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황혼, 강건성세의 여명(105) ─ 갈등

 담사동, 유광제, 임욱, 양예. 이들은 모두 강유위로 인하여 군기대신장경에 임명된 이들이고, 당연히 모두 숙청 당해 죽었습니다. 여기에 어사 양심수(楊深秀)와 강유위의 동생 강광인까지 포함하여 모두 6명이 처형되었습니다. 무술육군자란 바로 이들을 말합니다.



 문제가 된 군기대신장경의 지위에 이들이 오른것은 정변이 있기 열흘전 쯤이었습니다. 그만큼 사건의 전개는 급작스러웠습니다. 서태후의 입장을 말하자면, 그녀는 이들 개개인에 대해서는 별 생각도 없었을 것입니다. '변법' 자체도 문제의 대상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이 황제에게 힘을 실어주는것이고 이는 서태후의 권력을 빼앗는 일이었습니다. 요지는 '개혁' 이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문제입니다. 


 만일 개혁이 주된 문제라면 처형되는것은 무술육군자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죽어버린 개혁가들이 개혁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권력이 문제라면 그것만으로도 끝이 나진 않습니다. 서태후가 노리는 인물은 장음환이었습니다.


 고위대신인 장음환은 분명히 강유위의 정책에 대해서는 지지를 했지만, 딱히 적극적으로 같이 일을 처리하진 않았습니다. 강유위 역시 훗날 이야기하길 당시의 유신운동에서 장음환과 연계를 취한적이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성가신 인물은 기회가 왔을때 처리해버리는 쪽이 손쉬운 법입니다. 강유위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졌을때, 장음환의 집 역시 수색을 당했고 이틀 뒤에 그는 투옥되어버렸습니다. 목숨이 날아가는것은 시간 문제였습니다.


 무술년의 유신개혁에 대한 열강의 대체적인 반응은 퉁명스레 지켜보고만 있는 식이었습니다. 강유위의 탈출 과정에서도 서양 열강의 공식적인 세력은 그다지 열의를 보이지 않았지만, 장음환은 이야기가 달랐습니다. 장음환은 빅토리아 여왕 재위 60주년 행사에 참석하여 훈장을 받았었고, 정치적인 스탠스 자체도 친영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당연히 영국이 그를 구하기 위해 움직였습니다.


 맥도널드 영국 공사는 일본의 대리 공사 하야시 곤스케에게 협조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시 청나라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와 있었습니다. 하야시 콘스케는 이홍장에게 장음환의 처형을 막아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이홍장은 장음환의 구명에는 그다지 열의는 없었지만, 장음환의 처형을 이유로 각국이 더욱 간섭할 것은 걱정했습니다. 그리고, 하야시 곤스케는 이런 말도 전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가)장음환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맥도널드 공사도 이홍장에게, 장음환의 처형이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를 보냈습니다. 독일 황제와 미국의 매킨리 대통령 등도 장음환의 구명을 요청했습니다. 이렇게 각지에서 구명의 손길이 올라온 끝에 장음환은 간신히 처형을 면했습니다. 이러한 일은 이미 개혁이나 변법하고는 상관이 없는 일 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중요한것은 '개혁' 그 자체가 아니라 권력의 문제였습니다.


황준헌(黃遵憲)


 이렇게 목숨을 건진 고관은 장음환 외에 황준헌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한국에게도 연관이 있는 인물입니다. 다름 아닌 조선책략(朝鮮策略)을 조선인 김홍집에게 전하여 국내 정치에 거대한 파란을 일으키게 했던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황준헌은 강유위와 친밀한 관계가 있었기에 그 역시 탄핵을 받았는데, 황준헌도 외국인의 힘으로 목숨을 구했습니다.


 황준헌이 쓴 책 중에는 일본국지(日本國志)라는 책이 있습니다. 일본쪽에서는 그 책을 보고, 그 인물이 주일 공사에 임명되면 좋겠다는 의견을 전했고, 청나라 총리아문도 긍정적으로 생각하여 황준헌을 주일 공사로 임명했던 것입니다. 황준헌이 탄핵을 받은것은 부임을 받고 부임지로 이동하던 중이었는데, 청나라에 머물던 이토 히로부미는 하야시 곤스케의 편으로 황준헌의 처벌이 너무 강하면 항의하겠다는 의사를 전했습니다. 


 또한 상하이에서 서양인 수십명이 황준헌을 구출하겠다고 난동을 부리는 일이 있었는데, 그 뒤에는 영국 총영사가 있었습니다. 이런 저런 반발이 나오자 적당히 감형을 시켜 황준헌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강유위의 도주, 변법파의 최후, 무너진 유신의 꿈. 지난날 변법파가 수도에서 개혁을 벌일때, 거의 모든 지방관들은 서태후가 두려워 본체만체 했지만 오직 호남 순무였던 진보잠(陳寶箴)만은 이에 동조했고, 안찰사였던 황준헌은 그 일을 도왔습니다. 


 하지만, 이제와서 보면 모두 허망한 꿈일 뿐입니다. 터벅터벅 고향의 집으로 돌아온 황준헌은, '집에 이르다' 라는 제목의 시를 한 수 적었습니다. 



 도처에 풍파 있어 돌아오는 날이 늦었으니,
 병든 몸 초췌하나 아직은 버틸 만하다.
 선잠은 깨기 쉬워라, 장초(藏蕉)의 꿈.
 다난하여 아직 만나노라, 전구(剪韭)의 때.


 큰 바다 헤엄치는 뱀장어는 찾으면 흔적이나 있건만,
 노옹이 말을 잃음은 점을 쳐도 알기 어렵다.
 거문고 잡고 구유조(拘幽操)를 뜯노라니,

 달은 중천에 떠 있고, 하늘은 사방에 드리웠네.




 열자(列子)에서 이르기를, 정나라 사람이 사슴을 쏘아 잡고 나서 그것을 파초 잎으로 감초두었는데, 나중에 감춘 장소를 잊어버리게 되자 '그것은 본래 꿈이었을 뿐' 이라며 자신을 타이르면서 체념했다는 것이 '장초의 꿈' 입니다. 부추를 아무리 잘라도 금세 자람을 뜻하는 것이 전구입니다. 


 변법에 동조하여, 이것만이 중국을 구원할 수 있을것이라 여기며 기뻐하면서 개혁을 하던 때, 지금 와서 보면 한낱 꿈이었다고 자신을 위로하고 싶을 만큼, 허망한 기억. 국난은 아무리 잘라내어도 끝이 없는데, 새옹지마의 고사처럼 운명은 점쳐보아도 알 수 없습니다. 잡혀 있는 몸으로 거문고를 뜯은 주문왕이 연주한 구유조처럼, 스스로의 마음의 하늘에는 어둠이 드리워져 있을 뿐입니다.


 황준헌과 같이 개혁에 동조한 진보잠도 처벌을 받았습니다. 변법파나, 여기에 동조하는 세력은 철저하게 괴멸되었습니다. 황준헌은 다음과 같은 시를 하나 더 적었습니다


 옳고 그름, 옛것과 새것이 분분하여 정하기 어려우니,
 그대는 보라.
 한선(寒蟬)처럼 입을 다문 중관을.


 옳음이 그림이 되고, 옳다고 하는 사람을 그르다고 처단하는 시대, 사람들은 쓰르라미(寒蟬) 처럼 입을 다물고만 있습니다. 100일간의 풍운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포부와 꿈을 이야기하며, 개혁과 밝은 시대를 논의했습니다. 그러나 가을이 깊어지면 울지 않는 쓰르라미처럼, 지난날 개혁을 이야기하며 웃었던 관리들도, 지나가다 얼굴이라도 볼라치면 입을 다물고 고개를 저을 뿐입니다.


 이 울분은 어디에서도 풀 수 없을 것입니다. 황준헌은 시라도 지어 이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중국은 다시 한번 암흑 속에 휩싸였고, 이는 주더가 살던 지방에서도 느낄 수 있는 무거움이었습니다. 주더는 의기소침한 서당의 무거운 분위기에서, 노선생의 신랄한 비유담을 듣느라 고역을 치뤘습니다. 그 와중에도 승승장구 하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면, 의심할 나이 없이 그는 원세개 였습니다. 



 당시 세간에는 이런 가요가 떠돌았습니다.


 "육군자의 머리가 떨어지고, 원항성은 꼭대기가 붉어졌네. 한 동아리를 팔아먹어 기이한 공 세웠네. 강유위와 양계초는 꿈속에 있네. 원항성이 이렇게 사납고 야심있는 호걸임을 몰랐도다."


 꼭대기가 붉어졌다는것은 직급을 나타내는 수술의 색깔이 승진했다는 뜻입니다. 밀고 이후 원세개는 승승장구 했습니다. 원세개는 부지런히 베이징을 드나들었고, 서태후의 환심을 사야만이 유리하다는 점을 깨달아 서양의 특이한 물건들을 구해 서태후에게 바쳤습니다. 게중에는 유리로 만든 프랑스제 뮤직박스도 있었는데, 그 안에는 춤추는 금발의 아가씨 인형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외에는 아름다운 구리 침대라던가, 프랑스제의 영롱한 색깔을 띤 사기접시 등이었습니다.


 게중에 뮤직박스는 서태후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서태후는 원세개가 부하노릇을 할 줄 안다며 칭찬했습니다. 결국 원세개는 공부우시랑(工部右侍郞)이 되고, 군대를 훈련시키는 일도 계속 맡게 되었습니다. 당시 원세개의 나이는 고작 마흔 한 살이었고, 그 나이에 그 정도 위치에 오른것은 대단한 수완이었습니다.


 그리고 원세개는 산동으로 군대를 끌고 가 훈련하도록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산동에는 다름 아닌 의화단(義和團)의 세력이 커지고 있었습니다.




 그보다 약간 앞선 시간, 런던에서 자신을 홍보하였던 쑨원은 일본으로 이동했습니다. 납치 사건 이후로 쑨원의 명성은 상당히 유명해졌지만, 그에게 개별적으로 호감을 표시하는 인물들이 아닌, 외무부를 비롯한 실제적인 열강의 국가권력등은 쑨원에게 큰 관심을 봉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들은 이미 청나라 정부를 압박하면서 자신들이 중국 내에서 원하는 요소는 거진 다 가져가고 있었는데, 그런 와중에 청 정부를 뒤엎겠다는 사람을 도와주어서 이득을 볼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서양에서는 쑨원이 원하는 외국의 도움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반면에 일본은 달랐습니다. 당시 일본의 국제적인 위상은 애매한 처지였습니다. 청일전쟁의 승리는 일본을 세계적인 강대국 중 하나로 끼게 만들었지만, 그것이 소위 '열강' 이라 불리우는 세력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일본은 열강이 될 수도 있는 군사적, 경제적 능력을 완전히 갖추지 못한 상태였고, 따라서 국제 관계에서도 어느정도 불리한 위치에 놓여 있었습니다.


 일본이 중국이라는 전리품을 다른 열강들과 사이좋게 뜯어먹을 수 있는 기회가 온다해도, 일본에게 그 가장 좋은 부분이 돌아갈 리는 없었습니다. 삼국간섭은 이러한 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점이었습니다.


 일본은 이제 동아시아의 독보적인 강국으로 성장했지만, 그것이 소위 '아시아의 질 낮은 친구들로부터의 탈출' 을 의미하지는 못했습니다. 따라서 자연스레 '유럽인들은 어떤 아시아인도 자신들과 동등하게 대해주지는 않을것' 이라는 생각으로 나아갔으며, 이렇게 되자 서구 제국주의와 협력해 보아야 결과는 재앙일 뿐이며, 자연히 아시아가 뭉치는것만이 살길이라는 '대아시아(연대)주의' 적 사고 방식을 가지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런 대아시아주의자들은 '한발 먼저 앞서 있는 일본이, 자연히 후진적인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여러 나라의 개혁을 도와주는것이 당연한 책무'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체적으로 이는 구실적인 기만에 가까운 이야기지만, 개인적인 차원으로 가자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긴 있었을 겁니다. 





 미야자키 도텐(宮崎滔天)으로 더 알려진 미야자키 도라조(宮崎寅藏)는 그런 대아시아주의적 모험가 기질을 가지고 있었(고, 그런 도텐을 후원하는 자들은 훨씬 '현실적인 의미에서 대아시아주의를 주장하는' 정치가들이었습니다.)는데, 마침 광저우 봉기의 실패 이후 일본에서 지내고 있던 진소백으로부터 쑨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참이었습니다. 그는 쑨원이 일본에 도착하자 곧 그를 찾아갔습니다. 둘은 급속도로 친해졌습니다.


 쑨원의 여러 발언등은 서로 모순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쑨원이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말을 바꿀 수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쑨원은 여러차례 기만적인 태도를 취했는데, 기본적으로 이것은 '상황을 자신이 원하는대로 이끌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나 도텐에게 쑨원은 그때 당시까지는 모호하게 이야기했던 자신의 목적, 즉 단순히 청나라를 끝장내는것이 과제가 아니라, 이후 공화국을 세우는 것이 진정한 목적임을 이야기 했습니다.


 쑨원은 유럽을 다녀온 경험을 바탕으로 서구 제국주의가 그들의 많은 돈, 그리고 강력한 힘을 여러가지 나쁜 일에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말하며, 그들이 중국을 '도마' 위에 놓고 있다고 고발했습니다. 그리고 재빠른 혁명만이 중국을 구할 뿐만 아니라, '모든 아시아 나라들을' 인도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도텐이 듣고 싶어하는 말이었고, 청나라 왕조를 유지시키는게 더 이득한 다른 서양 열강들과는 달리, 직접적으로 소위 '혁명' 을 후원하는 쪽이 더 이득이라고 여겼던 일본에서는 영국에서보다 더욱 효과적인 발언이었습니다.


 영국에서는 외무부 등에게 무시를 당했던 쑨원은, 일본에서는 여러 유력한 정계의 지도자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본인에 대해 상당히 자신감이 강하던 쑨원은 이때 난생처음으로 '자신이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관심' 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쑨원은 유럽에서보다 훨씬 쉽게 여러 후원자들을 구했는데, 다만 일본 외무성이 혁명가를 공식적으로 후원하여 청조의 비위를 거스르고자 하지는 않았으므로 쑨원은 중국어 선생이라는 신분으로 행세했습니다. 그리고 '가운데 있는 산' 을 의미하는 일본음 '나카아먀' 로 위장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손중산' 입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말하자면 쑨원은 일본인들이 도와주고 있었던 '유일한 후보자' 가 아니었으며, 보다 정확히 말하면 '가장 중요한 후원자' 도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혁명가들은 일본의 극단적인 우익 민족주의자들에게는 일종의 '투자 대상' 으로 여겨졌는데, 그 무렵의 가장 유력한 '투자 종목' 은 바로 강유위와 양계초 였습니다. 강유위와 양계초는 이러한 '투자자' 들의 도움으로 역시 일본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강유위, 양계초 등과 쑨원은 분명히 사상적으로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후원자인 일본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건 그다지 중요한 점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청나라 정부의 입장에서도 그런 차이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강유위건 쑨원이건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을 반역자에 불과했으니 말입니다. 어찌되었건, 일본은 서로 다른 개혁세력의 통합을 중재하길 원했습니다.


 쑨원은 이러한 통합에 대해 꽤 적극적이었습니다. 앞서 말했다시피 쑨원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인데, 그런 그의 실용적인 관점에 있어서는 이러한 타협은 그다지 놀라울 일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미 쑨원은 자기가 황제가 되기를 바랐던 유학준같은 사람과도 손을 잡은 전례가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강유위 였습니다. 쑨원이 '혁명가' 인데 반하여, 강유위는 '개혁자' 였고, 강유위는 '황제를 구하는것이 자신의 사명' 이라는 입장에서 한발자국도 물러나길 거부했습니다. 예컨대 강유위의 입장에서 보자면, 쑨원은 그저 '반역자' 일 뿐이었습니다.



 강유위가 워낙 고압적인 태도로 나서는 바람에 이들의 통합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고, 강유위는 일본에서 받은 보조금을 들고 캐나다로 떠나 아예 보황회(保皇會) 조직을 새로 세워 버렸습니다. 많은 자금을 이러한 해외에서 충당하던 쑨원에게 있어서, 이것은 자신의 활동영역에 대한 공격이나 다를 바 없었는데, 실제로 쑨원의 자금원은 심각하게 줄어들고 말았습니다.


 한 가지 희망이 보인다면, 강유위가 없어진 자리에 혼자 남은 양계초 였습니다. 양계초는 그 당시 중국 최고의 정치 평론가라는 명성을 쌓고 있었는데, 이 양계초가 '개혁자' 를 넘어 '혁명가' 들의 입장으로 전향하는듯 보였던 것입니다. 이에 쑨원은 개혁파 내부에 분열을 일으켜 혁명파의 이득을 취하려고 생각했지만, 되려 1년이 지날 무렵 양계초는 다시 강유위의 입장으로 돌아가버렸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오히려 쑨원이 소개해준 하와이 화교들의 지원도 양계초가 가져가 버린 것입니다.


 양계초는 많이 망설였지만 끝내 쑨원의 판단과 지도력에 대한 의심을 떨쳐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점점 일본의 대아시아주의자들은 쑨원의 방식에 마음을 뺏기고 있었습니다. 쑨원의 방식은 중국의 지식인들로부터 '무모하다' 는 비난을 피하지 못했지만, 오히려 그러한 모험이 더욱 인기를 끌었던 것입니다. 이를테면, 바로 필리핀 독립운동을 도우려 한 시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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