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국지(契丹國志) 천조황제(天祚皇帝) 1115년 국역 4부

 사전 보고 번역하는 것이라, 오역이 많습니다.

수정할 부분 알려 주시면,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

天慶五年。
천경(天慶/요 천조제의 #2 연호) 5년 (1115년) 


秋七月朔,日食。
가을 7월 초하루에, 일식(日食)이 있었다.


八月,天祚下詔親征女真,率蕃漢兵十餘萬出長春路,
命樞密使蕭奉先為御營都統,耶律章奴副之,以精兵二萬為先鋒,
餘分五部為正兵,諸大臣貴族子弟千餘人為硬軍,扈從百司為護衞軍,北出駱駝口,
車騎亘百里,鼓角旌旗,震耀原野。
別以漢軍步騎三萬,命都檢點蕭胡覩姑為都統,樞密直學士柴誼副之,南出寧江州路。
8월에, 천조(天祚)가 여진(女真) 친정(親征)을 하조(下詔/조를 내림)하여,
번한병(蕃漢兵/요국 내의 한족 병사) 10 여만(萬)을 거느리고 장춘로(長春路)로 출발하였고,
명(命)하여 추밀사(樞密使) 소봉선(蕭奉先)을 어영도통(御營都統)으로 삼고, 야율장노(耶律章奴)를 부도통(副都統)으로 삼아,
정병(精兵) 2만(萬)으로 하여금 선봉(先鋒)으로 삼았으며,
여분(餘分)의 5부(部)를 정병(正兵/중앙군)으로 삼고, 각 대신(大臣)의 귀족자제(貴族子弟) 천여 명을 경군(硬軍/창병)으로 삼고,
호종(扈從)하는 백사(百司/백관百官)를 호위군(護衞軍)으로 삼아, 북쪽 낙타구(駱駝口)로 나아가니,
거기(車騎/수레)가 백리에 뻗쳤고, 고각(鼓角/북과 나팔) 및 정기(旌旗/장식용 기와 군용 기)가, 
원야(原野/벌판)에 진요(震耀/위세가 빛남)하였다.
별도(別途)로 한군(漢軍) 보기(步騎) 3만(萬)으로써, 명(命)하여 도검점(都檢點) 소호도고(蕭胡覩姑)를 도통(都統)으로 삼고,
추밀직학사(樞密直學士) 시의(柴誼)를 부도통(都統)으로 삼아, 남쪽 영강주(寧江州) 지역으로 나아갔다.


自長春州分路而進,齎數月之糧,期必滅女真。
一夕,軍中戈戟有光,馬皆嘶鳴,咸以為不祥。
天祚問天官李圭,圭不能對。
宰相張琳前奏曰:
「唐莊宗攻梁,矛戟夜有光。郭崇韜曰:『火出兵刃,破賊之兆。』遂滅梁。」
天祚喜而信之,遂行。
女真師至鴨綠江,人心疑懼。
장춘주(長春州)에서부터 분로(分路/길을 나눔)하여 진군하였고, 수개월의 양식(糧食)을 주어, 
기필(期必)코 여진(女真)을 멸(滅)하고자 하였다.
일석(一夕/어느 저녁)에, 군중(軍中)의 과극(戈戟/창과 극)이 유광(有光/빛이 있음)하니,
말들이 모두 소리 내어 울었는데, 모두 불상(不祥/불길不吉)하다 여겼다.
천조(天祚)가 천관(天官/천문관) 이규(李圭)에게 물으니, 이규(李圭)가 대답(對答)할 수 없었다.
재상(宰相) 장림(張琳)이 먼저 아뢰어 말하길
「당(唐) 장종(莊宗)이 양(梁)을 공격할 때, 밤에 모극(矛戟)이 유광(有光)하였습니다.
   곽숭도(郭崇韜)가 말하길 『불은 병인(兵刃/병기兵器)에서 나오니, 파적(破賊/도둑을 깨트림)의 징조(徵兆)입니다.
   하였는데 드디어 양(梁)을 멸(滅)하였습니다.
천조(天祚)가 기뻐하며 믿으니, 수행(遂行/계획한 대로 행함)하였다.
여진(女真)의 군대가 압록강(鴨綠江)에 이르자, 인심(人心)이 의구(疑懼/의심하여 두려워함)하였다.


初,天祚親征,女真甚懼,粘罕、兀室偽請為卑哀求生者,陽以示衆,實以求戰嫚書上之。
天祚大怒,下詔有
「女真作過,大軍翦除」之語。
阿骨打聚諸酋曰:
「始與汝輩起兵,蓋苦遼國殘虐。今吾為若卑哀請降,庶幾紓禍,乃欲盡行翦除,為之奈何?
   不若殺我一族,衆共迎降,可以轉禍為福。」
諸酋皆羅拜曰:
「事至此,當誓死一戰。」
次日,御營退行三十里。
或言於天祚曰:
「兵已深入,女真在近,軍心皆願一戰,何必退也?」
天祚亟召諸統兵官,問策安在?人皆觀望,無敢言「不願戰」者。
再傳令進兵。
처음에, 천조(天祚)가 친정(親征)하니, 여진(女真)이 심구(甚懼/심히 두려워함)하였는데,
점한(粘罕)과 올실(兀室)이란 자가 비애(卑哀/몸을 낮춰 애원함)하여 구생(求生/목숨을 구걸함)하였는데,
겉으로는 시중(示衆/훈시訓示)를 바라나, 실(實)은 구전(求戰/전쟁을 원함)함으로써 만서(嫚書/거만한 서신)를 올린 것이다.
천조(天祚)가 대노(大怒)하니, 하조(下詔/조를 내림)가 있었는데
「여진(女真)이 작화(作過/화를 만듦)하니, 대군(大軍)으로 전제(翦除/멸하여 없앰)하겠다.」는 말이었다.
아골타(阿骨打)가 각 추장(酋長)을 모아놓고 말하길
「처음에 여배(汝輩/너희들)와 함께 기병(起兵/거병擧兵)한 것은, 
   모두 요국(遼國)의 잔학(殘虐/잔인함과 포악함)이 괴로웠기 때문이었다.
   지금 내가 (서신을 보내) 이와 같이 하여 비애(卑哀/몸을 낮춰 애원함)하고 청항(請降/항복을 청함)하여,
   서화(紓禍/화를 면함)를 서기(庶幾/바람)하였는데,
   도리어 (천조제는) 전제(翦除/멸하여 없앰)를 진행(盡行/진력盡力을 다해 행함)하고자 한다니, 어찌하여야 하겠느냐?
   만약 (너희들이) 나의 일족(一族)을 죽이지 못하겠다면, 너희들은 (천조제를) 공손(恭遜)히 영강(迎降/영접하여 항복함)하여, 
   전화위복(轉禍為福)함이 옳을 것이다.
각 추장(酋長)들이 모두 나배(羅拜/죽 늘어서서 절함)하여 말하길
「일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당연(當然)히 서사(誓死/목숨을 검)하여 일전(一戰)해야 합니다.」
차일(次日/다음 날)에, (천조제의) 어영(御營/임금이 거느리는 영채)이 30 리(里)를 퇴행(退行/뒤로 물러남)하였다.
혹자(或者)가 천조(天祚)에게 말하기를
「병(兵)이 이미 심입(深入/깊게 들어옴)하여, 여진(女真)이 가까이 있으니, 
   군심(軍心)이 모두 일전(一戰)을 원(願)하고 있사온데, 하필(何必/구태여) 퇴각하여야 하는 것이옵니까?
천조(天祚)가 긴급(緊急)하게 제통병관(諸統兵官)을 소집(召集)하여, 좋은 계책(計策)이 있는가? 하고 묻자,
사람들이 모두 관망(觀望)하며, 감(敢)히「전쟁(戰爭)을 원(願)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자가 없었다.
다시 전령(傳令/영을 전함)하여 진병(進兵/진군)하였다.


十一月,天祚與女真兵會。
時盛寒,雪深尺餘,先鋒接戰,雲塵亘天,日色赤暗。
天祚親督諸軍進戰。
少頃,軍馬左旋三轉,已橫屍滿野,望天祚御旗向西南出,衆軍隨而敗潰,始悟矛戟有光為凶兆也。
女真亦不急追,徐收所獲輜重、馬牛而已。
天祚一日一夜走五百里,退保長春州。
女真乘勝,遂併渤海、遼陽等五十四州。
11월에, 천조(天祚)가 여진(女真)과 함께 병회(兵會/회전會戰)하였다.
이때가 성한(盛寒/혹한酷寒)이었는데, 눈이 한자 남짓하게 깊어, 선봉(先鋒)이 접전(接戰)하자, 
눈먼지가 구름과 같이 하늘에 뻗쳐, 일색(日色/태양 빛)이 적암(赤暗/붉고 어두움)하였다.
천조(天祚)가 친(親)히 감독(監督)하여 각 군을 진전(進戰/전투에 나섬)하게 하였다.
소경(少頃/잠시 동안)에, 군마(軍馬)가 좌선(左旋/좌측으로 돔)하여 세 번 회전(回轉)하자,
이미 횡시(橫屍/뒤엉킨 시체)가 만야(滿野/들에 가득 참)하니, 
천조(天祚)가 바라보다 어기(御旗/임금의 기)를 서남(西南)으로 향하여 나아갔고,
중군(衆軍/무리와 군)이 따라감에 따라 패궤(敗潰/패하여 무너짐)하니, 
비로소 모극(矛戟)이 유광(有光)하면 흉조(凶兆)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여진(女真)이 또한 급추(急追/급하게 추격함)하지 않고, 소획(所獲)한 치중(輜重)과 마우(馬牛)를 서서히 거둘 뿐이었다.
천조(天祚)가 하루 낮 하룻 밤에 500 리(里)를 도주(逃走)하여, 장춘주(長春州)로 퇴보(退保)하였다.
여진(女真)이 승승(乘勝/승세를 탐)하여, 마침내 발해(渤海)와 요양(遼陽) 등 54 주(州)를 아울렀다.


耶律章奴係大橫帳,與衆謀曰:
「天祚失道,皇叔燕王淳親賢,若廢天祚而迎燕王判燕京留守事,女真可不戰而服也。」
章奴與同謀人二千餘騎,夜半奔上京,迎立燕王。
是日,有燕王妃父蕭唐骨德告其事,天祚詔遣長公主駙馬蕭昱,
領精騎千餘詣廣平甸,防護后妃諸王行宮,別遣帳前親信乙信,賚御札馳報燕王。
時章奴先遣燕王二妃親弟蕭諦里、外甥蕭延留說之曰:
「前日御營兵為女真所敗,天祚不知所在,今天下無主,諸公幼弱,請王權知軍國事。
   失此機會,姦雄竊發,未易圖也。」
燕王曰:
「此非細事,天祚自有諸王當立,南北面大臣不來,而汝等來,何也?」
密令左右拘之。
少頃,乙信持天祚御札至,備言章奴等欲行廢立之事。
燕王對使者號泣,斬蕭諦里、蕭延留首級以獻,單騎由間道避章奴賊衆,趣廣平甸待罪。
天祚待之如初。
章奴知燕王不聽,領麾下掠慶、饒、懷、祖等州,嘯聚渤海盜衆數萬,直趣廣平甸,犯天祚行闕索戰。
賴順國女真阿鶻產等三百餘騎一戰而勝,擒其貴族二百餘人,並斬以徇。
妻女配役繡院,或給散近幸為婢,餘得脫者奔女真。
章奴偽作使人,帶牌走馬奔女真近境泰州,為識者所獲,以送天祚。
天祚命腰斬於市,剖其心獻祖廟,分送五路號令。
야율장노(耶律章奴)가 대횡장(大橫帳/태조 야율아보기의 직계 후손, 황손)과 관계(關係)하여, 
무리와 함께 음모(陰謀)하여 말하길
「천조(天祚)가 실도(失道/도리를 잃음)하고, 황숙(皇叔) 연왕(燕王) 순(淳)이 현자(賢者)를 가까이 하니, 
   만약 천조(天祚)를 폐(廢)하고 연왕(燕王) 판연경유수사(燕京留守事)를 영접(迎接)한다면,
   여진(女真)이 가(可)히 싸우지 않고도 복종(服從)할 것이다.
장노(章奴)가 동모인(同謀人/음모에 동조하는 자) 2천여 기(騎)와 함께, 야반(夜半/한밤중)에 상경(上京)으로 달아나,
연왕(燕王)을 영립(迎立/맞아들여 임금으로 세움)하였다.
이날에, 연왕비(燕王妃)의 부(父) 소당골덕(蕭唐骨德)이 그 일을 고(告)하였는데, 
천조(天祚)가 조(詔)하여 장공주(長公主/임금의 누이동생)의 부마(駙馬) 소욱(蕭昱)을 보내, 
정기(精騎/정예 기병) 천여 명을 거느리고 광평전(廣平甸)으로 나아가게 하여,
후비(后妃)와 제왕(諸王)의 행궁(行宮)을 방호(防護/방어하고 보호함)하게 하였으며,
따로 장전(帳前/임금의 장막 앞)의 친신(親信/근신) 을신(乙信)을 보내,
어찰(御札/임금의 서찰)을 주어 연왕(燕王)에게 치보(馳報/급히 달려가 알림)하게 하였다.
이때 장노(章奴)가 먼저 연왕(燕王)의 2비(妃)의 친제(親弟/친동생) 소체리(蕭諦里)와 
외생(外甥/처남) 소연유(蕭延留)를 (연왕에게) 보내 설득(說得)하여 말하길
「전일(前日)에 어영병(御營兵/임금이 거느리는 군사)이 여진(女真)에게 패(敗)한 바, 천조(天祚)의 소재(所在)를 알지 못하니,
   지금 천하(天下)에 주인이 없고, 제공(諸公/여러 공작, 황족들)은 유약(幼弱/미숙하고 약함)하니,
   왕(王/연왕 야율순)에게 권지군국사(權知軍國事/임시로 나라의 일을 맡음)를 청(請)하옵니다.
   이 기회(機會)를 잃는다면, 간웅(姦雄)이 (나라를) 절발(竊發/훔침이 일어남)하여, 도모(圖謀)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연왕(燕王)이 말하길
「이는 세사(細事/작은 일)가 아닌데, 천조(天祚)께서 자연히 제왕(諸王)의 당립(當立/마땅히 세움)이 있을 것이고,
   남북면(南北面)의 대신(大臣)이 오지 않았는데, 그런데도 너희들은 왔으니, 어찌 된 것인가?」
밀령(密令)을 내려 좌우(左右)에게 구속(拘束)하게 하였다.
소경(少頃/잠시 동안)에, 을신(乙信)이 천조(天祚)의 어찰(御札)을 가지고 이르니,
장노(章奴) 등이 하고자 한 폐립(廢立/폐하고 세움)의 일을 비언(備言/갖추어 말함)하였다.
연왕(燕王)이 사자(使者)를 대(對)하자 호읍(號泣/목 놓아 울음)하고, 
소체리(蕭諦里)와 소연유(蕭延留)를 참(斬)하고 수급(首級)을 바침으로써,
단기(單騎)로 장노(章奴)의 적중(賊衆/적당賊黨)을 피(避)하여 간도(間道/샛길)를 좇아, 
광평전(廣平甸) 다다르자 대죄(待罪/죄를 기다림)하였다.
천조(天祚)가 처음과 같이 (연왕 야율순을) 대우(待遇)하였다.
장노(章奴)가 연왕(燕王)이 불청(不聽/듣지 않음)할 것을 알고는, 
휘하(麾下)를 거느리고 경주(慶州), 요주(饒州), 회주(懷州), 조주(祖州) 등의 주(州)를 약탈(掠奪)하고,
발해(渤海)의 도중(盜衆/도적 무리) 수만을 소취(嘯聚/군호로 불러 모음)하고,
광평전(廣平甸)에 직취(直趣/곧장 달려감)하여, 천조(天祚)의 행궐(行闕/궁궐)을 범(犯)하고 (천조를) 수색(搜索)하며 싸웠다.
순국여진(順國女真/요에 귀순한 여진) 아골산(阿鶻產) 등의 3백여 기(騎)에게 의뢰(依賴)하여 일전(一戰)하여 이기니,
그 귀족(貴族) 2백여 인을 사로잡고, 모두 참(斬)하고 (조리를) 돌렸다.
(반란한 귀족의) 처녀(妻女/아내와 딸)는 수원(繡院/수를 놓은 관청)에 배역(配役/나누어 부역시킴)하고,
혹(或)은 근행(近幸/근시近侍/가까운 신하)에게 노비(奴婢)로 주어 흩어지게 하였고,
나머지 탈출(脫出)한 자는 여진(女直)으로 도망갔다.
장노(章奴)가 사인(使人/사자)으로 위작(偽作/거짓으로 꾸밈)하여, 
대패(帶牌/명패를 두름)하고 주마(走馬/말을 타고 달림)하여 여진(女真)과 근경(近境/가까운 국경)인 태주(泰州)로 달아났는데,
가짜임을 알아챈 자가 소획(所獲/포획)하니, 이로써 천조(天祚)에게 (잡아) 보냈다.
천조(天祚)가 명(命)하여 시(市/저자)에서 요참(腰斬/허리를 베어 죽임)하고, 그 심장은 쪼개어 조묘(祖廟)에 바치고,
(사지를 잘라) 5로(路)에 분송(分送/나누어 보냄)하여 호령(號令/큰 소리로 꾸짖음)하였다.


初,章奴之叛也,蕭奉先以燕王素得漢人心,疑章奴潛與南路漢軍同謀,遽以聞。
天祚即以同知宣徽北院事韓汝誨詣漢軍行營,傳宣曰:
「將士離家,暴露日久,風霜之凍,誠可憐憫。今女真遠遁,不可深入,並令放還。」
諸軍皆歡呼分散。
越三日,復遣使督進發,軍中洶洶,遲疑不行,及聞大軍已敗,亦自燒營逃去,天祚隨行衞兵僅三五百人而已。
遂降詔募燕、雲漢人,護駕到廣平甸,有官者轉一官,白身人三班奉職。
及至廣平,再降指揮,若護駕至起離日,依上推賞。
是歲,宋遣羅選、侯益等詣遼充賀生辰及正旦使,入國道梗,中京阻程兩月,不得見天祚而回。
처음에, 장노(章奴)가 배반하자, 소봉선(蕭奉先)은 연왕(燕王)이 본디 한인(漢人/한족)의 마음을 얻었다 하여,
장노(章奴)가 은밀(隱密)하게 남로(南路)의 한군(漢軍)과 함께 동모(同謀/같이 도모함)할까 의심(疑心)하여,
급(遽)히 이문(以聞/임금께 아룀)하였다.
천조(天祚)가 즉시 동지선휘북원사(同知宣徽北院事) 한여회(韓汝誨)로 하여금 한군(漢軍)의 행영(行營/진영陣營)에 
이르게 하여, 전선(傳宣/임금의 명령을 전함)하여 말하길
「장사(將士/장수와 병졸)가 이가(離家/집을 떠남)하여, 폭로(暴露/비바람에 노출됨)한지 일구(日久/시일이 오래됨)하고,
   풍상(風霜/바람과 서리)이 추우니, 참으로 가히 연민(憐憫/불쌍히 여김)한다.
   지금 여진(女真)이 원둔(遠遁/멀리 달아남)하여, 심입(深入/깊게 들어감)은 불가(不可)하니,
   모두 방환(放還/집에 돌려보냄)을 영(令)하노라.
각 군(軍)이 모두 환호(歡呼/기뻐 소리 침)하여 분산(分散/나누어 흩어짐)하였다.
3일이 지나고, 다시 사신을 보내 진발(進發/싸움터로 나감)을 독촉(督促)하니,
군중(軍中)이 흉흉(洶洶/매우 흉함)하였고, 지의(遲疑/의심하고 주저함)하여 불행(不行/행하지 않음)하니,
급기야 대군(大軍)이 이미 패(敗)하였다는 것을 듣고는, 역시 영채(寨)를 불사르고 도거(逃去/도망 감)하였고,
천조(天祚)를 수행(隨行)하는 위병(衞兵)이 겨우 300에서 500명뿐이었다.
마침내 항조(降詔/조를 내림)하여 연(燕)과 운(雲)의 한인(漢人)을 모병(募兵)하고,
호가(護駕/임금의 수레를 호위 함)하여 광평전(廣平甸)에 이르면, 관직이 있는 자는 일 등급씩 올려주고,
백신(白身/관직이 없는 사람)한 자는 삼반(三班/양반 다음가는 지방 향직)에 봉직(奉職/공직에 종사함)하게 하였다.
광평(廣平)에 이르자, 다시 지휘(指揮)를 내려, 만약 호가(護駕)하여 이일(離日/입춘)전에 이르게 된다면,
(공을) 맨 위로 올려 추상(推賞/추천하고 상을 줌)함을 허락한다 하였다.
이해에, 송(宋)이 나선(羅選)과 후익(侯益) 등을 보내 
하생진(賀生辰/임금의 생일 축하 사신)과 및 정단사(正旦使/정월 축하 사신)를 담당하게 하여 요(遼)에 이르게 하였는데, 
입국(入國)의 길이 막히니, 중경(中京)에 두 달 정도(程度) 막혀있다가, 천조(天祚)를 볼 수가 없으니 이에 돌아갔다.

--------------------------------------------------------------------------------
4부 요약
-8월28일 천조제 사냥 멈추고 군중으로 급히 감
-8월30일 1로군 한족 10만 장춘로로 출진
-2로군 북쪽 낙타구로 출진
→2로군 선봉 친위군 정병 2만 소봉선+야율장노
→2로군 5부 중앙군
→2로군 귀족 자제 1천 경군
-3로군 한족 보기병 3만, 소호도고+시의 남쪽 영강주로 출진

-9월 여진군이 압록강에 이름
-9월03일 여진 점한, 올실 서신 보내 회군 청함

-10월09일 야율장노 2천 휘하병을 이끌고 상경으로 회군
 → 연왕 야율순 옹립 획책함
 → 천조제 소욱과 을신을 보냄
-야율순의 반란 진압

-11월 천조제 다시 군을 이끌고 낙타구로 향함

-12월03일 아골타 제장회의
-12월09일 야율장가노 배반
-12월11일 천조제 30리 후퇴
-12월11일 아골타 천조제가 후퇴했음을 염탐함
-12월12일 여진의 제장들이 추격하자고 함 → 아골타 2만을 이끌고 추격함
-12월12일 천조제 다시 여진을 향해 전진함
-12월12일 호보답강에서 여진과 친전
 → 대패
-12월13일 천조제 500리를 후퇴하여 장춘주로 감
-천조제 회군 결정 → 각 군 환호 → 3일 후 다시 모이라 함 → 각 군 영채를 불사르고 흩어짐
-천조제의 호위병 3~5백 명만 남음
-12월24일 야율마가가 야율장가노 토벌
-12월27일 천조제 소특말을 행궁도부서로 임명하여 연, 운 지역에서 한족 병사 모집

-거란국지 5부에서 계속됩니다.-

P.S) 본 글은 동의 없이 어느 곳에나 담아 가셔도 됩니다. 출처는 남겨주시면 고맙고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