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기의 몽골을 다녀온 서방의 여행자들 이야기

 몽골군이 동유럽에서 한바탕 난리를 벌인 후에 1246년이 되면, 카라코룸 부근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 유명한 바투를 제외한)칭기스칸 일족의 왕자들, 여러 지방의 지사들, 몽골 제국 속국의 군주들
그리고 투르키스탄과 트란시옥시아나의 총독들, 페르시아의 총독, 그루지야의 다비드 나린(David Narin), 다비드 라샤(둘다 왕위 계승을 노리던 인물), 러시아 대공 야로슬라브, 아르메니아 왕 헤툼 1세의 동생 샘파드, 바그다드 칼리프의 사절단, 소아시아의 술탄이 되는 셀주크의 아르슬란 4세 등등이 모이는데



바로 이 '쿠릴타이'에서 구육 칸이 우구데이를 잇는 새로운 대칸으로 선출이 됩니다.

사방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구육에게 적을 하면서 경의를 표했고

그런데 서방에서는 뜻하지 않게 이 때의 모습을 꽤나 생생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리에 바티칸 교황청이 파견한 수도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교황인 인노센트 4세는 프라노 카르피니라는 프란체스코회 수도사에게 편지를 보내, 살육을 그만하라고 권고하고 기독교도가 되지 않겠는가, 하고 종용하는 서한을 전하게 했습니다.



이 사람이 구육 칸

이리하여 1245년, 카르피니는 리옹, 독일, 폴란드, 키예프 등을 떠나 볼가 강 하류에서(구육 만큼이나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는) 바투를 만나고, 다시 예전 서요 지방을 지나 카라코룸 부근으로 도착해서 쿠릴타이를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때의 모습과, 심지어 구육 칸의 외모까지 상세하게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의 기록으로는 구육 칸은 키가 중간쯤 되고, 풍채나 태도나 근면하며 잘 웃지 않았다고 합니다.




따지고보면 교황이 굳이 구육칸에게 기독교 믿으라고 할 필요는 없었는데, 구육은 기독교에게 호의적인 편이었습니다. 다만 문제가……


그게 800년 전에 에페소스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선포받은 네스토리우스교라는게 문제였습니다.  
당나라 시기부터 이미 네스토리우스교는 경교라는 이름으로 중국 내에 들어왔고


칭기스칸이 몽골을 통합하기 이전부터 몽골에 네스토리우스교의 영향력이 존재했습니다.



여기서 교황청이 파견한 프란체스코회의 프라노 카르피니는 이 네스토리우스교도 들이 구육 앞에서 미사를 올리는 걸 보았습니다. 아니, 그걸 떠나서 친카이鎭海라는, 몽골 정치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지닌 재상이 네스토리우스 교도였습니다. 어찌되었건 프라노 카르피니는 그들 도움으로 교황의 서신을 전하긴 했는데, 여기에 대해서 구육은 그러면 교황이 직접 카라코룸으로 와서 충성을 맹세하라고 요구합니다.



몽케 칸


구육의 뒤를 이은 사람이 몽케 칸입니다. 그 와중에 곡절이 많지만 여기서는 생략하고


루이 9세

이때, 프랑스의 루이 9세가 사람을 몽케에게 파견합니다.
루이 9세는 상당히 평가가 좋습니다. 여하간에 그때 루이 9세의 명령을 받은 사람은 윌리엄 루브룩William of Rubruck 이라는 인물로, 역시 프란체스코회 사람입니다. 


루브룩은 1253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떠나서, 흑해를 건너고, 크리미아를 뒤로 하고 러시아 초원을 지나 서유럽의 세계에서 몽골인들의 유목 세계에 들어오게 됩니다. 이때의 경험에 대해


"그리고 타타르인들 사이에 있는 나를 발견하였을 때, 내게는 진정으로 내가 다른 시간, 다른 세상으로 옮겨진 것처럼 보였다."


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리하여 몽골인들의 생활, 이동, 습관 등 다방면에 관해서 상당히 상세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나중에 의화단 사건 해결 과정에서 등장하고 위안스카이의 정치 고문이 되려고 가다가 객사했던 록힐이라는 사람이를 정리해서 윌리엄 루브룩의 동방여행기라는걸 저서로 내기도 합니다.


여하간 루브룩은 볼가 강 즈음에서 사르탁이라는 인물을 만났습니다. 이 사람은 바투의 아들이었고, 네스토리우스 교도였습니다. 게다가, 루브룩의 착각일수도 있지만 그는 여기서 성당 기사, 즉 Knights Templer까지 봤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비투



그 후 루브룩은 바투를 만나게 됩니다. 그의 묘사에 따르면 바투는 금을 입힌, 침대만한 크기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고 했습니다. 바투는 루브룩을 몽케에게 보냈고, 여행길에서 르부룩은 위구르의 불교 신자들을 보고 "옴 마니 밧메 훔" 이라는 소리가 들린다고 기록합니다.


여하간에 몽케 앞에 왔고, 역시 몽케의 옆에 있던 네스토리우스교도들이 루브룩의 말을 통역했습니다. 여기서 루브룩은 파케트Paquette라는 헝가리인 여자를 만났고 헝가리에서 여기까지 끌려왔고, 지금은 러시아인과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게다가 카라코룸 궁정에서는 기욤 부셰라는 파리 출신 금세공도 만났는데, 그 사람은 자신의 형도 파리에서 살았다고 말했습니다. 기욤 부셰는 헝가리에서 태어난 여자와 결혼했습니다. 



1254년 부활절 축제때, 이 프란체스코회 수도사는 카라코룸까지, 그리고 네스토리우스 교회에 들어와서 미사를 접전하는 진기한 경험을 했는데, 그는 예배에서 뭉케의 동생, 그리고 그 유명한 쿠빌라이의 동생이자 쿠빌라이와 싸웠던 인물인 아리크 부케를 만나게 됩니다. 


아리크 부케는 네스토리우스교를 포함한 기독교에 매우 호의적이었고, 또 동정적이었습니다. 르브룩은 "우리네 주교들이 하는 방식대로" 아리크 부케가 십자가 모양으로 성호를 그었다고 기록했습니다. 게다가 무슬림들이 기독교도들과 키배가 벌어지면 그는 노골적으로 기독교 쪽의 편을 들었습니다. 


여기서는 간혹 대규모 공개 종교토론이 벌어졌는데,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서로 싸우다가도 불교 철학자들이 나오면 유일신론에 입각하여 서로 편을 들어 불교에 대항했습니다. 몽케 같은 경우는 공식적으로는 모든 종교가 자신의 다섯 손가락이라고 말했지만, 불교도편을 많이 들던 편이었습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다른 종교는 손가락인데 "불교는 자신의 손바닥" 이었습니다.



루브룩은 나중에 몽케의 서한을 들고 떠났는데, 내용은 프랑스왕 보고 자신의 신하가 되어라, 이런 정도의 내용이었습니다. 루브룩의 루트는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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