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 보고 번역하는 것이라, 오역이 많습니다.
수정할 부분 알려 주시면,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
天慶六年
천경(天慶/요 천조제의 #2 연호) 6년 (1116년)
春正月朔夜,渤海人高永昌率兇徒十數人,乘酒恃勇,持刃踰垣入府衙,登廳,問留守所在,紿云:
「外軍變,請為備。」
保先纔出,刺殺之。
是夜,有戶部使大公鼎,本渤海人,登進士第,頗剛明,聞亂作,權行留守事,
與副守高清臣集諸營奚、漢兵千餘人,次日搜索元作亂渤海人,得數十人,並斬首,即撫安民。
倉卒之際,有濫被其害者。
小人喜亂,得以藉口,不可禁戢,一夜燒寨起亂。
初三日,軍馬抵首山門,大公鼎等登門,說諭使歸,不從。
初五日夜,城中舉火,內應開門,騎兵突入,陣於通衢。
大公鼎、高清臣督軍迎敵,不勝,領麾下殘兵百餘人,奪西門,出奔行闕。
高永昌自殺留守蕭保先後,自據東京,稱大渤海皇帝,改元應順,據遼東五十餘州,
分遣軍馬,肆其殺掠,所在州郡奚人戶,往往挈家渡遼以避。
獨瀋州未下。
宰相張琳,瀋州人也,天祚命討之。
琳先常兩任戶部使,有東京人望,至是募遼東失業者,并驅轉戶強壯充軍。
蓋遼東夙與女真、渤海有讎,轉戶則使從良,庶幾效命敢戰。
旬日之間,得兵二萬餘,隨行官屬、將領,聽從辟差。
봄 1월 초하루 밤에, 발해인(渤海人) 고영창(高永昌)이 흉도(兇徒/흉악한 무리) 십수 인을 거느리고,
술기운을 타고 용기를 믿어, 칼을 쥐고 담을 넘어 부아(府衙/관청)로 들어가,
등청(登廳/관청에 오름)하여, 유수(留守)의 소재(所在)를 물으며, 속여 말하길
「외부(外部)가 군변(軍變/군사의 움직임이 있음)하니, 청(請)컨데 방비(防備)해야 합니다.」
(이에) 소보선(蕭保先) 겨우 나갔는데, (흉도 무리가) 자살(刺殺/찔러 죽임)하였다.
이 밤에, 호부사(戶部使) 대공정(大公鼎)이 (관청에) 있었는데,
본래 발해인(渤海人)으로, 진사제(進士第)에 올라, 자못 강명(剛明/성질이 굳세고 명석함)하였는데,
난작(亂作/난을 일으킴)을 듣자, 유수사(留守事)를 권행(權行/임시로 대행함)하여,
부수(副守) 고청신(高清臣)과 함께 각 영(營)의 해족(奚族)과 한족(漢族) 병사 천여 명을 모아,
차일(次日/다음 날)에 난(亂)을 원작(元作/원래 일으킴)한 발해인(渤海人)을 수색(搜索)하여,
수십인을 사로잡아, 모두 참수(斬首)하고, 곧 백성을 무안(撫安/어루만지고 편안하게 함)하였다.
(그러나) 창졸지제(倉卒之際/창졸지간倉卒之間)에, (발해인 중에) 그 해(害)를 입은 자가 넘쳤다.
소인(小人)이 희란(喜亂/난을 좋아함)하여, 자구(藉口/핑계)로써 득(得)하니,
금즙(禁戢/단속하고 금함)이 불가(不可)하여, 일야(一夜/하룻밤)에 성을 불사르고 기란(起亂/난을 일으킴)하였다.
초사흗날에, 군마(軍馬)가 수산문(首山門)을 막자, 대공정(大公鼎) 등이 성문에 올라,
설유(說諭/말로 타이름)하여 돌려보내려 하였는데, 따르지 않았다.
초닷샛날 밤에, 성중(城中)에 화재가 일어나자, (성중에서 난을 일으킨 무리와) 내응(內應)하여 개문(開門/문이 열림)되었고,
(난을 일으킨 무리의) 기병(騎兵)이 돌입(突入)하여, 통구(通衢/통행하는 길)에 진(陣)을 쳤다.
대공정(大公鼎)과 고청신(高清臣)이 독군(督軍/군을 감독함)하여 영적(迎敵/적을 맞이함)하였는데,
이기지 못하고, 휘하(麾下)의 잔병(殘兵) 100 여인을 거느리고,
서문(西門)의 좁은 길로, 출분(出奔/도망하여 달아남)하여 행궐(行闕/궐에 감)하였다.
고영창(高永昌)이 스스로 유수(留守) 소보선(蕭保先)을 죽인 후에, 동경(東京)에 자거(自據/스스로 근거함)하여,
대발해(大渤海) 황제(皇帝)를 칭(稱)하고, 개원(改元/연호를 고침)하여 응순(應順)이라 하며,
요동(遼東) 50여 주(州)에 근거(根據)하여, 군마(軍馬)를 분견(分遣/나누어 보냄)하여,
그 살략(殺掠/살인과 약탈)을 제멋대로 하니, 주군(州郡)에 소재(所在)한 해족(奚族)의 인호(人戶/인가)가,
왕왕(往往) 피(避)하고자 설가(挈家/일가족을 모두 데리고 이동함)하여 요(遼)로 넘어갔다.
홀로 심주(瀋州)만이 (고영창에게) 넘어가지 않았다.
재상(宰相) 장림(張琳)은, 심주(瀋州) 사람인데, 천조(天祚)가 명(命)하여 (고영창을) 토벌(討伐)하게 하였다.
장림(張琳)은 예전에 항상 (동경의) 호부사(戶部使/지방의 조세 총관)를 양임(兩任/겸직)하였는데,
동경(東京)에서 인망(人望/뭇사람들이 칭찬하고 우러러봄)이 있어,
이에 이르러 요동(遼東)의 실업자(失業者/일을 잃어버린 사람)를 모집(募集)하고,
강장(強壯/강하고 굳셈)한 전호(轉戶/옮겨온 민호)를 병구(并驅/아우르고 앞세움)하여 충군(充軍/군을 채움)하였다.
대개(大槪) 요동(遼東)은 예로부터 여진(女真)과 발해(渤海)가 함께 유원(有讎/원수怨讐가 있음)하였는데,
전호(轉戶/옮겨온 민호↔정호正戶는 원래 있던 민호)를 곧 양종(從良/면천)하게 하니,
서기(庶幾/간절히 바람)로 효명(效命/목숨을 다해 일함)하여 감전(敢戰/결사적으로 싸움)하였다.
순일(旬日/열흘) 동안에, 병 2만여 명을 얻었는데,
관속(官屬/관청의 아전과 하인)과 장령(將領/장수)이 수행(隨行/따라서 감)하고,
벽차(辟差/차별을 피함)하여 청종(聽從/이르는 대로 잘 들어 좇음)하였다.
是春,天祚募渤海武勇馬軍高永昌等二千人,屯白草谷,備禦女真。
會東京留守太師蕭保先為政酷虐,渤海素悍,有犯法者不恕。
東京乃渤海故地,自阿保機力戰二十餘年始得之,建為東京。
이해 봄에, 천조(天祚)가 발해(渤海)의 무용(武勇/무예가 있고 용감함)한 마군(馬軍/기병) 고영창(高永昌) 등 2천인을 모아,
백초곡(白草谷)에 주둔(駐屯)하게 하여, 여진(女真)을 비어(備禦/준비하여 막음)하게 하였다.
동경유수(東京留守) 태사(太師) 소보선(蕭保先)이 행하는 혹학(酷虐/몹시 학대함)의 정치를 (발해인이) 만나자
발해(渤海)가 본시 사나웠는데, 범법자(犯法者)가 있으면 (소보선이) 불서(不恕/용서하지 않음)하였다.
동경(東京)과 더불어 발해(渤海)의 고지(故地/옛 땅)는,
아보기(阿保機/요 태조)가 스스로 20여 년을 전력(力戰/힘을 다해 싸움)하여 비로소 얻은 곳으로,
(지역명을) 동경(東京/현 요령성 요양시 일대)으로 하여 세운 것이다.
夏五月初,自顯州進兵,渤海止備遼河三叉黎樹口。
張琳遣羸卒數千,疑其守兵,以精騎間道渡河趨瀋州,渤海始覺,遣兵迎敵。
旬日間三十餘戰,渤海稍卻,退保東京。
張琳兵距城五里,隔太子河劄寨。
先遣人移文招撫,不從,傳令留五日糧,決策破城。
越二日,發安德州義軍先渡河,次引大軍齊渡,忽上流有渤海鐵騎五百,突出其傍,諸軍少卻,退保舊寨,
河路復為所斷,三日不得渡,衆以饑告,謀歸瀋州,徐圖後舉。
初七日夜移寨,渤海騎兵尾襲,強壯者僅得入城,老幼悉被殺掠。
是時軍伍尚整,方議再舉,忽承女真西南路都統闍母國王檄:
「準渤海國王高永昌狀,遼國張宰相統領大軍前來討伐,伏乞救援。當道於義,即合應援。已約五月二十一日進兵。」
檄到瀋州,衆以渤海詐作此檄,不為備。
是日,聞探東北有軍掩至,將士呼曰:
「女真至矣!」
張琳急整軍迎敵,將士望見女真兵,氣已奪,遂敗走入城。
女真隨入,先據城西南,後縱兵殺戮幾盡,孟初、劉思溫等死之。
張琳與諸子弟等并官屬縋城苟免,盡失軍資、器甲,隨入遼州,收集殘軍,坐是謫授遼興軍節度使。
여름 5월 초하루에, (장림이) 스스로 현주(顯州)로 진병(進兵/진군)하자,
발해(渤海)가 요하(遼河) 삼차하(三叉河)의 여수구(黎樹口)에 머무르며 방비하였다.
장림(張琳)이 파리한 병졸(兵卒) 수천을 보냈는데, 그 수병(守兵/수비하는 병사)을 의심(疑心)하여
(장림이) 정기(精騎/정예 기병)로써 간도(間道/샛길)로 (요하를) 도하(渡河)하여 심주(瀋州)로 재촉하여 가니,
발해(渤海)가 비로소 깨달아, 병(兵)을 (심주로) 보내 영적(迎敵/맞아 싸움)하였다.
순일간(旬日間/10일간) 30여 차례 싸웠는데, 발해(渤海)가 점점 물러나, 동경(東京)에 퇴보(退保/물러나 지킴)하였다.
장림(張琳)의 병(兵)이 (동경) 성(城) 5리 거리(距離)에, 태자하(太子河)를 사이에 두고 차채(劄寨/목책木柵을 침)하였다.
먼저 사람을 보내 이문(移文/동등한 관청 사이의 공문서)으로 초무(招撫/불러 어루만짐)하였는데,
(고영창이) 불종(不從/따르지 않음)하니, 전령(傳令/훈령訓令/영을 전함)하여 5일 치의 군량(軍糧)만큼 머무르며,
결책(決策/책략을 결정함)하여 파성(破城/성을 깨트림)하고자 하였다.
2일이 넘어가자, 안덕주(安德州)의 의군(義軍/의병)을 선발(選拔)하여 먼저 도하(渡河)하게 하고,
차례로 대군(大軍)을 인솔(引率)하여 가지런히 건넜는데, 홀연(忽然)히 상류(上流)에 발해(渤海)의 철기(鐵騎) 5백이 있어,
그 곁에 돌출(突出/갑자기 나타남)하자, 각 군이 소각(少卻/조금 물러남)하여,
구채(舊寨/옛 목책)로 퇴보(退保/물러나 지킴)하였는데,
하로(河路/수로)가 다시 (물이 넘쳐) 끊어지게 되고, 3일 동안 건너지 못하게 되자,
무리가 굶주림을 고(告)함으로써, 심주(瀋州)로 돌아갈 것을 상의하였는데,
모두 도후(圖後/후일을 도모함)를 거(舉/추천推薦)하였다.
초이렛날 밤 목책을 옮겼는데, 발해(渤海)의 기병(騎兵)이 미습(尾襲/후미를 습격함)하니,
강장(強壯/강하고 굳셈)한 자는 겨우 입성(入城)을 득(得)하였으나,
노유(老幼/늙고 어림)한 자는 모두 살약(殺掠/살인과 약탈)을 당하였다.
이때 군오(軍伍/군의 대오)가 아직 정연(整然)하여, 다시 (재정비하여) 일어남을 의논하였는데,
홀연(忽然)히 여진(女真)의 서남로도통(西南路都統) 도모(闍母)가 국왕(國王/아골타)의 격서(檄書)를 받들었는데,
「준(準) 발해국왕(渤海國王) 고영창(高永昌)이 소장(訴狀/호소하는 문서)을 보내,
요국(遼國) 장재상(張宰相)이 대군(大軍)을 통령(統領/통솔)하여 이전에 토벌(討伐)하여 왔는데,
(고영창이) 구원(救援)을 복걸(伏乞/애걸하여 빎)하였다.
당연히 의(義)의 도리(道理)로, 즉시 합류(合流)하여 응원(應援)하였다.
이미 5월 21일에 진병(進兵/진군)하기로 약속(約束)하였다.」
격문(檄文)이 심주(瀋州)에 이르자, 무리는 발해(渤海)가 이 격문(檄文)을 속여 만들었다 여겨, 방비(防備)하지 않았다.
이날에, 문탐(聞探/탐문/수색하여 들음)하여 동북(東北)에 군(軍)이 있어 엄습(掩襲)하여 이르자,
장사(將士/장졸)가 호왈(呼曰/외치어 말함)하길
「여진(女真)이 이르렀구나!」
장림(張琳)이 급(急)히 정군(整軍/군대를 정비함)하여 영적(迎敵/적을 맞아 싸움)하였는데,
장사(將士/장졸)가 여진병(女真兵)을 망견(望見/멀리 바라봄)하고는, 기운을 이미 잃어버렸고,
마침내 패주(敗走/패하여 도주함)하여 (심주성에) 입성(入城)하였다.
여진(女真)이 수입(隨入/따라 들어옴)하였는데, 먼저 성(城) 서남(西南)에 근거(根據)하고,
후에 종병(縱兵/군사를 풂)하여 살육(殺戮)하니 (요군이) 기진(幾盡/거의 없어짐)하였고,
맹초(孟初)와 유사온(劉思溫) 등이 죽었다.
장림(張琳)이 각 자제(子弟) 등과 함께 관속(官屬)을 아울러 추성(縋城/성에 줄을 매달음)하여 구면(苟免/간신히 면함)하였고,
군자(軍資)와 기갑(器甲)을 진실(盡失/모두 잃어버림)하였는데,
(장림이) 요주(遼州)에 수입(隨入/따라 들어옴)하여, 잔군(殘軍/패장병)을 수집(收集/거두어 모음)하고는,
(장림을) 연좌(緣坐)하여 (천조제가) 이에 꾸짖고는 요흥군(遼興軍) 절도사(節度使)를 제수하였다.
自張琳之敗,國人皆稱燕王賢而忠,若付以東征,士必樂為用。
兼遼東民自渤海之叛,渡遼失所者衆,若招之為軍,彼可報怨,此且報國,必以死戰。
天祚乃授燕王都元帥,蕭德恭副之,永興宮使耶律佛頂、延昌宮使蕭昂並兼監軍,
聽辟官屬,召募遼東饑民得二萬餘,謂之「怨軍」,如郭藥師者是也。
別選燕、雲、平路禁軍五千人,并勸諭三路富民,依等第進獻武勇軍二千人,如董龐兒、張關羽者是也。
又科敷運脚車三千乘,準備隨軍支遣,境內騷然矣。
燕王既招怨軍,合禁軍、武勇軍共三萬人,自八月進發,十月到乾州十三箇山劄寨。
장림(張琳)의 패배에서부터, 국인(國人)이 모두 일컫기를 연왕(燕王)이 어질고 충성(忠誠)이 있어,
만약 (연왕에게) 동정(東征/여진 정벌)을 부여(付與)한다면, 병사(兵士)들이 반드시 사역(使役)함을 바랄 것이다 하였다.
겸(兼)하여 요동(遼東)의 백성이 발해(渤海)의 배반에서부터, 요(遼)에 건너와 처소(處所)를 잃은 무리를,
만약 불러 군(軍)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가히 보원(報怨/원한을 갚음)하는 것이며,
이 또한 보국(報國/나라의 은혜를 갚음)이니, 반드시 죽음으로써 싸울 것이다 하였다.
천조(天祚)가 곧 연왕(燕王)에게 도원수(都元帥)를 수여(授與)하고, 소덕공(蕭德恭)을 부(副)로 삼았으며,
영흥궁사(永興宮使) 야율불정(耶律佛頂)과 연창궁사(延昌宮使) 소앙(蕭昂)을 나란히 감군(監軍)을 겸(兼)하게 하고,
관속(官屬/관청의 아전과 하인)은 두지 않음을 허락하고,
요동(遼東)의 기민(饑民/굶주리는 백성)을 소모(召募/불러 모음)하여 2만여 명을 얻으니,
일컫기를 「원군(怨軍/원수를 갚은 군대)」이라 하였는데, 곽약사(郭藥師) 같은 자가 이것이다.
연(燕)과 운(雲) 및 평(平) 지역의 금군(禁軍) 5천인을 별선(別選/특별히 선발함)하고,
아울러 세 지역의 부민(富民/부유한 백성)에게 권유(勸諭/권하고 타이름)하여,
등제(等第/등급)를 두어 진헌(進獻/임금께 예물을 바침)케 하여 무용군(武勇軍/무예와 용맹한 군사) 2천인을 따르게 하였는데,
동방아(董龐兒)와 장관우(張關羽) 같은 자가 이것이다.
또 과부(科敷/무성하게 이어짐)한 운각차(運脚車/짐을 운반하는 수레)가 3천 승(乘/수레의 단위)이었고,
수군(隨軍/종군, 지원군)을 준비(準備)하여 지원(支援)하여 보내니, 경내(境內/국경 안)가 소연(騷然/시끄럽고 수선함)하였다.
연왕(燕王)이 이윽고 원군(怨軍/원한을 갚는 군대)을 불러, 금군(禁軍) 및 무용군(武勇軍)과 하나로 합(合)하니 3만 명이었는데,
8월에서부터 진발(進發/진군)하여, 10월에 건주(乾州)에 도착(到着)하여 13 개(箇) 산(山)에 차채(劄寨/목책木柵을 침)하였다.
至十一月二十四夜,忽管押武勇軍、太常少卿武朝彥率府屬馬僧辨潛謀作亂,遣百餘騎趨中軍帳,先殺燕王。
燕王覺之,奔他軍,免,餘皆閉壁不應。
朝彥知謀不成,擁騎二千欲南奔,道為張關羽所殺。
燕王自被命東征,恥其行,未出境而兵亂,勉率諸軍自黎樹口渡遼水,欲下瀋州,駐兵城下,
射書令降,不應,或報女真援至,退保遼河。
或報女真援至,退保遼河。
11월 24일 밤에 이르러, 홀연히 관압(管押/억지로 끌려 옴)된 무용군(武勇軍)과 태상소경(太常少卿) 무조언(武朝彥)이
통솔(統率)하는 부속(府屬/관부에 소속됨)의 마승(馬僧/승려로 구성된 기병)을 갖추어
잠모(潛謀/은밀히 모의함)하여 작란(作亂/난을 일으킴)하였는데,
100 여기(騎)를 보내 중군(中軍)의 장막(帳幕)으로 빨리 달려가, 먼저 연왕(燕王)을 죽이려 하였다.
연왕(燕王)이 깨닫고, 타군(他軍/다른 군)으로 달아나, (죽임을) 면(免)하였고,
나머지 모두가 군루(軍壘)를 막고 불응(不應/응하지 않음)하였다.
무조언(武朝彥)이 음모(陰謀)가 불성(不成/이루어지지 못함)한 것을 알자, 2천 기(騎)를 끼고 남쪽으로 달아나고자 하였는데,
(무용군의) 장관우(張關羽)가 (무조언을) 길 위에서 죽였다.
연왕(燕王)이 동정(東征)을 피명(被命/명을 받음)할 때부터, 그 (여진 정벌의) 행(行)함을 부끄러워하였는데,
출경(出境/국경을 넘어감)하지 못했음에도 병란(兵亂/군대가 혼란스러움)하니,
각 군을 면솔(勉率/억지로 이끎)하여 여수구(黎樹口)에서 요수(遼水)를 도하하고, 심주(瀋州)를 함락하고자 하여,
(심주) 성(城) 아래에 주병(駐兵/군대를 주둔함)하고,
(심주성에) 서신을 쏴 항복하라 명령(命令)하였는데, 불응(不應/응하지 않음)하니,
정예(精銳)를 선발(選拔)하여 제성(梯城/사다리로 성에 오름)하였는데,
다시 시석(矢石/화살과 돌)이 비와 같아, 올라가지 못하였다.
혹자(或者)가 여진(女真)의 원군(援軍)이 이르렀다고 보고(報告)하자, 요하(遼河)로 퇴보(退保/퇴각)하였다.
是行雖無所得,亦無所失。
既而燕王被召赴闕,留北宰相蕭德恭上京路都統,耶律余覩副之;
太常袞耶律啼哩姑濠、懿州路都統,延慶宮使蕭和尚奴副之;
都元帥府監軍耶律佛頂顯州路都統,四軍太師蕭幹副之,並以屯田為備。
自天祚親征敗績,中外歸罪蕭奉先。
於是謫奉先西南面招討,擢用耶律大悲奴為北樞密使,蕭查刺同知樞密院使。
間有軍國大事,天祚與南面宰相、執政吳庸、馬人望、柴誼等參議,數人皆昏謬,不能裁決。
當時國人諺曰:
「五箇翁翁四百歲,南面北面頓瞌睡。自己精神管不得,有甚心情殺女直。」
遠近傳為笑端。
有人聞於天祚,天祚亦笑而不悟。
이 행(行)함이 비록 소득(所得/얻은 것)이 없었으나, 역시 소실(所失/잃은 것)도 없었다.
이윽고 연왕(燕王)은 피소(被召/소환을 당함)되어 부궐(赴闕/신하가 궐에 나아감)하였고,
북재상(北宰相) 소덕공(蕭德恭)을 상경로(上京路) 도통(都統)에 유임(留任)시키고,
야율여도(耶律余覩)를 부도통(副都統)으로 삼았다.
태상곤(太常袞) 야율제리(耶律啼哩)를 고호(姑濠)와 의주로(懿州路) 도통(都統)으로 삼고,
연경궁사(延慶宮使) 소화상노(蕭和尚奴)를 부도통(副都統)으로 삼았다.
도원수부(都元帥府) 감군(監軍) 야율불정(耶律佛頂)을 현주로(顯州路) 도통(都統)으로 삼고,
사군태사(四軍太師) 소간(蕭幹)을 부도통(副都統)으로 삼아,
모두 둔전(屯田)으로써 방비(防備)하게 하였다.
천조(天祚)의 친정(親征)이 패적(敗績)할 때부터,
(천조제는) 중외(中外/조정과 민간)에 소봉선(蕭奉先)을 귀죄(歸罪/죄를 남에게 돌림)하였다.
이에 소봉선(蕭奉先)을 서남면(西南面) 초토사(招討使)로 적강(謫降/외직으로 내침)하고,
야율대비노(耶律大悲奴)를 탁용(擢用/발탁拔擢)하여 북추밀사(北樞密使)로 삼고,
소사랄(蕭查剌/소사자蕭查刺)를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使)로 삼았다.
간혹 군국대사(軍國大事)가 있으면, 천조(天祚)가 남면재상(南面宰相)과 집정(執政)인
오용(吳庸), 마인망(馬人望), 시의(柴誼) 등과 함께 참의(參議/참여하여 의논함)하니,
수인(數人)이 모두 혼유(昏謬/어리석고 잘못됨)하여, 재결(裁決/옳고 그름을 판단함)이 불능(不能/할 수가 없음)하였다.
당시(當時)에 국인(國人/나라 사람)이 항간(巷間)에서 말하기를
「다섯개의 옹옹(翁翁/늙은이들)이 4백 세(歲)니, 남면(南面)과 북면(北面)으로 갑수(瞌睡/매우 졸림)하여 넘어진다.
자기(自己)의 정신(精神)도 다스리지 못하는데, 여진(女直)을 죽일 심정(心情)만 유심(有甚/많이 있음)하다.」
원근(遠近/멀고 가까움)에 전(傳)해져 (나라 사람들이) 조소(嘲笑)하였다.
천조(天祚)에게 (이 소문을) 알려주는 사람이 있었는데, 천조(天祚)가 역시 웃기만 하고 깨닫지 못하였다.
是歲,止罷耶律大悲奴,再詔蕭奉先代之,蕭查剌授西京留守事。
其後罷吳庸、馬人望、柴誼,以李處溫、左企弓代之,至於國亡。
女真初援渤海,已而復相攻,渤海大敗。
高永昌遁入海,女真遣兀室、訥波勃堇以騎三千追及於長松島,斬之。
其潰散漢兒軍,多相聚為盜,如侯概、吳撞天等,所在蟠結,以千百計,自稱「雲隊」、「海隊」之類,
紛然並起,每一飯屠數千人,數路之民殆盡,遼不能制之。
이해에, 야율대비노(耶律大悲奴)를 지파(止罷/파면)하고,
거듭 조(詔)하여 소봉선(蕭奉先)에게 (북추밀사를) 대신(代身)하게 하고,
소사랄(蕭查剌)에게 서경유수사(西京留守事)를 수여(授與)하였다.
그 후(後)에 오용(吳庸)과 마인망(馬人望) 및 시의(柴誼)를 파면(罷免)하고,
이처혼(李處溫)과 좌기궁(左企弓)으로 대신(代身)하게 하니, 국망(國亡/나라가 망함)에 이르렀다.
여진(女真)이 처음에 발해(渤海)를 구원(救援)하였다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상공(相攻/서로 공격함)하였는데,
발해가 대패(大敗)하였다.
고영창(高永昌)이 바다에 들어가 숨었는데, 여진(女真)이 올실(兀室)과 눌파(訥波) 발근(勃堇/여진 관명)을 보내
3천 기(騎)로 장송도(長松島)에서 추급(追及/뒤쫓아 따라붙음)하여, 참(斬)하였다.
그 궤산(潰散/무너져 흩어진)한 한아군(漢兒軍/한족 군대)이, 다수(多數)가 상취(相聚/서로 모임)하여 도적(盜賊)이 되니,
후개(侯概)와 오당천(吳撞天) 등이 이와 같고, 소재(所在/있는 곳)에서 반결(蟠結/서로 얽혀)하여,
수백수천을 헤아림에 따라, 자칭(自稱/스스로 칭함)「운대(雲隊)」와 「해대(海隊)」의 유(類)이고,
분연(紛然/뒤섞여 어지러움)하게 병기(並起/한꺼번에 일어남)하니, 매일(每一) 수천 명을 반도(飯屠/먹이로 삼아 죽임)하여,
여러 지역의 백성이 태진(殆盡/거의 전멸함)하니, 요(遼)에서 억제(抑制)가 불능(不能/할 수 없음)하였다.
--------------------------------------------------------------------------------
5부 요약
-1월1일 고영창이 10여 명으로 소보선을 죽임
-1월2일 대공정+고청신 각 영의 해,한족 병사 1천으로 주도자 수십 명을 사로잡아 처형함
→해, 한족 병사들에 의해 발해인 살해자가 속출함
-1월3일 동경성의 발해인이 성중에 불을 내고 거병함
→천조제의 명을 받아 백초곡에 주둔하던 고영창의 2000 기병이 동경으로 달려감
→고영창군이 수산문을 막음
→대공정이 달랬으나 따르지 않음
-1월5일 동경성 내에 화재 발생, 이틈에 성내 발해인이 성문을 염
-고영창군 기병이 성안으로 돌입
-대공정+고청신이 군으로 대항함
-전세가 불리하자 100명을 이끌고 성을 탈출함
-1월~4월
-고영창 대발해황제 선포, 연호 응순
-요동 50 여주에 군마를 보내 약탈
-요동의 해족인들이 요로 도주함
-심주만이 고영창에 항복 안 함
-재상 장림이 요동에서 도주한 해, 한, 거란족 2만을 모음
-5월1일 장림군이 현주로 진군
→발해군이 요하 여수구에 주둔
→장림이 약한 병졸 수천으로 막게 하고, 자신은 정예 기병을 이끌고 샛길로 요하를 도강해 심주로 감
→발해가 추격해 옴
-5월2일~5월11로 추정
-5월12일 추정
→장림군 5일 치 식량밖에 없어, 5일 안에 동경성을 함락코자 함
-5월13일 추정
→안덕주 의병을 선발하여 선봉으로 도하하고, 차례로 대군이 도하함
-상류에 발해 철기군 500 이 돌격해 옴
-장림군 다시 목책으로 되돌아 옴
-5월14일~5월16일 추정
-5월18일로 추정
→대치한지 7일째 되던 날 밤, 심주로 퇴각 개시
→발해군이 후미를 기습
→강병만 간신히 심주로 입성하고 약졸은 모조리 살해당함
5월18~5월29일
→여진 서남로도통 도모가 아골타의 격서를 보냄
→5월21일 여진군이 발해군을 도와주기 위해 진군하였다는 내용
→심주에서는 발해의 계략으로 판단하여 방비하지 않음
→여진군이 심주성에 이름
→장림이 정예군을 이끌고 맞아 싸움
→장림군의 사기가 떨어져 곧 패배하여 성으로 도주함
→여진군이 따라 입성함
→요군 몰살
→장림이 친속들과 함께 성을 탈출해 간신히 도주함
→천조제 장림을 요흥군으로 내침
→발해군 대패하여 고영창 해도로 도주
→여진 올실, 눌파 3천 기로 추격
→흩어진 한족 부대가 1116년 내내 도적이 됨
→도적이 수백~수천에 이름
→1116년 동안 도적에 의해 여러 지역의 백성이 몰살됨
-6월~7월
-천조제 연왕 야율순을 동정군 총사 도원수에 임명
-요동에서 탈출해온 굶주리는 백성 2만 명을 원군으로 삼음
(원군은 원한을 갚는 군대라는 뜻임)
-원군 지휘관 → 총합하여 3만
1.도원수 연왕 야율순
2.부원수 소덕공
3.감군 야율불정, 소앙
→연+운+평주의 중앙군 5천 별도선발 (곽약사 통솔)
→부자들에게 돈을 거둬 용맹한 용병 모집 2천 명 (동방아+장관우)
→별도도 지원부대도 준비, 수레 3천 개
-전쟁 준비로 국경안이 매우 혼잡하고 씨끄러움
-8월에 야율순 3만 명 진군 (원군2만+금군5천+무용군2천)
-별도의 치중부대
-10월에 야율순 군대 건주에 도착
-13개 산에 목책 설치하여 주둔
-11월24일 밤에 무용군 무조언 등이 승려군 100여 기병으로 야율순을 죽이려 음모함
-야율순 중군에서 빠져나와 타군으로 도주함
-무조언 2천 기를 이끌고 남쪽으로 도주
-장관우가 무조언을 죽임
-11월말~12월
-야율순 여진 경내로 들어가지 못했는데 군중에 난이 일어난 것을 부끄러워함
-각 군을 억지로 이끌고 요수를 도하하여 심주를 함락코자 함
-심주성 아래에 주둔하고 항복 권유 → 거부하자 공성전 벌임 → 화살과 돌이 비처럼 쏟아져 성에 오르지 못함
-여진의 원군이 이르렀다는 급보
-야율순군 요하로 퇴각
-성과는 없었으나 크게 패하지도 않음
-천조제 야율순 소환
-원군 지휘관 교체 : 도통 소덕공, 부도통 야율여도
-고호, 의주로 도통 야율제리, 부도통 소화상노
-현주로 도통 야율불정, 부도통 소간
→세군 모두 둔전하고 방비하게 함
-천조제 패전의 죄를 물어 북추밀사 소봉선을 서남면초토사로 내침
-야율대비노를 북추밀사에 임명
-소사랄을 동지추밀원사에 임명
-군국대사 회의 → 천조제+야율대비노+소사랄+오용+마인망+시의 → 모두 어리석어 백성들의 비웃음을 당함
-곧 야율대비노를 내치고, 다시 소봉선을 북추밀사에 임명
-소사랄을 서경유수에 임명
-오용+마인망+시의 파면 → 이처혼+좌기궁을 기용
-거란국지 6부에서 계속됩니다.-
P.S) 본 글은 동의 없이 어느 곳에나 담아 가셔도 됩니다. 출처는 남겨주시면 고맙고요.^^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