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 보고 번역하는 것이라, 오역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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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慶八年。
천경(天慶/요 천조제의 #2 연호) 8년 (1118년)
春正月,燕王淳將討怨軍而遇女真於徽州之東,未陣而潰。
初,女真入攻前後多見天象,或白氣經天,或白虹貫日,或天狗夜墜,或彗掃西南,赤氣滿空,遼兵輒敗。
是夕,有赤氣若火光,自東起,往來紛亂,移時而散。
軍中以謂凶兆,皆無鬭志。
봄 1월에, 연왕(燕王) 순(淳)이 장차(將次) 원군(怨軍)으로써 토벌(討伐)하고자 휘주(徽州)의 동쪽에서
여진(女真)과 조우(遭遇)하였는데, (미처) 진(陣)을 치지 못하고 무너졌다.
처음에, 여진(女真)이 입공(入攻/공격하여 들어옴)한 전후(前後)에 천상(天象/하늘의 현상)이 다견(多見/많이 보임)하였는데,
혹(或)은 백기(白氣/하얀 기체)가 경천(經天/하늘을 가로지름)하고,
혹(或)은 백홍(白虹/흰 무지개)이 관일(貫日/해를 꿰뚫음)하며,
혹(或)은 천구(天狗/유성과 혜성)가 야추(夜墜/밤에 떨어짐)하고,
혹(或)은 혜성(彗星)이 서남(西南)쪽으로 없어지고,
적기(赤氣/붉은 기운)가 만공(滿空/공중에 가득함)하니, 요병(遼兵)이 문득 패(敗)하였다.
이날 밤에, 화광(火光/불같은 빛)과 같은 적기(赤氣/붉은 기운)가 있어, 동(東)쪽에서 일어나,
왕래(往來/가고 옴)하니 분란(紛亂/매우 어지러움)하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흩어졌다.
군중(軍中)에서 흉조(凶兆)라 일컫었는데, 모두 투지(鬭志)가 없었다.
燕王與麾下五百騎,退保長泊、魚務。
於是女真入新州,節度使王從輔開門降,女真焚掠而去。
所經成、懿、濠、衞四州皆降,犒勞而過。
女真別遣闍母國王,攻怨軍於顯州,怨軍大敗。
蕭幹奔毉巫閭山牽馬嶺,招收殘卒,不滿萬人。
女真以馬疲,破乾、顯等州,焚掠而歸。
연왕(燕王)은 휘하(麾下) 500 기(騎)와 함께, 장박(長泊)과 어무(魚務)로 퇴보(退保/퇴각)하였다.
이에 여진(女真)이 신주(新州)로 들어가니, 절도사(節度使) 왕종보(王從輔)가 개문(開門)하여 항복(降伏)하였고,
여진(女真)이 분략(焚掠/불사르고 약탈함)하고는 가버렸다.
(여진이) 지나는 곳의 성주(成州), 의주(懿州), 호주(濠州), 위주(衞州)의 4주(州)가 모두 항복하였고,
(여진이) 호로(犒勞/음식을 주어 위로함)하면서 지나갔다.
여진(女真)이 별도로 도모(闍母) 국왕(國王)을 보내, 현주(顯州)에서 원군(怨軍)을 공격하니, 원군(怨軍)이 대패(大敗)하였다.
소간(蕭幹)이 의무려산(毉巫閭山)의 견마령(牽馬嶺)으로 달아나,
잔졸(殘卒/남은 병졸)을 초수(招收/불러 거둠)하였는데, 만 명이 차지 못하였다.
여진(女真)의 말이 피곤(疲困)하여, 건주(乾州)와 현주(顯州) 등의 주(州)을 깨트리고는,
분략(焚掠/불사르고 약탈함)하고는 돌아갔다.
天祚在中京,聞燕王兵敗,女真入新州,晝夜憂懼,潛令內庫三局官,
打包珠玉、珍玩五百餘囊,駿馬二千匹,夜入飛龍院餵養為備。
嘗謂左右曰:
「若女真必來,吾有日行三百五十里馬若干,又與宋朝為兄弟,夏國舅甥,皆可以歸,亦不失一生富貴。所憂者,軍民受禍耳。」
識者聞之,私相謂曰:
「遼今亡矣!自古人主豈有棄軍民而自為謀身計者,其能享國乎?」
暨聞女真焚劫新州以歸,即以謂威德可加,彼何能為?復自縱肆。
천조(天祚)가 중경(中京)에 있을 때, 연왕(燕王)의 병(兵)이 패(敗)하고, 여진(女真)이 신주(新州)로 들어왔다는 것을 듣고는,
주야(晝夜)로 우구(憂懼/근심하고 두려워함)하여,
내고(內庫/임금의 창고)의 삼국관(三局官)에게 잠령(潛令/은밀히 명령함)하여,
주옥(珠玉/구슬과 옥)과 진완(珍玩/진귀한 보물) 500여 낭(囊/주머니)을 타포(打包/포장함)하고,
준마(駿馬/빠른 말) 2천 필(匹)을, 야밤에 비룡원(飛龍院)에서 들여 위양(餵養/먹이고 기름)하여 대비(對備)하게 하였다.
일찍이 일컫어 좌우(左右)에게 말하길
「만약 여진(女真)이 반드시 온다면, 우리는 말로 하루에 350리(里) 약간(若干/정도程度)을 갈 수 있는데,
또 송조(宋朝)와 함께 형제(兄弟)가 되었고, 하국(夏國)은 구생(舅甥/장인과 사위)이니,
모두 (양국에) 돌아감이 가능하니, 역시 일생(一生)의 부귀(富貴)를 부실(不失/잃지 않음)할 것이다.
근심이 되는 바는, 군민(軍民)의 수화(受禍/화를 입음)를 듣는 것이다.」
식자(識者/학식이 있는 사람)가 듣고는, 사사로이 서로 일컫어 말하길
「요(遼)가 지금 망(亡)하는 구나! 자고(自古)로 인주(人主/임금)가 어찌 군민(軍民)을 유기(有棄/버림이 있음)하고도,
스스로 신계(身計/일신을 위한 계책)를 꾀하니, 그 향국(享國/나라를 통치함)이 가능(可能)하겠는가?」
여진(女真)이 신주(新州)를 분겁(焚劫/불사르고 겁탈함)하여 돌아갔다는 소문(所聞)이 이르자,
곧 일컫기를 위덕(威德/위엄과 덕망)이 더하였는데, 저쪽이 어찌 능(能)히 하겠느냐?
다시 (천조제) 스스로 종사(縱肆/제멋대로 굼)하였다.
五月壬午朔,日有食之。
5월 초하루 임오일(壬午日)에, 일식(日食)이 있었다.
秋,女真陷東京、黃龍府、咸、信、蘇、復、辰、海、同、銀、通、韓、烏、遂、春、泰、靖等五十餘城。
內並邊二十餘州,各有和糴倉,依祖宗法,每歲出陳易新,許民自願假貸,收息二分,
所有無慮三五十萬碩,雖累歲舉兵,未嘗支用。
至是女真悉取之,據遼東、長春兩路。
是時有楊朴者,遼東鐵州人也,本渤海大族,登進士第,累官校書郎。
先是高永昌叛時,降女真,頗用事,勸阿骨打稱皇帝,改元天輔,以王為姓,以旻為名,以其國產金,號大金。
又陳說阿骨打曰:
「自古英雄開國受禪,先求大國封冊。」
가을에, 여진(女真)이 동경(東京)과 황룡부(黃龍府), 함주(咸州), 신주(信州), 소주(蘇州), 복주(復州), 진주(辰州), 해주(海州),
동주(同州), 은주(銀州), 통주(通州), 한주(韓州), 오주(烏州), 수주(遂州), 춘주(春州), 태주(泰州), 정주(靖州) 등
50여 성(城)을 함락(陷落)하였다.
(함락한 50여 성) 안의 모든 변경(邊境) 20여 주(州)에, 각각 화적창(和糴倉/쌀 창고)이 있었는데,
조종법(祖宗法/국가의 오래된 국법)에 의지(依支)하여,
매세(每歲/매해)마다 출진역신(出陳易新/묵은 것을 내보내고 새것으로 바꿈)하였는데,
자원(自願/스스로 원함)하여 백성에게 가대(假貸/곡식을 빌려줌)함을 허락(許諾)하니,
이분(二分/절반으로 나눔)하여 수식(收息/거두워 키움)하니,
소유(所有)가 무려(無慮) 350만 석(碩)이었는데, 비록 누세(累歲/여러 해)에 거병(舉兵/병을 일으킴)하여도,
일찍이 지용(支用/지출)하지 않았다.
이에 이르자 여진(女真)이 실취(悉取/모두 취함)하고, 요동(遼東)과 장춘(長春)의 양로(兩路)를 점거(占據)하였다.
이때 양박(楊朴)이란 자가 있었는데, 요동(遼東) 철주인(鐵州人)이며, 본래(本來) 발해(渤海)의 대족(大族)으로,
진사제(進士第)에 올라, 누관(累官/누차 벼슬이 오름)하여 교서랑(校書郎)이 되었다.
처음에 고영창(高永昌)이 반란(叛亂)하였을 때, (양박은) 여진(女真)에 항복하고,
자못 용사(用事/일을 처리함, 세력을 떨침)하였는데, 아골타(阿骨打)에게 황제(皇帝)를 칭(稱)할 것을 권(勸)하여,
천보(天輔)로 개원(改元/연호를 고침)하며, 왕(王)으로써 성(姓)을 삼고, 민(旻)으로써 이름을 삼으며,
그 나라에 금(金)이 산출(產出)됨으로, 국호(國號)를 대금(大金)이라 하였다.
또 아골타(阿骨打)에게 진설(陳說/진술, 설명)하여 말하길
「자고(自古)로 영웅(英雄)이 개국(開國)하고 수선(受禪/임금의 자리를 물려받음)하면,
먼저 대국(大國)의 봉책(封冊/봉한다는 천자의 조서)을 구(求)하여야 합니다.」
八月,阿骨打遣人詣天祚求封冊,其事有十:
徽號大聖大明皇帝,一也;
國號大金,二也;
玉輅,三也;
袞冕,四也;
玉刻御前之寶,五也;
以弟兄通問,六也;
生辰、正旦遣使,七也;
歲輸銀絹二十五萬疋兩,分南宋歲賜之半,八也;
割遼東、長春兩路,九也;
送還女真阿鶻產、趙三大王,十也。
8월에, 아골타(阿骨打)가 견인(遣人/사람을 보냄)하여 이르러 천조(天祚)에게 봉책(封冊))을 구(求)하였는데,
그 (구하는) 일에는 열 가지가 있었다.
휘호(徽號/존호)를 대성대명황제(大聖大明皇帝)라 봉책하는 것이, 일(一)이다.
국호(國號)를 대금(大金)이라 봉책하는 것이, 둘(二)이다.
옥로(玉輅/주옥으로 꾸민 천자의 수레)를 보내는 것이, 삼(三)이다.
곤면(袞冕/곤룡포袞龍袍와 면류관冕旒冠)을 보내는 것이, 사(四)이다.
옥각(玉刻/옥에 글을 새김)한 어전지보(御前之寶/옥새)를 보내는 것이, 오(五)이다.
제형(弟兄/아우와 형)으로써 통문(通問/왕래하고 방문함)하는 것이, 육(六)이다.
생진(生辰/생신)과 정단(正旦/설날)에 견사(遣使/사신을 보냄)하는 것이, 칠(七)이다.
세수(歲輸/해마다 보냄)하는 은견(銀絹/은과 비단)이 25만 필량(疋兩/비단과 돈의 수량)이고,
남(南)쪽의 송(宋)이 세사(歲賜/해마다 줌)하는 반(半)을 나누는 것이, 팔(八)이다.
요동(遼東)과 장춘(長春)의 양로(兩路)를 할양(割讓)하는 것이, 구(九)이다.
여진인(女真人) 아골산(阿鶻產)과 조삼대왕(趙三大王)을 송환(送還)하는 것이, 십(十)이다.
天祚付羣臣等議。
蕭奉先大喜,以為自此無患,差靜江軍節度使蕭習泥烈、翰林學士楊勉充封冊使、副,
歸州觀察使張孝偉、太常少卿王甫充通問使、副,
衞尉少卿劉湜充管押禮物官,將作少監楊立忠充讀冊使,備天子袞冕、玉冊、金印、車輅、法駕之屬,
冊立阿骨打為東懷國至聖至明皇帝。
천조(天祚)가 군신(羣臣/여러 신하) 등에게 (10가지 조건에 대해) 맡기어 의논(議論)하게 하였다.
소봉선(蕭奉先)이 대희(大喜/크게 기뻐함)하여, 이로부터 무환(無患/근심이 없음)하다 여겨,
정강군(靜江軍) 절도사(節度使) 소습니열(蕭習泥烈)과 한림학사(翰林學士) 양면(楊勉)을
봉책사(封冊使)와 봉책부사(封冊副使)로 충원(充員)하고 파견(派遣)하여,
귀주(歸州) 관찰사(觀察使) 장효위(張孝偉)와 태상소경(太常少卿) 왕보(王甫)를 통문사(通問使)와
통문부사(通問副使)로 충원(充員)하고,
위위소경(衞尉少卿) 유식(劉湜)을 관압예물관(管押禮物官)에 충원(充員)하고,
장작소감(將作少監) 양립충(楊立忠)을 독책사(讀冊使)로 충원(充員)하고,
천자(天子)의 곤면(袞冕/곤룡포와 면류관)과 옥책(玉冊/존호를 올리는 문서), 금인(金印/금으로 만든 도장),
차로(車輅/임금의 수레), 법가(法駕/임금의 수레)를 끌 무리를 준비(準備)하여,
아골타(阿骨打)를 책립(冊立)하여 동회국지성지명황제(東懷國至聖至明皇帝)로 삼았다.
其冊文略曰:
「眷惟肅慎之區,實介扶餘之俗。
土濱上國,材布中嶔,雅有山川之名,承其父祖之蔭。
碧雲袤野,固須挺於渠材;
皓雪飛霜,疇不推於絕駕。
封章屢報,誠意交孚,載念遙芬,宜膺多戩。
是用遣蕭習泥烈等持節備禮,冊為東懷國至聖至明皇帝。
義敦友睦,地列豐腴。
嗚呼!戒哉欽哉,式孚于休。」
所有徽號,緣犯祖號,改為至聖至明,餘悉從之。
그 책문(冊文)을 간략(簡略)하여 말하면
「숙신(肅慎)의 구역(區域)을 권유(眷惟/돌아보아 생각해 봄)하면, 실(實)은 부여(扶餘)의 풍속(風俗)에 끼어있다.
땅은 상국(上國/요국)과 가까우며, 재포(材布/재목이 펼쳐짐) 가운데 높고 험한, 우아(優雅)한 산천(山川)의 이름이 있어,
그 부조(父祖/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음직(蔭職)을 계승(繼承)하였다.
벽운(碧雲/푸른 구름)이 무야(袤野/들판에 길게 늘어짐)하니, 진실로 마땅히 거재(渠材/개천의 재목)에서 특출(特出)하였다.
호설(皓雪/흰 눈)이 비상(飛霜/서리처럼 내림)하니, 이랑을 끊어진 가마(駕馬)에 기대어 밀지 않았다.
봉장(封章/임금에게 올리는 글)을 누보(屢報/여러 번 보고함)하였고, 성의(誠意)로 교부(交孚/사귀어 믿음이 있음)하니,
실려오는 요분(遙芬/멀리 향기로움)을 생각하면, 마땅히 가슴이 다전(多戩/복이 많음)하였다.
이로써 소습니열(蕭習泥烈) 등에게 부절(符節)을 지니고 예를 갖추어 보내,
책(冊)하여 동회국지성지명황제(東懷國至聖至明皇帝)로 삼는다.
의돈(義敦/도타운 의리)이 우목(友睦/벗하여 화목함)하니, 땅에 풍유(豐腴/풍년이 들고 비옥함)가 늘어섰다.
오호(嗚呼)라! 경계(警戒)하고 공경(恭敬)하고, 본받아 경복(慶福)을 누릴지어다.」
소유(所有)한 휘호(徽號)가, 조호(祖號/임금을 조라 호칭함)를 범(犯)한 연고(緣故)로, 고쳐 지성지명(至聖至明)으로 하고,
나머지 모두는 (원문 그대로) 따랐다.
使人自十月發行,冬十二月至金國,楊朴以儀物不全用天子之制,又東懷國乃小邦懷其德之義,
仍無冊為兄之文,如「遙芬多戩」,皆非美意,彤弓象輅,亦諸侯事;
「渠材」二字,意似輕侮。
命習泥烈歸易其文,隨答云:
「兄友弟恭,出自周書,言友睦則兄之義見矣。」
楊朴等面折以為非是。
阿骨打大怒,叱出使、副,欲腰斬之,粘罕諸人為謝乃解,尚人笞百餘。
사인(使人/사자)이 10월에 발행(發行/출발)하여, 겨울 12월에 금국(金國)에 이르니,
양박(楊朴)이 (요가 가져온) 의물(儀物/의장용 물건)이 천자(天子)의 제도(制度)에 사용키엔 불전(不全/완전치 않음)하고,
또 동회국(東懷國)은 곧 소방(小邦/소국)이 그 (큰 나라의) 덕(德)의 의(義)로움을 생각한다는 뜻이며,
거듭하여 (아골타를) 형(兄)으로 하여 책(冊)한다는 글이 없고,
「요분(遙芬/멀리 향기로움) 다전(多戩/복이 많음)」과 같은 것은, 모두 미의(美意/아름다운 뜻)가 아니며,
동궁(彤弓/붉은 칠을 한 활)과 상로(象輅/상아로 만든 수레)는, 또한 제후(諸侯)의 일이고,
「거재(渠材/개천의 재목)」두 글자는, 뜻이 경모(輕侮/하찮게 보고 업신여김)와 같다 하였다.
(양박이) 명(命)하여 습니열(習泥烈)에게 그 문장을 바꾸게 하라 하여 돌려 보냈는데, 곧바로 답(答)하여 이르기를
「형우제공(兄友弟恭/형제끼리 우애가 깊음)은, 주서(周書/북주北周의 사서)에서부터 나오니,
우목(友睦/우애가 있고 화목함)이라 말은 곧 형(兄)의 의견(義見/올바른 견해)이다.」
양박(楊朴) 등이 옳지 못하다 하여 면절(面折/면대하여 몹시 꾸짖음)하였다.
아골타(阿骨打)가 대노(大怒)하여, 사(使)와 부(副)를 꾸짖으며, 요참(腰斬/허리를 자름)하고자 하였는데,
점한(粘罕)과 많은 사람이 그만두게 하고 이에 풀어주려 하였는데, 오히려 사람들에게 100여 대를 매질하였다.
次年三月,止遣蕭習泥烈、楊立忠回,云:
「冊文駡我,我都不曉。
徽號、國號、玉輅、御寶我都有之,須稱我大金國皇帝兄即已,能從我,今秋可至軍前;
不然,我提兵取上京矣!」
天祚惡聞女真事。
蕭奉先揣其意,皆不以聞,遷延久之,聞上京已破,和議遂寢。
後天祚雖復請和,皆不報。
다음 해 3월에, (아골타가) 돌려보내는 것을 멈추고 소습니열(蕭習泥烈)과 양립충(楊立忠)을 돌아오게 하여, 이르기를
「책문(冊文)에서 나를 욕하고, 아도(我都/우리나라)를 불효(不曉/깨닫지 못 함)하였다.
휘호(徽號)와 국호(國號) 및 옥로(玉輅)와 어보(御寶)는 아도(我都/우리나라)에도 있고,
모름지기 나 대금국황제(大金國皇帝)가 형(兄)을 이미 칭(稱)하였으니,
능(能)히 종아(從我/나를 따름)하여, 금추(今秋/올가을)에 군(軍) 앞에 이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렇지 아니한다면, 내가 제병(提兵/군을 이끎)하여 상경(上京)을 취(取)하겠도다!」
천조(天祚)가 여진(女真)의 일을 오문(惡聞/듣는 것을 싫어함)하였다.
소봉선(蕭奉先)이 그 뜻을 헤아려, 모두 이문(以聞/임금께 아룀)하지 않고, 천연(遷延/지체, 시일을 미룸)이 오래 되니,
상경(上京)이 이미 격파(擊破)되었다는 것을 듣고는, 화의(和議/화해의 의논)이 드디어 중지되었다.
후(後)에 천조(天祚)가 아무리 다시 청화(請和/화해를 청함)하여도, (금이) 모두 대답(對答)하지 않았다.
*삼조북맹회편 中
→ 眷惟肅之區實界扶餘之俗 : 숙신의 구역을 권유하면 실은 부여의 풍속의 경계에 있다.
眷惟肅慎之區實界扶餘之俗土濱巨浸財布中區雅有山川之名
承其父祖之構碧雲:袤野固宜梃於巨植物告發飛箱疇不推於絕駕章封屢報誠意交孚載念遙芬宜膺多戩是用遣蕭習泥烈(改作實訥埒)等持節備禮策為東懷國至聖至明皇帝嗚呼義敦友睦地列豐腴惟信可以待人惟寬可以馴物戒哉!欽哉!式孚於休玉輅與象輅禦寶玉刻東懷國印到其國楊朴以冊文非是阿骨打(改作阿固達)大怒鞭其使卻回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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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부 요약
-1월 연왕 야율순 원군으로 휘주에서 여진군과 싸워 패배 (하늘에 흉조가 나타나 요 병사들의 투지가 없어짐)
-연왕이 500기 이끌고 장박, 어무로 퇴각
-여진 신주 공격하니 절도사 왕종보 항복→여진 약탈하고 돌아감
-여진 도모가 현주의 원군 공격하여 대패시킴
-소간 견마령으로 도주 잔졸이 만 명이 안됨
-여진이 건주, 현주를 약탈하고 돌아감
-천조가 중경에서 연왕의 패배와 여진이 신주로 들어오니 두려워하여
내탕고의 보물 500포대와 말 2천필을 준비하여 도망갈 것을 준비함
→여진이 회군하자 스스로 위엄 있다 평하며 다시 방탕한 생활을 함
-5월1일 일식 발생
-7월 가을에 여진이
동경, 황룡부,함주,신주,소주, 복주,진주,해주,동주, 은주,통주,한주,오주, 수주,춘주,태주,정주 등 50여 성 함락
→ 20여 주에 350만 석의 비축 군량 여진으로 넘어감
→요동과 장춘 점거
-요 교서랑 발해인 양박이 고영창의 난 당시 여진에 항복한 후 일을 잘 처리함
→아골타에게 황제 칭호 및 연호 제정, 요의 봉책 권유
-8월 아골타 천조제에게 봉책 요구하고 10가지 조건 내세움
-천조제 조건 의논함
-소봉선 크게 기뻐하며 소습니열+양면을 봉책사, 장효위+왕보를 통문사, 외에 유식,양립충 등을 보냄
-10월 요의 책봉 사신단 출발
-12월 사신단 금국에 이르자 양박이 결례이고 책문이 잘못되었다고 꾸짖음
→아골타 대노, 모두 죽이려 하자 점한 등이 만류
-거란국지 8부에서 계속됩니다.-
P.S) 본 글은 동의 없이 어느 곳에나 담아 가셔도 됩니다. 출처는 남겨주시면 고맙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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