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항자 라디스와 정성공은 아마 어떤 식으로든 대화를 나누고 네덜란드인들이 버티는 저 요새를 공략할 방법이나 약점등에 대해 논의했겠지만, 매우 흥미로울게 분명한 이 당시 상황은 어떤 기록으로도 알수가 없습니다. 당시 제란디아 성의 VOC에 대해 알려줄 자료로 코예트가 기록한 버려진 대만(Neglected Fomosa)이 있는데 당연히 코예트는 정성공과 라디스의 대담을 볼 수 없습니다. 정성공 측의 자료로 부관 양영이 기록한 선왕실록교주(先王實錄校註)에는 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고 합니다. 개연성을 보자면, 정성공의 승리에 있어 서양 코쟁이들의 도움을 받았다는 점을 인정안하려고 그러지 않나, 하는 의견이 있습니다.
여하간에 그 확실한 사실만 보자면 라디스가 투항한 직후, 정성공은 오랜만에 공세를 재개했습니다. 정성공의 부대는 3군데에 새로운 포대를 설치하여 제란디아 성 근처의 탑을 사정권에 두고, 넓은 지역에 걸쳐 참호를 판 다음 서로를 연결하여 수천 명의 병력이 엄폐할 수 있도록 꾸몄습니다. 포병 부대를 방어함과 동시에 공격을 위한 준비였습니다. 그들은 흙과 돌을 가득 담은 모래포대 비슷한 주머니를 대량으로 쌓아올려 방비를 철저하게 했습니다.
코예트의 명령으로 집중포화가 쏟아졌지만 참호가 무너지는 와중에서도 정성공의 부대는 끈기있게 참호를 만들었습니다. 코예트는 적들이 제란디아 요새의 약점을 깨달았다는것을 알고 즉시 평의회를 소집했습니다.
코예트가 깨달은 단점이란, 정성공의 군대가 노리는건 요새 근처의 탑이었습니다. 위트헤르트 탑이라고 불리우는 그 탑은 사방을 엄호하기 위해 고지대에서 세운 크지 않은 탑이었는데, 이 탑이 함락된다면 상대적으로 저지대에 있는 제란디아 요새 안의 모든 것을 사격할 수 있는 유리함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탑이 함락되는 순간 제란디아 요새도 끝이었습니다.
전시 평의회에게 코예트는 적군의 포대를 습격하게 승인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네덜란드 병사들은 이제 몇백명에 불과했습니다. 포대를 습격하는데 충분할진 몰라도, 요새를 방어할 여력은 없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현상 유지를 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위트레흐트 탑에 지원군은 가지 않았고, 그저 3개월치 보급품을 미리 넣어주고 "최대한 버텨 " 달라고 주문했을 뿐입니다.
1662년 1월 25일. 아침이 밝자마자 정성공은 대포 28문을 일제히 쉬지 않고 발사해 탑을 두들겼습니다. 네덜란드 인들은 이 포탄이 2,500개나 된다고 말했습니다. 두 번 정도 포격이 멈추고 중국 부대가 공격해 들어갔다 다시 쫒겨날 때를 제외하면, 해가 질때까지 포격은 끝도 없이 이어졌습니다. 어차피 이 탑을 점거하면 싸움은 끝난다고 보았기에 물자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위트레흐트 탑은 이제 거의 넝마가 되었고, 수비대는 희망이 없다고 판단, 탑에 있는 대포 모두에 대못을 박아넣고 제란디아 요새 안으로 도주했습니다. 정성공의 군사들은 탑을 접수한 것입니다.
정성공은 보무도 당당하게 탑에 직접 올라, 제란디아 요새를 내려다 보려고 했지만, 라디스가 만류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위트레흐트 탑은 갑자기 불길이 일면서 날아가버렸습니다. 코예트의 부하들이 탑을 빠져나가기 전에 탑 기단부에 커다란 화약통 4개를 설치한 후, 연결된 도화선에 불을 붙힌 것입니다. (라디스가 만류해서 정성공이 살았다는 이 기록은 코예트의 기록에 있는 내용이니, 사실 관계가 명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변한것은 별로 없었습니다. 탑이야 사라졌찌만, 고지대는 정성공의 수중에 있었습니다.
밤이 되어도 공세는 계속되었습니다. 정성공 부대는 흙과 돌이 든 주머니를 엄폐물로 내세우고 다가와서는, 주머니 뒤에서 뛰쳐나와 전진하며 목표물 더 가까이에 주머니를 쌓아 올렸습니다. 제란디아 요새에는 설계 당시부터 생긴 문제점이 있었는데, 적군이 가까이 접근하면 발사 각도가 너무 경사져서 조준 사격이 불가능하다는 문제였습니다. 아마 라디스로 인해 정성공도 이 사실을 알았을 것입니다.
코예트는 모든 포병에게 밤을 세워 포격을 가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보이지 않더라도 미친듯이 쏘아대면 그 포격의 불빛 때문에라도 적이 보일테니 말입니다. 그리고 병사들에게 파괴 가능성이 있는 성가퀴를 강화하게 명령한뒤,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며 마지막 공격을 평의회에 제안했습니다.
평의회는 코예트가 분별력이 잃고 무분별하게 군다고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코예트도 나름대로의 논리가 있었는데, 정성공 부대는 탑을 점거하기 위해 2,000발 이상의 포탄을 소모했고, 또 그 부대의 보급 상태는 극히 불량하니 지금 가지고 있는 화약은 거의 대부분 소모가 되었을 것입니다.
당시 전시 평의회는 29명이었고, 이 중 4명이 코예트의 의견에 찬성했습니다. 이 4명은 지지의 이유를 질문 받았고, 2명은 "아무래도 안 되겠다" 며 다시 반대로 뜻을 바꾸었습니다. 끝까지 남은 2명 중에 1명 다니엘 지크스(Daniel Sicx)는 상인이었는데,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덜란드인들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습니다. 나가서 싸워 볼만 합니다."
다른 한명은 파우 데 비크(Paul de Vick) 였는데 이 사람도 상인이었습니다. 비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전쟁에 대해서는 아는게 없습니다. 하지만, 기드온이 전혀 승산 없는 싸움을 할때도 하느님은 그를 지켜보겠다는 성서의 구절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네덜란드 동포들이 하느님의 은총과 함께 싸움에 임하고 있는다고 믿는다면, 기적은 분명히 일어날 것입니다."
결국 코예트의 제안은 거부되었습니다. 반격은 시작도 하기전에 중지되었고, 남은 선택지는 두가지 입니다. 장렬하게 말라죽던지, 저 '야만적' 인 중국인들에게 항복하여 최소한의 희망을 찾을 것인지. 네덜란드 인들은 정성공에게 전령을 보냈습니다. 협상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입니다.
정성공은 느긋하게 협상에 임했습니다. 문제가 생긴것은 항복하는 네덜란드인들이 어떤 방식으로 자신들의 위신을 그나마 유지할지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네덜란드 인들은 대만 총독 코예트가 승선할때까지, 장전된 총기를 소지한 채 깃발을 흔들며 불꽃을 터뜨리고 북을 두드리며 행진할 수 있다는 조건을 승낙받았습니다. 네덜란드인들은 승전군과 같은 모습으로, 그러나 씁쓸하게 떠나는 몇 척 되지도 않은 배에 올라탔습니다.
이 항복문서는 18개 조로 이루어졌는데, 그 중 제 9조 "VOC에 복무했던 자로 현재 대만의 중국인들에게 억류된 자들" 의 송환에 관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남자 포로들은 선교사 함브룩의 일 당시 정성공이 죽인 일 때문에 거의 없었기에 이 조항의 혜택을 보는건 정성공의 명으로 성노예 생활을 했던 여성들입니다. 그들은 집에 돌아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몇 명은 임신한 상태였습니다.
이 여성들이 노예 생활 동안 받은 취급은 크게 달랐습니다. 우선 젊은 장수들에게 "분배" 된 여성들의 경우, 미혼인 중국 장군들은 놀랍게도 이 여자들에 대해 매우 세심하게 배려했습니다. 육감적인 몸에, 섹시하고 이국적인 매력이 있는 그녀들은 젊은 장수들을 매혹시켰고 젊은 장수들은 지극히 신사적인 태도로 이 여자들을 대우했습니다. 코예트는 이러한 부류에 대해서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들은 큰 소리로 신세를 한탄하지 않았다. 뱃속에 중국인의 피가 섞인 아이가 있다고 괴로워 하지도 않았다."
다른 부류는 기혼인 나이 많은 장수들에게 분배된 여성들입니다. 기혼자들도 이 여자들은 좋아했지만, 문제는 본처들이었습니다. 이국적인 매력에 밀린 본처들은 질투의 화신으로 변해, 이쪽에 "배치" 된 여성들은 뜨거운 대만의 여름 폭염 속에서 나무를 베고 곡식을 타작하고 물을 긷게 하며 몇 달 동안 노비나 하녀로 엄청난 중노동에 시달렸습니다. 이 여자들은 한결같이 중국인을 저주하는 말을 내뱉었습니다.
세번째 부류는, 아무도 손을 안 댄 여자들입니다. 코예트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외모가 못나서 정절을 지킬 수 있었던 여인들은, 다른 동료 여인들이 매춘부 짓을 하면서 중국인들과 어울려 놀아났다고 비난하는데 앞 장 섰다."
일전에 정성공의 대만 침공 당시 네덜란드 인들을 배반했던 에티엔이나, 프랑스 용병 뒤피, 라디스 같은 경우엔 물론 그들과 함께 떠나지 못했습니다. 평의회는 배반자들은 정씨 가문과 함께 생활하라는 선고를 내렸습니다. 또한 부관 발렌틴을 포함한 20여명도 인질로 잡혀 있었고, 대부분은 고향을 보지 못했습니다. 1,600명의 네덜란드와 용병들이 죽었고, 900여 명의 유럽인들이 대만을 떠났습니다.
누가 더 병신인가를 놓고 치열하게 겨룬 끝에, 그나마 바타비아 이사회보다는 덜 무능했던 정성공은 대만을 완전히 점거했습니다. 가장 능력을 보인 코예트의 후일담을 이야기해보자면, 희생양을 찾던 네덜란드인들에 의하여 온갖 비난에 대만을 넘겨주었다고 사형 집행까지 받았다가, 형장의 도끼 앞에서 상징적인 사형 선고를 받고 머나먼 섬에 유배되었습니다. 1647년이 되어서야 그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클랜크와 캐우는, 대체 무슨 마술을 부렸는지 처벌을 면하고 가벼운 징계만 받았습니다.
붉은 핏빛 기는 내려졌고, 정씨 가문의 깃발이 올라왔습니다. 네덜란드 인들은 가지고 갈 수 있는 모든 재물을 챙겼으나, 아직도 제란디아 요새에는 여러가지 값비싼 산호나 호박등이 남아있었습니다. 떠나는 네덜란드 인들보다 굶주린 정성공의 군사들은 간신히 보급품을 받고 허기를 달랬습니다.
대만은 이제 서양인을 떠나 중국인의 손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정성공은 벽돌로 이루어진 요새로 들어가, 저주받은 예언의 운명의 실현에 직면하게 됩니다.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