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사전 요열전中 (청장관전서 제22권)
遼人嘗言女眞兵滿萬。則不可敵。至是始滿萬云。
요 나라 사람들이 늘 말하기를 “여진의 군대가 1만 명만 되면 겨루지 못한다.” 하더니,
이때에 와서 처음으로 1만 명이 되었다고 하였다.
금사 태조본기中
遼人嘗言女直兵若滿萬則不可敵, 至是始滿萬雲.
요새 고려사, 금사, 요사, 송사등을 살펴보고 있는데요,
금나라가 건국되기전 여진족에 관한 것이 궁금해서
이것저것 모아 봤습니다.
대부분 고려사, 금사, 송사, 요사등에서 발췌 내지 근거로 하여 추정한것입니다.
거주형식 : 부족단위
1개 부족 구성(최대) : (추정) 150 여호, 1000 여인
1개 부족 병력(최대) : 500 여인
거주형태 : 주로 산아래 호수나 강가 옆에 부족영역 안에서 이동생활
여름 (산아래 물가), 겨울(산과 물옆에 땅파고 나무와 흙으로 덮는 움막)
나무집 無 → 최초의 거실이 있는 나무집 만든게 시조 함보의 4세손 수가
사용문자 : 無
법 : 無 → 최초의 법을 만든게 시조 함보의 5세손 석로임 → 부족민들이 전통을 거스른다며 땅에 묻어 죽이려 했음
관습 : 有
언어 : 독자적 언어
부족의 관청 : 無 (최초의 관청 시조 함보의 7세손 핵리발 만듬)
성곽 : 無 (최초의 성곽은 7세 핵리발때 처음 나옴)
권력
부족장 : 절대권력은 아니었음
승계 : 주로 큰아들이나, 형제에게도 이어졌음
분가 : 집에 아들이 태어나면 윗형들은 분가함 (형제들끼리 살기도 함)
권력다툼 : 형제간, 숙질간 권력다툼 있음
여진족 최초의 4개부족 이상을 거느린 부족은 완안부족 함보의 6세손 오고내임
(단 영향력만 행사했지, 병력동원을 전부 하지 못하였음. 최초로 1천명 이상 모인것은 7세손 핵리발때임)
풍습
-윗사람이 집에서 묵으면, 시집안간 집안 여자로 시중들게함 (여진과 거란의 전쟁요인중 하나)
-형이 죽으면, 아우가 형수와 같이 가정을 꾸림
-정실과 첩실이 있음
-년월에 대한 개념이 없음 (몇년생X, 지금 몇월X), 날짜에 대한 개념 없음(월초, 월말X)
-금사에 의하면 완안부의 경우 금의색인 흰색을 숭상
먹거리
-짐승사육 : 돼지, 양, 염소, 소, 말 (특히 내구력이 좋은 준마가 많음)
-수렵
-어업
-농업 : 조,보리
-식기는 큰솥을 이용 하였음
옷
-겨울 : 짐승가죽 (담비, 청설모, 돼지, 여우, 소, 말, 양, 개 등등)으로 위아래옷, 모자, 신발
-여름 : 나무껍질로 만든 베옷 (흰색)
광물
-철 : 無/모두 수입(철 생산이 안돼, 갑옷이 매우 귀함. 갑옷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기도 함)
-사금 : 有
국민성 및 체질
-사납고 억셈
-몸이 부지런함
-추위와 더위에 잘 견딤
-타부족이 땅을 침범하면 반드시 보복함
군사관련
-어릴적부터 활을 쏨. 명중률이 매우 높음
-누구나 말을 잘탐, 말타고 활쏘기를 매우 잘함
-전쟁이 일어나면 거의 모든 남자가 전쟁에 나섬
-활, 화살, 칼, 창등의 무기를 스스로 마련함
-군량도 스스로 마련함
-전투가 있으면 죽을힘을 다해 힘껏 싸움
-싸움에 지게 되면, 살해 당하거나 노예가 됨 (부족운명 공동체)
-부족의 물자징발도 자기 일처럼 협력함
-적은수로 많은수를 이겨낼수 있을만한 군사력
송사전 요열전에 의하면, 거란인들은 <여진인들 1만이 모이면 겨루지 못한다>고 말함.
-여진이 최초로 군사 1천명 모인것은 1102년 시조 함보의 7세손 영가 때임.
1천명을 모으자 영가 왈 "이런 갑병이 있으니, 무슨일인듯 못할소냐?"
(위의 1천은 한부족장에 의해 소집된 병력을 뜻함)
(여진 연합군의 경우 고려 문종조 1073년 고려 무장 참관하에 나갈촌 전투에서 30개 부족 2030명이 연합하여
1개 부족 500명과 전투를 벌린 예가 있음)
-갑옷 500벌 이상이 준비된것은 1113년임. 병력 1천에 갑옷 500벌을 우연히 획득
(거란에서 반란이 일어나 여진쪽으로 도주했는데, 사로잡아 갑옷 500벌 획득)
-여진이 최초로 군사 1만명 모인것은 1114년 시조 함보의 8세손 아골타 때임, 1년만에 황제선언
-칼은 오른쪽에 참
-전쟁시 획득한 물품은 부족민들이 나눠가짐
-전쟁전에 하얀물을 부어 제사를 지냄
성 방어시 주요 무기
-고려사에 의하면 화살과 돌
관습에 의한 형법
-살인하면 마소 30마리로 변상하고 살인자를 넘김 (시조 함보에 의해 생김, 그전에는 부족간에 전쟁)
-경범죄 : 버드나무 회초리로 매질
-살인,절도,겁탈 : 뒤통수를 쳐서 죽임/가산몰수 4:6=부족장:고발자 / 죄인의 가족은 노비
타국에 대한 입조
-요 : 매년 요황제 주도하의 연회에 참석, 매년 다량의 매를 잡아오라 명령(여진과 거란의 전쟁요인중 하나)
요황제의 사냥터에 부족장들이 알현함
-고려 : 주기적으로 입조. 입조물품 : 준마, 담비, 청설모 가죽, 사금 ↔ 하사품 : 금,은,비단
입조인원 : 1부족당 20~70여명
발해인(고영창)과의 관계 :
-1114년 아골타가 요+발해 연합군을 격파하고 발해인을 많이 잡아갔음
발해인들 풀어주고, 회유함 "여진과 발해는 본래 한 집안이다"
-1116년 고영창 발해인 8천병을 모아 거병
1. 고영창 : 여진족~ 우리와 함께 거란을 치자! (이때 병력 8천여명)
2. 아골타 : 당연히 거란을 쳐야지! 내게 귀부하면 왕을 시켜주지! (이때 병력 1~2만 여명)
3. 고영창 : 헛소리 말고, 너희들에게 사로잡힌 발해인 돌려주라!
4. 아골타 : 그렇다면 요와 연합해 너희를 쳐주마! (요 6만명 출동!)
5. 발해군이 여진사신 호사보를 만나 조롱하는말 : 여진무리가 난을 일으키기 좋아 한다는데, 너희 무리가 그렇구나!
결론 : 여진 → 발해 : 우린 한 집안이니까, 내발밑으로 들어와!
발해 → 여진 : 이 촌놈들이! 감히 우릴 어떻게 보고!
패망원인 : 송사에 의하면 <전성기에 이르러 각 종족들이 시기하고, 장수들이 딴마음을 먹어서>
통설에 의하면 <야성을 잃어서, 한족의 문화를 받아 들여서, 사치풍조가 만연해서>
명사에 이런말이 있었다고 하네요. 여진족을 대하려면
女眞一萬卽天下不堪當 : 여진1만이면 천하가 감당할수 없다
하니
非太强 非太弱 : 너무 강하지도 않게, 너무 약하지도 않게
P.S) 고려사 예종조의 윤관의 17만 북벌군에 맞선 여진군이 [2만 보기병], [수만] 이란 기록이 있는데
이는 아골타등의 1부족장에 의한 전투가 아니라, 고려군 VS 여진총연합의 대결이라 그런듯 싶습니다.
금사에 의하면 1114년 아골타가 제부족의 제장들을 소집하여 요나라를 칠때 병력이 2500 이였습니다.
고려사의 여진 수만은 아골타의 직접영을 받지 않는 각부족의 연합체 였던듯 싶습니다.
고려사에도 먼 곳의 추장이 해마다 공격했다 라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의 침공이 여진의 힘을 한곳으로 모으는데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듯 싶습니다.
고려사 윤관 열전에 윤관의 북벌당시 병마검할(兵馬鈐轄) 임언(林彦)이 쓴 영주청벽기(英州廳壁記)에 의하면
여진 6천급을 참수하고, 5만명이 항복했다라는 구절도 있으니 초기에는 압도적인 승리를거둔 셈이지요.
이런 초반의 대승으로 인해, 절박함을 느낀 여진족들이 힘을 합쳐 싸운듯 싶습니다.
반면에 1114년 아골타가 요를 칠때, 처음 병력이 2500 밖에 되지 않는 이유는
금사에도 나와 있듯이, 여진 부족들이 요와의 전쟁은 승산이 없다고 느꼈기 때문인듯 생각됩니다.
그러나, 아골타가 2500 병력으로 3배가 넘는 요+발해 연합군을 격파하자
아골타밑으로 오는 세력이 눈덩이 불듯 늘어난 셈이지요.
고려와의 전쟁 당시에도 아골타의 완안부는 여진부족중에 가장 강성한 세력이긴 하였습니다.
금사만 봐도 고려와의 전쟁을 주도한것은 아골타이니 말입니다.
다만 직속이냐, 아니냐의 차이점일듯 싶습니다.
고려와의 전쟁이 여진통합의 원인을 제공했다면,
요와의 전쟁을 통해 본격적으로 아골타가 대부족장?으로 대두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고려사 윤관 열전中 여진군 6천여 수급을 베고, 5만여명의 항복을 받았다는 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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