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국지(契丹國志) 천조황제(天祚皇帝) 1114년 국역 3부

 사전 보고 번역하는 것이라, 오역이 많습니다.

수정할 부분 알려 주시면,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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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慶四年。
천경(天慶/요 천조제의 #2 연호) 4년 (1114년) 


秋八月,女真阿骨打始叛,用粘罕、胡舍為謀主,銀朮割、移列、婁宿、闍母等為將帥,會集女真諸部甲馬二千,首犯混同江之東,名寧江州。
時天祚射鹿慶州秋山,聞之,不以介意,遣海州刺史高仙壽,統渤海子弟軍三千人,應寧江援。
가을 8월에, 여진(女真)의 아골타(阿骨打)가 비로소 배반(背叛)하여, 
점한(粘罕)과 호사(胡舍)를 모주(謀主/일을 중심적으로 행하는 사람)로 부리고
은출할(銀朮割), 이열(移列), 누숙(婁宿), 도모(闍母) 등을 장수(將帥)로 삼아,
여진(女真)의 각 부족의 갑마(甲馬/갑주를 입은 기마병) 2천을 회집(會集/회합會合)하여,
혼동강(混同江)의 동쪽을 수범(首犯/먼저 범함)하고, 이름을 영강주(寧江州)라 하였다.
이때 천조(天祚)는 경주(慶州)의 추산(秋山)에서 사록(射鹿/사슴 사냥)하고 있었는데, 
(여진의 배반을) 듣고도, 개의(介意/마음에 두고 생각함)치 않고, 해주자사(海州刺史) 고선수(高仙壽)를 보내, 
발해(渤海)의 자제군(子弟軍) 3천인을 통솔(統率)하여, 영강(寧江)을 응원(應援/호응하여 도와 줌)하게 하였다.


秋九月,遼兵遇女真於寧江州東,戰數合,渤海大敗,或陣沒,或就擒,獲免者無幾。
復攻破寧江州,無少長,悉殺之。
女真服屬大遼二百餘年,世襲節度使,兄弟相傳,周而復始。
至天祚朝,賞刑僭濫,禽色俱荒。
女真東北與五國為鄰,五國之東鄰大海,出名鷹,自海東來者,謂之「海東青」,小而俊健,能擒鵝鶩,
爪白者尤以為異,遼人酷愛之,歲歲求之女真,女真至五國,戰鬭而後得,女真不勝其擾。
가을 9월에, 요병(遼兵)이 영강주(寧江州) 동쪽에서 여진(女真)과 조우(遭遇)하여, 수차례 싸웠는데,
발해(渤海)가 대패(大敗)하니, 혹(或)은 진몰(陣沒/전사戰死)하거나, 혹(或)은 취금(就擒/생포生捕) 되었는데,
획면자(獲免者/사로잡힘을 면한 자)가 무기(無幾/얼마 없음)하였다.
(여진족이) 다시 영강주(寧江州)를 공파(攻破/공격하여 깨트림)하여, 소장(少長/어리고 늙음)에 관계없이, 모두 죽였다.
여진(女真)이 대요(大遼)에 복속(服屬)한 지 2백여 년에, 절도사(節度使)를 세습(世襲)하고, 
형제(兄弟/핵리발→파자숙→영가)가 상전(相傳/이어 전함)하였는데, (오아속과 아골타에 이르러) 두루 다시 시작되었다.
천조(天祚) 조(朝)에 이르러, 상형(賞刑/포상과 형벌)이 참람(僭濫/분수에 넘침, 너무 지나침)하고,
금색(禽色/매사냥과 여색)에 모두 빠졌다.
여진(女真)이 동북(東北)의 오국부(五國部)와 이웃하였는데, 오국부(五國部)의 동쪽은 대해(大海)와 인접(隣接)하여,
명응(名鷹/이름난 매)이 나오는데, 해동(海東)에서 왔다 하여, 이르길 「해동청(海東青)」이라 하는데,
작지만 준걸(俊傑/걸출하게 뛰어남)하고 굳세어, 능히 거위와 오리를 잡을 수 있으며,
(그중) 손톱이 하얀 매는 더욱 진귀하게 여기니, 요인(遼人)이 심히 소중히 하여, 해마다 여진(女真)에게 구(求)하였는데,
여진(女真)이 오국부(五國部)에 이르러, 전투(戰鬭)로서 후득(後得/후에 얻음)하니, 
여진(女真)이 그 시끄러움을 불승(不勝/감정을 억눌러 결국 견뎌내지 못 함)하였다.

及天祚嗣位,責貢尤苛。
又天使所至,百般需索於部落,稍不奉命,召其長加杖,甚者誅之,諸部怨叛,潛結阿骨打,至是舉兵謀叛。
先是,州有榷場,女真以北珠、人參、生金、松實、白附子、蜜蠟、麻布之類為市,州人低其直,且拘辱之,謂之「打女真」。
州既陷,殺之無遺類,獲遼兵甲馬三千,退保長白山之阿朮火。
阿朮火者,女真所居之地,以河為名也。
是月,天祚出秋山,赴顯州冬山射鹿,聞攻陷寧江州,中輟不行。
천조(天祚)의 사위(嗣位/황제의 위를 이어받음)에 이르게 되자, 책공(責貢/요구하는 공물)이 더욱 가혹(苛酷)하였다.
또 천사(天使/천자의 사신)가 이르는 곳은, 백반(百般/백방百方/온갖 방법)으로 부락(部落)에서 수색(需索/재물을 요구함)하니,
차츰 (여진족이) 봉명(奉命/명령을 받듦)하지 않자, (요가) 그 부락장을 소환하여 장형(杖刑)을 가하였는데,
(장형이) 심한 자는 죽으니, 각 부족이 원반(怨叛/원망하여 배반함)하였고,
아골타(阿骨打)는 잠결(潛結/감추고 모음)하였다가, 이에 이르러 거병(舉兵/병을 일으킴)하여 모반(謀叛)하였다.
이에 앞서, (요의 영강) 주(州)에 각장(榷場/송, 고려, 거란, 여진 등이 무역하는 장)이 있었는데, 
여진(女真)은 북주(北珠/혼동강, 송화강 등에서 나오는 진주), 인삼(人參), 생금(生金/정련되지 않은 금), 
송실(松實/소나무 열매), 백부자(白附子/노랑돌쩌귀로 진통제 등의 약재로 쓰임), 밀랍(蜜蠟/꿀에서 짜내는 기름), 
마포(麻布/삼베) 종류(種類)를 장사하였는데,
(요의 영강) 주(州) 사람이 그 값을 낮게 쳐주며, 또한 (멱살을) 잡고 욕하니, 
이를 일컫어「타여진(打女真/여진인은 때려야 한다) 」이라 하였다.
(요의 영강) 주(州)가 이윽고 함락당하자, 무리를 남김없이 죽였으며, 
요(遼)의 병갑마(兵甲/병기와 갑주을 갖춘 말) 3천을 획득하고, 
장백산(長白山)의 아출화(阿朮火)로 퇴보(退保/퇴각하여 유지함)하였다.
아출화(阿朮火)라는 것은, 여진(女真)이 거주하는 땅으로, 하천(河川/압록강)으로 이름을 삼은 것이다.
이달에, 천조(天祚)가 추산(秋山)에서 출발하여, 현주(顯州)의 겨울산에 다다라 사록(射鹿/사슴 사냥)하였는데,
영강주(寧江州)가 공함(攻陷/공격하여 함락함) 되었다는 것을 듣고도, 중철(中輟/중지中止, 중도에서 그만 둠)을 행하지 않았다.

*북주(北珠) : 혼동강(송화강) 등에서 나오는 진주
*아출화(阿朮火) : 강 이름으로는 압록강을 뜻함


十月,差守司空、殿前都檢點蕭嗣先充東北路都統,靜江軍節度使蕭撻勃也副之,
發契丹、奚兵三千騎,中京路禁軍、土豪二千人,別選諸路武勇二千餘人,
以中京虞侯崔公義充都押官,侍衞控鶴都指揮使、商州刺史邢穎副之,屯出河店,臨白江,與寧江女真對壘。
時遼國太平日久,聞女真興師,皆願從軍冀賞,往往將家屬團結軍營隨行。
是月,女真潛渡混同江,掩其不備,未陣擊之。
嗣先軍潰,其家屬、金帛、牛羊、輜械悉為女真所得。
復以兵追殺百餘里,管押官崔公義、邢穎等死之,又獲去甲馬三千。
10월에, 수사공(守司空)과 전전도검점(殿前都檢點/시위군의 총책임자)인 소사선(蕭嗣先)을 동북로(東北路) 도통(都統)으로 
담당시키고, 정강군(靜江軍) 절도사(節度使) 소달발야(蕭撻勃也)를 부도통(都統)으로 삼아,
글단(契丹/거란)과 해족(奚族) 병사 3천 기(騎)와, 중경로(中京路)의 금군(禁軍)과 토호(土豪) 2천 인과,
별선(別選/특별히 선발함)한 각 지역의 무용(武勇/무예가 뛰어나고 용감함)한 2천 여인을 일으켜,
중경(中京)의 우후(虞候/절도사의 막료) 최공의(崔公義)를 도압관(都押官/절도사의 근위병을 이끄는 관명)에 담당시키고,
시위공학(侍衞控鶴/친위군) 도지휘사(都指揮使) 겸 상주자사(商州刺史)인 형영(邢穎)을 부도압관(副都押官)으로 삼아,
출하점(出河店)에 진을 치게 하고, 백강(白江)에 임(臨)하게 하여,
영강(寧江)의 여진과 더불어 대루(對壘/보루堡壘를 구축하여 대치함)하였다.
이때는 요국(遼國)의 태평(太平)이 일구(日久/오래됨)하여, 여진(女真)이 흥사(興師/군사를 일으킴)하였다는 것을 듣고는, 
모두 종군(從軍)하여 상(賞)을 받고자 원하니, 
왕왕(往往/때때로) 장수들이 가속(家屬)을 단결(團結/한데 모음)하여 군영(軍營)을 수행(隨行/따라 행함)하였다.
이달에, 여진(女真)이 혼동강(混同江)을 잠도(潛渡/몰래 건너 옴)하여, 그 불비(不備/갖추지 못함)를 엄습(掩襲)하니,
진(陣)을 치지도 못하고 격파되었다.
소사선(蕭嗣先)의 군(軍)이 무너지고, 그 가속(家屬)과 금백(金帛/금과 비단), 우양(牛羊/소와 양), 
치계(輜械/짐수레와 병장기)가 모두 여진(女真)의 소득(所得)이 되었다.
다시 병(兵)으로 100 여리(里)를 추살(追殺/추격하여 죽임)하였으며,
관압(管押/강제로 압송함)한 관리 최공의(崔公義)와 형영(邢穎) 등은 죽였으며, 
갑마(甲馬/갑옷을 입힌 말) 3천 마리를 사로잡아 갔다.


初,女真之叛也,率皆騎兵。
旗幟之外,各有字號小木牌,繫人馬上為號,五十人為一隊。
前二十人全裝重甲,持鎗或棍棒;後三十人輕甲操弓矢。
每遇敵,必有一二人躍馬而出,先觀陣之虛實,或向其左右前後,結陣而馳擊之。
百步之外,弓矢齊發,無不中者。
勝則整陣而復追,敗則復聚而不散。
其分合出入,應變若神,人人皆自為戰,所以勝也。
처음에, 여진(女真)이 배반(背叛)하였는데, 모두 기병(騎兵)을 거느렸다.
기치(旗幟/전쟁 중 사용하는 깃발) 외(外)에, 각자 글자가 적힌 작은 목패(木牌)를 가지고 있었는데,
인마(人馬)를 묶어 (목패의) 위에 적어 1 호(號)로 하였으며, 50 인을 1 대(隊)로 하였다.
(1대 50명 중에) 앞에는 20 인이 전부(全部) 중갑(重甲/무거운 갑옷)으로 무장(武裝)하여, 창(鎗)이나 혹은 곤봉(棍棒)을 쥐었고,
뒤에는 30 인이 경갑(輕甲/가벼운 갑옷)을 입고 궁시(弓矢)를 잡고 있었다.
매번(每番) 적(敵)을 만날 때마다, 반드시 한 두명이 말을 빨리 달리면서 나와,
먼저 (적의) 진(陣)의 허실(虛實)을 보거나, 혹(或)은 그 좌우전후(左右前後)로 향(向)하고, 
(본진은) 결진(結陣/진을 침)하면서 치격(馳擊/질주하여 공격함)하였다.
100 보(步)의 밖에서, 궁시(弓矢)를 제발(齊發/일제히 쏨)하니, 적중(的中)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기면 곧 진(陣)을 정돈(整頓)하면서 다시 추격하고, 패하면 곧 다시 (무리를) 모아 흩어지지 않았다.
그 분합(分合/나누거나 합침)하고 출입(出入/나가고 들어옴)함의, 응변(應變/임기응변)이 신(神)과 같았고,
(여진족) 개개인마다 모두 자발적으로 싸움하니, 이런 까닭으로 승리(勝利)하였다.


遼國舊例,凡關軍國大事,漢人不預。
天祚自兩戰之敗,意謂蕭奉先不知兵,始欲改用將帥,付以東征之事。
天祚遂召宰相張琳、吳庸,付以東征事。
張琳等碌碌儒生,非經濟才,統御無法,遽奏曰:
「前日之敗,失於輕舉,若用漢軍二十萬,分路進討,無不克者。」
天祚謂其數多,且差十萬,即降宣劄付上京、長春、遼西諸路,
計人戶家業錢,每三百貫自備一軍,限二十日各赴期會,時富民有出一百軍、二百軍者,家貲遂竭。
琳等非將帥才,器甲聽從自便,人人就易槍刀氈甲充數,弓弩鐵甲百無一二。
요국(遼國)의 구례(舊例/오래된 관례)에, 무릇 군국대사(軍國大事)의 관계(關係)에는, 한인(漢人)이 참여(參與)하지 않았다.
천조(天祚)가 양전(兩/영강주와 찰지수 전투)의 패배에서부터, 소봉선(蕭奉先)이 병법을 알지 못한다 생각하여,
비로소 장수(將帥/군의 수장)를 개용(改用/바꾸어 씀)하여, 동정(東征/여진 정벌)의 일을 맡기고자 하였다.
천조(天祚)가 마침내 재상(宰相) 장림(張琳)과 오용(吳庸)을 불러, 동정(東征)의 일을 맡겼다.
장림(張琳) 등은 녹록(碌碌/보잘것없음)한 유생(儒生)이었는데, 경제(經濟)에 재주가 없고, 
통어(統御/통제統御)가 무법(無法)하니, 급히 아뢰어 말하길
「전일(前日)의 패배(敗北)는, 경거(輕舉/경솔하게 일으킴)하여 실패(失敗)하였으니,
   만약 한군(漢軍) 20만(萬)을 사용하여, 분로(分路/길을 나누어 따로 감)하여 진토(進討/나아가 토벌함)한다면,
   이기지 못함이 없을 것입니다.」
천조(天祚)가 그 수(數)가 많다고 이르니, 우선 10만(萬)을 선택(選擇)하였고, 
곧 강선(降宣/임금이 하교를 내림)하여 상경(上京)과 장춘(長春) 및 요서(遼西)의 각 지역에 차부(劄付/공문서를 줌)하니,
인호(人戶/인구와 호구 수)와 가업(家業/가문의 직업)으로 돈을 계산하여, 매(每) 1 군(軍)마다 300 관(貫)을 갖추게 하여,
20 일에 한정(限定)하여 각각 기회(期會/모임을 기약함)하여 다다르게 하였는데,
이때 부민(富民/부유한 백성)은 100 군(軍)과 200 군(軍)의 돈을 내니, 가자(家貲/집안의 재화)가 모두 고갈(枯渴)되었다.
장림(張琳) 등이 장수(將帥)의 재주가 없어, 기갑(器甲/병기와 갑옷)을 자기가 편한 대로 청종(聽從/듣고 좇음)하게 하니,
개개인마다 쉬운 것을 취(就)하여 창(槍)과 도(刀)와 전갑(氈甲/솜털로 만든 갑옷)으로 충수(充數/수를 채움)하였고,
궁노(弓弩/활과 쇠뇌)와 철갑(鐵甲/철로 만든 갑옷)은 백에 한둘밖에 없었다.


雜以番軍,分出四路:
北樞密副使耶律斡離朵淶流河路都統,衞尉卿蘇壽吉副之;
黃龍府尹耶律寧黃龍府路都統,桂州觀察使耿欽副之;
復州節度使蕭湜曷咸州都統,將作監龔誼副之;
左祗候郎君詳穩蕭阿古好草峪都統,商州團練使張維協副之。
獨淶流河一路遂深入女真。
軍馬初一戰,稍卻,各保退寨柵。
是夕,都統斡離朵誤聽漢軍已遁,即離遼、奚之兵,棄營而奔。
明早,漢軍尚餘三萬衆,遂推將作少監武朝彥為都統,再與女真合戰,遂大敗。
餘三路聞之,各退保本路防城。
數月間,遂為女真攻陷,丁壯斬戮無遺,嬰孺貫之槊上,盤舞為戲,所過赤地無餘。
應遼東界內熟戶女真,亦為阿骨打吞併,分揀強壯人馬充軍,遂有鐵騎萬餘。
번군(番軍/이민족 군대)으로 뒤섞어, 사로(四路)로 나누어 출발하였는데,
북추밀부사(北樞密副使) 야율알리타(耶律斡離朵)를 내류하로(淶流河路) 도통(都統)으로 삼고, 
위위경(衞尉卿) 소수길(蘇壽吉)을 부도통(副都統)으로 삼았으며, 
황룡부윤(黃龍府尹) 야율영(耶律寧)을 황룡부로(黃龍府路) 도통(都統)으로 삼고, 
계주관찰사(桂州觀察使) 경흠(耿欽)을 부도통(副都統)으로 삼았으며,
복주절도사(復州節度使) 소식갈(蕭湜曷)을 함주(咸州) 도통(都統)으로 삼고, 
장작감(將作監) 공의(龔誼)를 부도통(副都統)으로 삼았으며,
좌지후랑군(左祗候郎君) 상온(詳穩) 소아고(蕭阿古)를 호초욕(好草峪) 도통(都統)으로 삼고,
상주단련사(商州團練使) 장유협(張維協)을 부도통(副都統)으로 삼았다.
(4로 중에 야율알리타가 지휘하는) 내류하(淶流河) 1로군이 홀로 여진(女真)으로 심입(深入/깊게 들어감)하였다.
군마(軍馬)가 처음으로 일전(一戰)하였는데, 점점 물러나니, 각각 채책(寨柵/목책木柵)으로 보퇴(保退/유지하여 퇴각함)하였다.
시석(是夕/이날 밤)에, 도통(都統) 알리타(斡離朵)가 한군(漢軍)이 이미 달아났다고 오청(誤聽/잘못 들음)하여,
즉시 요(遼)와 해(奚)의 병력을 분리(分離)하여, 영(營)을 버리고 달아났다.
명조(明早/다음날 아침)에, 한군(漢軍)이 아직 3만(萬) 무리가 남아 있었는데,
마침내 장작소감(將作少監) 무조언(武朝彥)이 도통(都統)으로 받들어져, 
재차(再次) 여진(女真)과 함께 합전(合戰/맞붙어 싸움)하여, 마침내 대패(大敗)하였다.
나머지 3 로(路)가 (패전을) 듣고서는, 
각각 본로(本路/본 지역)로 퇴보(退保/퇴각하여 유지함)하여 방성(防城/성을 지킴)하였다.
수개월간에, 드디어 여진(女真)이 공함(攻陷/공격하여 함락함)하니, 
정장(丁壯/장년 남자)을 무유(無遺/남김없이 모조리)로 참륙(斬戮/베어 죽임)하니, 
영유(嬰孺/젖먹이 유아)를 삭(槊/창) 위에 꿰어, 반무(盤舞/빙빙 돌며 춤을 춤)하며 희롱(戱弄)하였고,
지나는 곳마다 적지(赤地/황폐荒廢한 땅)가 되어 남은 게 없었다.
요(遼)의 동계(東界) 내(內)의 숙호여진(熟戶女真/거란 국적의 여진, 계요적여진)이 호응(呼應)하여,
역시(亦是) 아골타(阿骨打)에게 탄병(吞併/병탄併吞/아울러 삼킴)하니,
강장(強壯/강하고 장함)한 인마(人馬)를 분간(分揀/나누어 가림)하여 충군(充軍/군에 충당함)하여,
마침내 철기(鐵騎) 1만(萬)여 명을 보유하였다.


初,蕭嗣先出河店之敗也,諸蕃漢兵將多不赴都統行營聚合,各逃走歸家,或被傷詣行闕而告歸者。
蕭奉先懼弟嗣先獲罪,輒奏天祚云:
「東征潰兵,懼所至劫掠,若不從權肆赦,將嘯聚為腹心患。」
天祚從之,降赦應係出河店潰軍,並免罪歸業,所有遺棄係官器甲,亦不理索。
嗣先遂詣闕待罪,但免官而已。
自是出征之兵皆謂
「戰則有死而無功,退則有生而無罪。由是各無鬭志,累年用兵,每遇女真,望風奔潰。降赦免罪,不能成功者,此也」。
처음에, 소사선(蕭嗣先)이 출하점(出河店)의 패배하였는데, 
제번(諸蕃/각 이민족)의 한병(漢兵)이 장차 도통(都統)의 행영(行營/진영陣營)에 취합(聚合/모여 합침)에 이르지 못함이 많아,
각각 도주(逃走)하여 귀가(歸家)하였거나, 혹(或)은 피상(被傷/상처를 입음)하여 행궐(行闕/궁궐)에 이르러 
고귀(告歸/임금에게 고하고 돌아감)하였다.
소봉선(蕭奉先)이 동생 소사선(嗣先)이 획죄(獲罪/죄를 얻음)할 것을 두려워하여, 천조(天祚)에게 문득 아뢰어 이르기를 
동정(東征/동쪽을 정벌함)한 궤병(潰兵/궤멸한 병사)이, 이르는 곳마다 겁략(劫掠/겁탈하고 노략질 함)할까 두려우니,
   만약 종권(從權/형세를 따름)하여 사사(肆赦/과실을 사면함)하지 않는다면,
   장차 소취(嘯聚/군중의 신호로 불러 모음)하여 복심(腹心/마음속 깊은 곳)에 근심이 될 것입니다.」
천조(天祚)가 따르니, 출하점(出河店)의 궤군(潰軍/흩어진 군대)에 관계(關係)가 있던 자들에게 
항사(降赦/사면령을 내림)를 응(應)하니, 모두 면죄(免罪/죄를 면함)하여 귀업(歸業/생업으로 돌아감)하였고,
소유(所有)하고 있던 계관기갑(係官器甲/관 소유의 무기와 갑주)을 유기(遺棄/남기고 버림)하였는데, 
역시 이색(理索/다스려 찾음)하지 않았다.
소사선(嗣先)이 마침내 궐(闕)에 이르러 대죄(待罪/죄를 기다림)하였는데, 단지 면관(免官/면직免職)할 뿐이었다.
이로부터 출정(出征)하는 병사가 모두 이르길
싸우면 곧 죽음만 있으면서 공(功)은 없고, 퇴각하면 곧 살면서도 죄(罪)가 없다.
   이로 말미암아 각각 투지(鬭志)가 없으니, 누년(累年/해마다)에 용병(用兵)하여, 매번 여진(女真)과 만나면,
   망풍(望風/멀리서 위세를 바라봄)하기만 하여도 분궤(奔潰/도망가 무너짐)하였다.
   항사(降赦/사면령을 내림)하여 면죄(免罪/죄를 면함)하니, 성공(成功) 할 수 없음이, 이와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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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요약
-8월 여진의 아골타가 2000 (금사에는 2500) 병력으로 영강주 공격
 → 천조제 경주에서 사냥하다 이 소식을 들었으나 개의치 않음
 → 해주자사 고선수에게 발해군 3천을 통솔하여 영강주를 도우라 명함

-9월 고선수군이 영강주 동쪽에서 여진군과 교전하여 대패함
 → 영강주성 함락 → 학살이 벌어짐, 병기와 병마 3천을 빼앗아 감
 → 천조제 현주에서 사냥 중에 이 소식을 듣고도 사냥을 계속함

-10월 소사선을 도통, 소달불야(소달발야)를 부도통으로 삼아 7천 병력으로 여진을 공격하게 함
 (거란+해족 3천, 중경 금군+토호 2천, 발해인 2천)
 → 소사선 군을 이끌고 출하점으로 이동하여 보루를 구축함
 → 야밤에 여진군이 혼동강을 도강하여 급습함 → 요군 대파 100리를 달아남
 → 여진이 다시 병마 3천을 빼앗아 감
 → 소사선의 형 소봉선이 소사선이 극형을 받을까 두려워 패잔병들을 사면하라고 천조제에게 건의 
     → 천조제 수락 → 군기 문란 초래
 → 천조제 군정을 담당하는 추밀사 소봉선이 병법을 알지 못한다 생각하여
    재상 장림과 오용을 여진 정벌군 사령관에 임명함
 → 장림과 오용은 한족 병사 20만을 동원 → 천조제 한병 10만으로 줄임
 → 군비를 민간에서 각출함
-4로군 편성(한족 병사가 주축)
 → 1로 : 야율알리타+소수길 (내류하 거란족+해족+한병3만)
 → 2로 : 야율열+경흠 (황룡부+계주)
 → 3로 : 소식갈+공의 (복주)
 → 4로 : 소아고+장유협 (상주)

-11월 압자하 전투 → 요의 10만 병에 대항하여 아골타 1만 병력을 규합하여 압자하로 이동
 → 1로군 야율알리타가 독단으로 여진의 영토로 깊숙이 들어감 → 첫 교전 → 점차 물러나 압자하에 목책을 세우고 대치함
 → 목책을 세운 그 밤에 군중에 한군이 달아났다는 소문을 듣고 야율알리타 거란족과 해족의 병력을 이끌고 퇴각함
 → 실상은 3만 한군은 계속 목책에 주둔 중이었음 → 한족 병사들이 무조언을 도통으로 추대
 → 야밤에 아골타가 1만 여진군 중 3700병력을 급히 편성해 1로군 기지를 급습함
 → 나머지 3로군 1로군이 대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철수하여 본거지로 회군하여 성을 방어함
 → 1로군을 격파한 아골타 몇 달만에 3로군의 성을 모두 함락함 → 학살이 벌어짐 
 → 계요적여진이 요를 배반하고 아골타에 붙음


-거란국지 4부에서 계속됩니다.-

P.S) 본 글은 동의 없이 어느 곳에나 담아 가셔도 됩니다. 출처는 남겨주시면 고맙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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