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강의 군벌, 만주의 패왕 장작림(12) ─ 제 1차 직봉대전 : 장작림의 패배

 봉군 동로군 제2부대 사령 시절의 장학량

 

─ 근래 중앙의 정국은 장작림에 의해 좌지우지되어 왔다. 오패부는 간섭을 하지 않았으며 조곤 역시 자기 주장을 못해 왔다. 이번에 양사이는 장작림의 뒤를 믿고 외국에 아첨하여 나라에 해를 끼치는 행위를 서슴치 않았다. 뒤를 봐주는 자를 위하여 인민이 바라는 것은 아랑곳 하지 않는것 같다. 또 인민에게 해를 끼치는 좀벌레를 비호하고 있고 마구 무력으로 인민을 위협하고 있다. 자신들만을 위하고 인민을 돼지 새끼로 보고 있다. 3천만 직예인, 전국 4억 인민의 청원을 이 오패부가 대표하고 싶다. 장작림은 통일을구실러 먼저 통일을 방해하고 있고, 장애를 제거 시킨다는 구실로 자기가 장애가 되고 있다.


 조곤의 지지를 받은 오패부는 즉시 응전 태세로 돌입했습니다. 그는 전선으로 직접 가서 병사들을 독려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작림이 죽지 않으면 큰 도둑이 멈추지 않을 것이다. 오패부는 이미 비적을 소탕할 책무를 짊어졌음으로 마땅히 적과 내통하는 배반자를 없애는 정의를 실현하겠다."


 당시 장작림은 직계의 하남 독군 조척(趙倜)과 은밀하게 내통하고 있었는데, 이 정보를 얻은 오패부는 조척이 후방에서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풍옥상의 11사단으로 이를 감시하게 하고 본인은 전방으로 떠나 군사 배치에 사력을 다했습니다.


 여기서 맞서 봉군은 동서군으로 부대를 나누었습니다. 서로군은 장경혜가 총사령이 되는데, 다시 3부대로 나뉘어 1부대는 장경혜가, 2부대는 추분이라는 장군이, 3부대는 정전승이라는 장수가 맡았습니다. 동로군 총사령관은 장작상이었습니다. 여기도 3개 부대로 나뉘면서 기병 부대를 더 붙였습니다. 1부대는 장작상이 겸직하고 2부대는 장학량, 3부대 사령은 이경림이 맡았고 기병 부대는 허란주, 참모장은 상음괴(常蔭槐)라는 인물이 맡았습니다.


 당시 봉군의 배치를 보면 이렇게 됩니다.


 총지휘관 : 장장림

 서로군 총 지휘관 ─ 장경혜
            1부대 : 장경혜 겸직
            2부대 : 추분
            3부대 : 정전승
 동로군 총 지휘관 ─ 장작상
            1부대 : 장작상 겸직
            2부대 : 장학량
            ─ 장학량이 임시 편성한 봉군 제3혼성 여단
            ─ 채평본(蔡平本)의 봉군 제4혼성 여단
            ─ 곽송력이 임시 편성한 봉군 제8혼성 여단
            3부대 이경림
            기병부대 ─ 허란주
            참모장 ─ 상음괴
        


 봉군의 숫자는 모두 12만명이었습니다. 반면에 직예군은 10만 명으로 숫자로는 봉군인 우위에 있었으나, 부대 기강은 직예군이 더 나았고 봉군은 훈련도 부족하여 병사들 소질에서는 많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전투가 시작되면 함부로 공격하기는 어려운 형국이었습니다.


 전투가 시작된것은 4월 28일 밤이었습니다. 선공을 날린것은 직예군이었습니다. 밤 중에 대포 소리와 총소리가 요란했고, 29일 쌍방은 대병력을 동원해서 본격적인 사투에 들어갔습니다. 이 당시 양군의 전투 방식은 1차 세계대전 형식의 진지전(War of Position)이었습니다. 4월 29일부터 5월 3일까지는 계속 이런 식으로 싸웠고, 서로는 전과를 날조해서 자신들이 이미 적군을 때려눕혔다고 매일같이 허풍을 떨고 신문기사를 실었습니다. 


 1차 직봉전쟁의 전선은 매우 길었습니다. 서로군의 전투가 가장 치열했고, 동로군이 그 다음이고 중로 전선은 좀 느슨했던 편입니다. 그런데 봉군 서로군 총사령 장경혜는 장작림이 마적 시절부터 따라온 동지였는데, 직군을 대하여 싸우는데 작전 수행이 부족한데다 마음도 굳세지 못했습니다. 



 장경혜

 전투가 벌어지기전 1922년 봄, 장작림이 부하 장령들을 소집해 직군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물을때, 장경혜와 장작상 같은 원로는 주전론을 펴지 않았습니다. 장경혜는 봉군의 역량이 북경 전역을 장악할 수 없고 실력의 차이가 있다고 하여 회의적이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적극적 주전론자는 장학량, 양우정 이 두명이었습니다. 장작림이 전투를 결심했을때도 장경혜는 여기저기를 오고가며 양측의 감정을 해소시키려고 노력하다가, 막상 전투가 벌어지자 어쩔 수 없이 총사령을 맡은 것입니다. 사정이 그러하니 전투도 적극적인 의욕을 벌이지 않았는데, 가령 전투는 28일 밤부터 시작했는데 장경혜가 전선에 도착한것은 29일이 되고 나서 입니다. 


 마음가짐이 이렇게 되자 장경혜가 오패부의 상대가 될리 만무했습니다. 바로 그 29일 서로전선에서 오패부는 봉군의 우익을 찔러버렸고, 봉군은 곤경에 빠져 후퇴했습니다. 막 도착한 장경혜는 60여명의 호위병을 거느리고 전투를 독려해서 가까스로 진지를 회복했습니다. 이때 장경혜 1사단에 속해있던 기병단이 큰 공을 세웠습니다.


 30일이 되었을때는 양조동(梁朝棟) 여단의 전투력이 딸리자 2부대 사령이던 추분이 16사단을 이끌고 지원을 왔습니다. 그런데 추분의 부대는 막 몽고에서 온 부대로 말에서 내리기도 전에 전투에 투입되어 피로가 가중되어 병사들의 불만이 대단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추분이 가벼운 부상을 입어 전선에서 후방으로 이동하자, 추분 사단의 군심은 순식간에 요동을 쳐습니다. 급기야 16사단은 총 뿌리를 거꾸로 들고 오히려 봉군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사실 16사단은 직계의 수령이었던 풍국장의 부대였는데, 봉계가 장악한것이라서 몸은 봉천파에 속해있지만 마음은 직예파에 있었던 것입니다.


 3부대 사령인 정전승 역시 사방에서 직군이 포위해서 들어오는 통에 낭패에 빠졌습니다. 이렇게 되자 장경혜는 전선 철수 명령을 내렸습니다. 서부 전선은 봉군이 직군에 완전하게 밀려버렸던 것입니다. 5월 3일, 봉군의 후퇴 소식을 들은 오패부는 추격 명령을 내려 상당수의 봉군을 무장해제 시켰습니다.


 5월 4일, 장작림은 전선이 기울어져 가는것을 느꼈습니다. 서부 전선의 소식이 전해지자 동부 전선에서도 봉군의 투지는 완전히 상실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눈치 빠른 장작림이 대세가 어렵게 됨을 느끼고 즉시 천진으로 돌아가고 총퇴각령을 내렸습니다. 직군은 기세를 몰아 봉군을 추격했지만, 산해관을 넘어서까지 진격하진 않았습니다.


 장경혜는 장작림을 따라가지 않고 북경에 머물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청하면서 동시에 조곤에게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 하기를 권했습니다. 북경 정부는 장경혜에게 죄를 묻지 않았습니다. 5월 5일, 대총통 서세창은 공식적으로 명령을 내렸습니다.


 "봉군은 즉시 철수하여 출관하라. 직군은 원래의 위치에 돌아가라. 중앙의 명령을 듣도록 하기 바란다."


 여기저기에 시달리며 산전수전을 다 겪은 서세창은 장작림의 죄를 묻지 않고 솜방망이 처벌만 하면서 일을 무마했습니다. 그는 대신 양사이 등에게 책임을 전가했고, 체포령이 떨어지자 양사이는 일본으로 도주합니다. 이렇게 1차 직봉대전이 끝났습니다.


신경전부터 전쟁은 1년이나 걸렸지만, 실제적은 싸움은 6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장작림이 적절한 시기에 체면 생각하지 않고 후퇴한 덕분에, 그는 관내 지역의 기반을 잃긴 했지만 주력을 잃지 않아 군사적 실력은 근본적으로 큰 타격을 입은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일본 제국주의가 동북에서 웅크리고 있기에 오패부도 산해관을 넘긴 곤란했고, 동시에 쑨원의 북벌군에 신경을 썻기 때문에 전투는 이 정도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전투의 승리로 오패부는 중원의 패자가 되었지만, 아직 장작림은 건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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