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6년1월 금군 1차 [개봉포위병력]과 [송근왕병]의 규모

 1126년 금군에 의한 1차 개봉 포위 전의 상황입니다.

1126년 1월 8일 송의 이절(李棁)이 종망(宗望)의 군영에 와서 무릎을 기며 화친을 애걸하자,
종망은 다음과 같은 조건을 강화의 조건으로 내세웁니다.

1. 금 500만, 은 5000만, 우마 1만, 비단 100만을 금군 잔치 비용으로 댈 것.
2. 금황제를 백부로 삼고, 송 황제는 조카로 함.
3. 연, 운의 요나라에서 송으로 넘어간 자들을 반환할 것.
4. 3진(중산, 태원 하간)을 할양할 것.
5. 인질(친왕과 재상)을 낼 것.
6. 금군이 황하를 안전하게 도강할 수 있게 할 것


이에 강화협상이 체결되어 송 조정은 개봉성내의 100만 민간인의 재물을 모두 거둬들여
금 20만, 은 400만을 금군의 진영에 매일 보내게 됩니다.
이에 이강이 굴욕적인 강화협상을 조목조목 비판하며, 근왕병이 모일 시간을 끌어
금군을 격파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1. 금군이 요구한 금액은 송의 모든 재물을 모아도 부족함.
2. 3진은 송의 울타리임, 이것을 주면 나라를 지킬 수 없음.
3. 재상은 인질로 보낼 수 있으나 친왕은 절대 안됨.
4. 말 잘하는 사신을 보내 말로서 시일을 끌 것.
5. 근왕병이 모이면, 자동으로 금군이 퇴각할 것임.
6. 그때 가서 맹약을 맺는다면, 다시는 쳐들어 오지 못할 것임.


이때 이강의 말 중에 금군이 6만이라는 단서가 나옵니다.

송사(宋史) 이강(李綱) 열전中
時朝廷日輸金幣,而金人需求不已,日肆屠掠
四方勤王之師漸有至者,種師道、姚平仲亦以涇原、秦鳳兵至。
綱奏言:
「金人貪婪無厭,凶悖已甚,其勢非用師不可。且敵兵號六萬,而吾勤王之師集城下者已二十余萬
   彼以孤軍入重地,猶虎豹自投檻阱中,當以計取之,不必與角一旦之力。
   若扼河津,絕餉道,分兵複畿北諸邑,而以重兵臨敵營,堅壁勿戰,如周亞夫所以困七國者。
   俟其食盡力疲,然後以一檄取誓書,複三鎮,縱其北歸,半渡而擊之;此必勝之計也。」
上深以為然,約日舉事。
이때 조정(朝廷)에서 금폐(金幣)를 일수(日輸/매일 실어 보냄)하였는데, 
그럼에도 금인(金人)은 수구(需求/쓸 만큼 구함)가 불이(不已/멈추지 않음)하고, 
날마다 방자하게 도략(屠掠/죽이고 노략질함)하였다.
사방(四方)에서 근왕(勤王)의 군으로 점점 이르고 있는 자(者)들이 있었고,
종사도(種師道)와 요평중(姚平仲)이 또한 경원(涇原)과 진봉(秦鳳)의 병(兵)으로써 이르렀다.

이강(李綱)이 주언(奏言/아뢰어 말함)하길
「금인(金人)이 탐람(貪婪/몹시 탐욕스러움)을 무염(無厭/물림이 없음)하고, 
   흉패(凶悖/흉악하고 패악함)함이 이심(已甚/너무 심함)하니,
   (금군의) 기세(其勢)는 (우리나라가) 용사(用師/군을 이용함)하지 않으면 (꺾음이) 불가(不可)합니다.
   또 적병(敵兵)이 육만(六萬)이라 부르는데, 
   그러나 우리의 근왕(勤王)의 군대로 성 아래에 집결(集結)한 자가 이미 20여만(萬)입니다.

   저쪽이 고군(孤軍/고립된 군)으로 중지(重地)에 들어왔으니, 오히려 호표(虎豹/호랑이와 표범)가 
   함정(檻阱/함정陷穽) 가운데로 자투(自投/스스로 뛰어듦)한 셈이니,
   마땅히 계책(計策)으로써 취(取)하고, 일단(一旦/한번)의 힘은 불필(
不必/필요가 없음)합니다.

   만약 (황하의) 하진(河津/나루)을 움켜잡고, 향도(餉道/군량 수송길)를 끊고,
   분병(分兵/병력을 나눔)하여 기북(畿北/수도 이북)의 제읍(諸邑)을 회복(回復)하며,
   그리고 중병(重兵)으로 적영(敵營/적의 진영)을 임(臨)하고, 견벽(堅壁/진지를 굳게 지킴)하고 싸우지 않는 것은,
   주아부(周亞夫)가 이로써 7국(國)의 사람들을 곤란(困難)하게 한 것과 같습니다.

   그 식량(食糧)이 다하여 역피(力疲/힘이 피곤함)함을 기다려, 
   연후(然後)에 하나의 격문(檄文/적을 설득하거나 힐문하는 글)을 보내 서서(誓書/맹세하는 서문)를 취(取)하고,
   삼진(三鎮)을 회복(回復)하며, 그 북귀(北歸/북으로 돌아감)를 기다려,
   (황하를) 반도(半渡/강을 절반쯤 건넘)할 때 만약 공격(攻擊)한다면, 
   이는 필승(必勝)의 계책(計策)입니다.」
상(上/흠종)이 심(深)히 위연(為然/그러함, 허락함)으로써, 
약일(約日/기일을 약속함)하여 거사(舉事/일을 행함)하였다.

*주아부(周亞夫) : 전한초 효경제(孝景帝) 당시의 인물로, 개국공신 강후(絳侯) 주발(周勃)의 아들로,
                         기원전 154년 오초(吳楚) 등 7국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주아부가 이를 토벌하였는데,
                         빨리 진압하라는 황제의 명령을 거부하고, 굳게 보루를 지키고 오초의 후방 식량 보급로를 차단하여
                         드디어 7국의 난을 진압하였음.


속자치통감장편습보(續資治通鑑長編拾補) 1126년 1월17일 기사中
癸巳,大雾四塞。
李纲、李邦彦、吴敏、种师道、姚平仲、折彦质同对於福宁殿,议所以用兵者。
纲奏曰:
金人之兵张大其势,然其实不过六万,又大半皆奚、契丹、渤海杂种。
  吾勤王之师集城下者二十馀万,固已数倍之矣。
   彼已孤军入重地,正犹虎豹自投於槛穽中,当以计取之,不可与角一旦之力。
   为今之策,莫若扼关津,绝粮道,禁抄掠,分兵以复畿北郡邑,俟彼游骑出则击之,
   以重兵临贼营,坚壁勿战,如周亚夫所以锢七国者,俟其刍粮乏人马疲,
   然后以将帅檄取誓书,复三镇,纵其归,中渡击之,此必胜之计也。”
上然之。
계사일(癸巳日)에, 대무(大雾/짙은 안개)가 사새(四塞/비정상적인 기후변화)하였다.
이강(李纲), 이방언(李邦彦), 오민(吴敏), 충사도(种师道), 요평중(姚平仲), 절언질(折彦质)이 
복저전(福宁殿)에서 동대(同对/함께 마주함)하여, 용병(用兵)에 관해서 의논(議論)하였다.
이강(李纲)이 아뢰어 말하길
금인(金人)의 병(兵)이 그 세력(勢力)을 장대(张大/과장함)하나, 
  기실(其实/사실)은 육만(六万)에 불과(不过)함이 틀림이 없고,
  또 대반(大半/태반太半)이 모두 해족(奚族), 글단족(契丹族/거란족), 발해족(渤海族)의 
  잡충(杂种/잡종, 종족이 썪힘)입니다.
  우리의 근왕(勤王)의 군대로 성(城) 아래에 집결(集結)한 자(者)가 20여만(万)이니, 
  이에 이미 수배(数倍)에 이릅니다.
   저쪽이 이미 고군(孤軍/고립된 군)으로 중지(重地/깊은 땅)에 들어왔으니,
   오히려 호표(虎豹/호랑이와 표범)가 함정(槛穽) 가운데로 자투(自投/스스로 뛰어듦)한 것과 같으니,
   당연(當然)히 계책(計策)으로써 취(取)하고, 일단(一旦/한번)의 힘으로 여각(与角/더불어 겨룸)함은 불가(不可)합니다.
   지금의 책략(策略)으로 하여, 만약 관진(关津/고개와 나루)을 움켜쥠을 꾀하고, 양도(粮道/식량 보급로)를 끊고,
   (금군의) 초략(抄掠/약탈)을 금(禁)하며, 
   분병(分兵/병을 나눔)하여 기북(畿北/경기 북부)의 군읍(郡邑)을 회복(回復)함으로써,
   대기(待機)하여 저쪽 유기(游骑/정찰 기병)가 나타나면 곧 공격(攻擊)하고,
   중병(重兵)으로써 적영(贼营/적의 진영)에 임(临/대함)하고, 견벽물전(坚壁勿战/보루를 굳게 지키고 싸우지 않음)하여,
   주아부(周亞夫)가 이로써 7국(國)의 사람들을 막은 것과 같으니,
   그 추량(刍粮/꼴과 군량)이 모자라 인마(人马)가 피곤(疲困)할 때를 기다려,
   (그런) 연후(然后)에 장수(将帅)로써 격문(檄文/적을 설득하거나 힐문하는 글)을 보내 서서(誓书/서약서)를 취(取)하고,
   삼진(三镇)을 회복(回復)하고, 그 돌아감을 내버려 두었다가, (황하를) 도하(渡河)하는 중(中)에 공격(攻擊)한다면,
   이는 필승(必勝)의 계책(計策)입니다.」
상(上/흠종)이 허락하였다.

<1차 개봉 포위전 연표 : 출처 금사>

1125년

10

7

종한+희윤+여도 서경에서 출발
달라+사야 남경에서 출발
종망+도모 남경에서 출발

12

3

종한 삭주 함락

12

4

종망 백하에서 송 곽약사와 싸워 대파

12

9

송 곽약사 항복, 연산 평정

12

11

종한 대주 함락

12

19

종망 진정에서 송 5천군 격파

12

21

종한 태원 포위
야율여도 송 하동+섬서 원병 분하에서 격파

12

27

종망 신덕부 함락

1126년

1

2

종필 탕음 함락
대변 춘주 함락
적고보 여양 함락

1

3

금군 황하 도하

1

4

종망이 오효민을 사신으로 개봉에 보냄
휘종 태자에게 선위하고 개봉 탈출

1

7

금군이 개봉성 포위

1

8

송의 이절이 사신으로 와 사죄, 화친 애걸
종망이 수호 허락, 화친 조건 제시

1

12

강왕 조구, 소재 장방창 인질로 보냄

1

15

송이 서약서와 3진의 지도 바침
조카라 칭함

1

17

금군 포위 품

2

1

송 근왕병 요평중 40만명으로 종망 군영 습격, 격퇴

2

3

금군 다시 개봉성 포위
송과 화친 재성립, 인질 조추로 교대
금군 회군 시작

2

16

활주와 준주 송에 다시 내줌
종한 위승군, 융덕부 함락

3

17

종한 서경으로 돌아옴

 
*2월1일 밤에 송 근왕병 요평중이 금군을 기습한 병력은 금사에는 40만이나, 이는 잘못된 것으로
 송사에는 충사도가 20만의 근왕병을 모았다고 하였으며, 2월1일 야밤에 금군을 기습한 것은
 요평중이 이끄는 1만 병으로, 본시 요평중이 충사도를 시기해 휘하의 1만 명으로 단독으로 금군을 공격한 것으로 되어 있음.
 이에 금이 요평중의 움직임을 알아차리고 알리불을 보내 역습을 해왔으며 이에 요평중은 처벌을 두려워해 
 그대로 도주하였으며, 금군이 다시 개봉성을 포위함.
*금군이 다시 개봉성을 포위하자 이강이 군을 이끌고 요격하여 금군을 일시 후퇴시키고, 다시 강화협상을 진행하여
  2월1일의 야밤 습격은 요평중의 단독 행동임을 주장함.
  이때 충사도의 근왕병 20만이 개봉에 근접하자 금군은 서둘러 강화협상을 끝내고, 미처 받기로 한 금은비단을
  후일로 기약한 채 곧장 황하를 건너 회군함
*20만 근왕병이 개봉에 이르자, 흠종은 금군을 추격하라고 명령하였고,
 장병들이 환호하며 금군을 추격하여 형주까지 도달하였으나, 
 조정 대신들은 개봉의 수비 병력이 허술하다는 핑계를 대며 회군을 명령함.
 이에 다시 이강은 금군을 추격하는 것은 국가의 존망이 달린 일이라며 흠종에게 강력하게 주장하였고
 이에 흠종은 다시 추격을 명령함.
 당시 조정에서는 국방을 담당하는 추밀원에서는 추격을 주장하였고,
 국정을 총괄하는 상서성에서는 강화가 이루워졌으니 금군을 호송하여 국경 밖으로 보내야 한다고 주장함.
 재차 금군 추격 명령을 받은 충사도는 즉각 황하를 도강한 후 택주에 주두하던 금군 공격 계획을 조정에 전달함
 허나 상서성에서 충사도의 계획에 의문을 표하며 윤허하지 않음.
 한편 3진을 할양 받기 위해 3진으로 진군한 금군은, 3진이 모두 항복하지 않고 수비를 강화하며
 충사도의 근왕병이 진군한다는 소식을 듣자, 3진 점령을 뒤로하고 국경을 넘어 회군함.


결론
→ 1차 개봉 포위전의 금군 병력 약 6만
→ 금군의 구성 : 여진족(개인적으로는 1만 정도로 추정) + 해족 + 거란족 + 발해인 
    금사에 의하면 애초에는 해+거란+발해인에게 지급된 무기를 회수하려 하였는데
    태종 오걸매가 1125년 11월19일에 회수하지 말라는 조서를 내리기도 하였음.
    그만큼 요가 망한지 몇 달 안되어, 이때까지만 하여도 여진족이 각 종족을 믿지 못하였고,
    그만큼 각 종족 간의 결합이 느슨한 것으로 생각됨.
→ 애초 금에서 출발한 3로군 중 2로군을 지휘하여 개봉을 포위한 것은 아골타의 2남인 종망
→ 나머지 1로군을 맡은 장수는 종한으로 종망이 개봉을 포위하였을 당시 태원을 공격하고 있었음.
→ 종한의 병력은 3만 정도로 추정됨
    즉 1차 대송전에 참여한 금군의 총합은 약 9만 정도로 생각됨. (이중 여진족은 개인적인 추정으로는 2만 정도로 생각됨)

→ 송 근왕병은 약 20만임 → 충사도가 방을 붙여 소문내길 백만이라 칭함 → 금사에는 근왕병 40만이라 기록됨
→ 1127년 2월1일의 송군에 의한 야습은 금사의 기록처럼 송 근왕병 40만이 출동한 것이 아니라
    요평중이 휘하 1만의 병력으로 야습했다가 요격 당하자 곧장 후퇴한 사건임.
    야습은 흠종의 명령이었음. 충사도는 야습하라는 흠종의 명령에도 근왕병이 더 모일 때까지 불가하다고 말함.
    허나 공을 탐낸 요평중이 휘하의 병력을 이끌고 감행한 사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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