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문종이야기(10) 고려시대 천문과 달력? 관련 관청들

 고려사에 후고구려 국주 궁예가 점을 보았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를 보아 점을 보는 관청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며

신라 시절에도 관상감(觀象監)에 봉공,복정,복사 관직이 있는것으로 보아

태봉, 고려 모두 건국초기부터 사천(司天)하는 관청을 운용했을 것이 확실합니다.

 

고려사 식화 1편의 목종원년의 전시과 기록을 샆펴보면

천문, 역산, 풍수, 음양, 술수에 관한 관청이 정확하게 나와 있지요.

 

천문을 살피는 사천대(司天臺)

길흉을 점치는 태복감(太卜監),

음양 술수를 관장하는 태사국(太史局)

 

해당관직의 전시과는 https://cafe.naver.com/booheong/42742 를 참고하세요.

 

네이버 백과사전에는 사천대가 현종조에 태복감에서 바뀐 명칭이라고 하는데, 이는 맞지 않는듯 보입니다.

아마 현종조에 태복감이 사천대로 흡수 통합된 것은 아닐까 추정해 봅니다.

924년 태조 왕건이 전남 영암 호족 최상흔(崔相昕)의 아들 최총진(崔聰進)에게 꿈을 해몽하게 하고 지몽이란 이름을 하사 했으며,

혜종조에는 사천대의 공봉(供奉/6품)직에 있었음을 살펴보면 이를 알수 있습니다.

 

문종조에는 해당 관청들의 직위가 한층 높아져서, 3품 관리가 장으로 임명 되었지요.

물론 나라가 안정되면서 태평성대의 시절 이였기에, 농사 및 기후 등에 관련된 일이 중시된것이라 볼수 있지요.

 

그렇다면 요즘 제가 연재하고 있는 문종조 이야기중에 천문관련 에피소드를 몇가지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문종 원년 (1047년) 3월 기사中

○ 3월 초하루 을해일에 일식이 있었다. 어사대가 아뢰기를, “전례에 일식이나 월식이 있으면, 태사국(太史局)이 미리 위에 아뢰어 중외에 고유(告諭)하여 사(社)에서 북을 울리고 왕은 흰옷을 입고 정전을 피하며 백관들은 소복을 입고 각각 그 본국(本局)을 지키며 해를 향하여 두 손을 잡고 서서 해가 다시 밝아지기를 기다렸는데, 이제 춘관정(春官正) 유팽(柳彭)과 태사승(太史丞) 유득소(柳得韶) 등이 천상(天象)에 어두워 미리 아뢰지 않았으니 그 직을 파직하소서." 하였다. 제하기를, “용서하라." 하니, 다시 논박하기를, “일식과 월식은 음양의 상도(常度)로서 역산(曆算)이 틀림없으면 그 변화를 알 수 있는데 그 관직에 적당한 사람이 아니어서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으니, 어찌 대번에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먼저 아뢴 대로 죄를 주소서." 하니, 따랐다.

 

※요약 :

검찰청 "기상청 직원 일식 못맞춤 잘라야함" → 문종 "용서" → 어사대 "직무유기 맞음, 재고바람" → 문종 "OK"

 

문종은 고려초부터 쓰여온 당나라 역서인 선명록(宣明曆)이, 고려의 실정과는 오차가 많다는 점을 인지하고

새롭게 고려만의 역법에 의한 역서를 만들게 합니다.

본시 역법, 역서라는게, 중국에서는 천자만의 고유한 권한으로 인식되어 왔으며

송나라에서는 18황제에 18번의 개력이 있었다고 하네요.

 

문종 6년 (1052년) 3월 기사中

○ 태사(太史) 김성택(金成澤)에게 명하여 십정력(十精曆)을, 이인현(李仁顯)에게 칠요력(七曜曆)을, 한위행(韓爲行)에게 현행력(見行曆)을, 양원호(梁元虎)에게 둔갑력(遁甲曆)을, 김정(金正)에게 태일력(太一曆)을 짓게 하였다.

 

한편 당시에는 역법에 따른 다음해 역서를 매년 편찬했던 모양인데,

문종 33년(기미년 1079년)에 다시 최신식 송나라 역법으로 개정했나 봅니다.

이에 태사국에서 역법 변경에 대한 의견을 보내오기도 하였는데요,

요는 송나라 역법이 크게 틀리진 않는데 함부로 역법을 바꾸는 것은 마땅치 않다는 것이였습니다.

 

문종 35년 (1081년) 12월 기사中

○ 지태사국사(知太史局事) 양관공(梁冠公)이 아뢰기를, “지금 내년 역서(曆書)를 교열하니, 의심나거나 그릇된 점은 없었습니다. 다만 납일(臘日)을 기미년 이후로 송 나라 역법을 따라 술일로 써 왔습니다마는, 신이 음양서를 상고하건대, '대한(大寒) 전후로 가장 가까운 진일(辰日)이 납일이 된다.' 하였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이 법을 써 온 지가 오래였습니다. 하물며 고사(古史)에 '하 나라에서는 가평(嘉平), 은 나라에서는 청사(淸祀), 주 나라에서는 대사(大蜡), 한 나라에서는 납(臘)이다.' 하여 그 명칭은 각기 달랐으나 모두 그 해의 일을 마쳤으므로 사냥하여 짐승을 잡고 만물을 모아서 온갖 신(神)에게 보답하던 것인데, 그 법을 함부로 변경함은 마땅치 않습니다. 유사에게 맡겨서 상정한 뒤에 시행하소서.'하니, 따랐다.

 

이외에도 대대로 곡물신에게 제사 지내는 사직단 관련 기사도 있네요.

 

문종 6년 (1052년) 2월 기사中

○ 사직단(社稷壇)을 황성(皇城) 서쪽에 새로 짓고 친히 제사를 지냈으며, 집사한 원리(員吏)에게 각각 작 1급을 올려주고 행차를 따랐던 군사에게 차등 있게 물건을 내려주었으며, 또 단을 쌓은 원리에게 작 1급을 내려주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