 2천여명의 군사들이 전사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시랑이 이끄는 함대는 2천여 명의 병사들이 죽거나 다치는 수준에 불과했으며, 문제가 있다면 시랑이 오른쪽 눈을 좀 다쳤다는것일뿐 완벽한 대승으로 끝났습니다. 이 팽호대전의 결과로 정씨 왕조는 주력군을 모조리 잃었고 팽호열도 36개 섬을 잃어버렸습니다.

 복건 총독 요계성은 시랑에게 승전의 기회를 살려 패잔병을 추격하자고 주장했지만, 시랑은 이에 반대했습니다.

"국가의 근본은 백성이고, 사사로운 원한으로 국사를 행해서는 안될 일이지요."
 
 
그러면서 회유책을 주장헀고, 조정 대신들과 강희제도 이에 찬성을 했기에 대만의 코앞에 함대를 주둔시킨 시랑은 항복을 권유했습니다. 필리핀으로 달아날 계획까지 짜고 있던 정씨 왕조는 시랑이 이렇게 나오자 불안감을 덜고 항복을 했고, 대만에 상륙한 시랑은 8월 18일 강희제의 칙령을 읽어 대만 정복 작전을 완수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변발을 하게 되었고, 정극상은 북경의 강희제 앞으로 끌려와 할아버지가 그토록 미워하던 만주족 황제에게 고개를 숙여 말했습니다.
 
 
 "폐하의 발밑에 무릎을 꿇고, 소인은 장구한 세월을 그침이 없이 빛을 발하며 존속해온 중국의 위대함을 우러르며, 하늘의 뜻에 따라 폐하께서 지고의 권력을 부여받으셨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극상은 해정공에 봉해졌고, 실권없는 관리로 지냈습니다. 시랑은 최고의 위치에서 지내다가 죽은 뒤에 태묘에 안장되었습니다.
 
 
 
 정씨 일가의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을 맞이했습니다. 하지만, 시대가 그들을 다시 끄집어 내었습니다. 국성야 정성공이 죽은 지 200여년 뒤, 1875년 중국은 한참 열강의 위협을 받으면서 신음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바다를 건너온 오랑캐들을 물리친, 여신의 수호를 받는 영웅에 대한 통쾌한 이야기를 들으며 즐거워했고, 그를 영웅시했습니다. 그가 외국을 물리친 중국의 영웅이기 때문입니다. 1898년 대만에 들어선 일본인 총독은 정성공에 대한 예를 가장 먼저 올렸습니다. 그가 대만을 정복한 최초의 '일본인' 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일 잃고 들어선 장제스 정권은 정성공을 성스러운 선구자로 추앙했습니다. 그가 몇 세대 먼저 중국에서 대만으로 와 통치를 했던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공산당 정권도 그를 영웅으로 여겼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득세하고 있는 대만에서, 그들을 쫒아내고 대만을 중국의 영토로 편입한 영웅이기 때문입니다.
 
 
 
 오만하고, 거만했으며, 모순으로 가득찼고, 자기 당착에 빠지기도 했던 인물이지만, 정성공은 결국은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대만을 중국의 영토로 얻어냈고, 서양 제국주의자를 쫒아낸 인물로 말입니다. 그는 충신이면서도 충신이 아니었고, 해적이면서도 해적이 아니었고, 제왕이면서도 제왕이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중국인이면서 중국인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모호함 때문에 오히려 그는 전설로 남았습니다. 오늘날, 여전히 대만 곳곳에서는 국성야에 대한 전설이 남아있고, 주민들은 그에게 비를 내리게 해달리고 빌고 있습니다.
 
 
 
 
1차 사료
臺灣外誌
Neglected Formosa
先王實錄校註
明史
淸史稿
 
등등

실제적으로 본 2차적인글

해적왕 정성공  ─ 조너선 클레멘츠
중국을 말하다
이야기 중국사 ─ 진순신
정성공(鄭成功)과 동아시아 : 지카마쓰(近松)의 『고쿠센야 갓센(國性爺合戰)』을 중심으로 ─ 최관
『고쿠센야갓센』(國性爺合戰)에 나타난 대외의식 ─ 김성은
수신제가 ─ 등예쥔
鄭成功과 해외무역 ─ 추이윈펑
 
정씨 가문 연재는 끝.
다음 연재는
 
 
이 아저씨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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